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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는 이유

by 김준정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사람들 사회 부적응자나 낙오자들 아니여?”

아부지가 두륜산 산행 중에 한 말이었는데, 어떤 말 뒤에 그 얘기가 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맥락 없이 얘기하기’는 아부지의 주특기다.


<나는 자연인이다>는 MBN 방송으로 깊은 산 속이나 무인도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출연자 중‘황도 이장’은 충남 보령시에 있는 무인도 황도에 정착하여 7년째 살고 있다. 그의 하루는 끼니를 잇기 위한 끊임없는 노동으로 채워져 있다. 농사를 짓고, 닭을 키우며 전기와 물이 없는 곳에서 생존하기 위해 태양발전기와 바위 냉장고를 만들었다.


그 가무 인도에 오게 된 계기는 사업실패였다. 도망친 것이 맞았다. 하지만 황도에서 그의 생활에서 무력감과 패배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를 포함한 출연자들이 처음에는 저마다의 이유로 현실도피를 했을지 모르지만, 어떤 이유로 삶에 대한 의욕이 생긴 것 같았다. 그래서 시청률이 높은 것 아닐까? 내가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이유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을 때를 상상할 수 있어서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배낭 하나를 메고 산길을 걷는 것도 그런 단출한 즐거움이 있는 일이다.


4월 13일 두륜산 산행코스는 쇠노재-위봉-두륜봉-가련봉(703m)-노승봉-오심재-북미륵암-표충사였다. 종주팀에서 처음 가는 코스로 비탐 구간이었다. 암릉이 많은 두륜봉은 멋진 조망을 감상할 수 있었지만, 비 온 뒤라 바위가 미끄러워서 위험했다.


초반부터 로프 구간이 많았다. 이제껏 가본 코스 중에 가장 경사가 심하고 거리가 길어서 긴장이 되었다. 특히 두륜봉 오르기 직전에 있는 직벽은 15~20m였는데, 위를 쳐다보니 아득할 정도로 멀게 보였다. 서두르다 자칫 사고가 날지 몰라서 모두들 신중하게 움직였다. 앞사람이 완전히 올라가길 기다렸다가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다음 사람이 로프를 잡았다.


내 차례였다. 줄을 놓칠세라 바듯이 잡고 올라가는데, 팀장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서조 금 쉬어.”

로프도 개 중 하나가 끝나는 지점에 올라설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었고, 마저 오르기 전에 숨을 고르라는 얘기였다. 정신없이 다음 줄을 잡으려던 나는 멈춰 서서 위를 올려봤다. 팀장님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줄을 움켜쥐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거의 다 올라왔을 때 팀장님의 손을 잡았다. 덕분에 수월하게 평평한 바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팀장님은 나 다음에도 회원들의 손을 잡고 당겨 주었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웅크리고 있는 팀장님을 보니 왠지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상대를 구분하지 않는 봉사 이어서다.

“오랫동안 왔던 회원이 안 나오고, 그 자리에 신입회원이 와도 두 사람에게 내가 대하는 건 똑같을 거야.”

팀장님이 가끔 하는 얘기다. 종주팀에 오래 다닌 회원들에게는 어쩌면 서운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다. 냉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빠(가짜 아부지 아님)는 자식 사랑이 각별한 분이다. 그런데 오빠와 나는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오빠는 아빠가 나를 편애했다고 생각하고 나는 반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아빠는 아들이 공부를 잘하길 바랬지만 오빠는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아빠는 늘 아들을 못마땅해했고 오빠는 아빠 앞에 서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나는 그 사이에서 눈치를 보느라 바빴고, 나라도 내 할 일을 하자고 생각했다. 나는 성적이 좋았지만, “딸과 아들이 바뀌어서 태어났다면 좋았을 거”란 아빠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 나는 오빠와 사이가 좋지 못했고, 늘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특정인을 향한 호의는 동시에 소외되는 이를 생기게도 한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끼리끼리 어울리다 보면 무리에 속하지 못한 아이들이 박탈감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어쩌면 팀장님의 말은 누구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닐까? 장기 출석 회원이라 우대하고, 같은 학교 출신이라고, 동년배라고 챙기다 보면 기득권이 생기면서 그 사이에서 소원해지는 사람이 발생하고, 회원들끼리 불편한 감정이 야기될 수 있으니까.


<나는 자연인이다>의 일부 출연자들은 돈과 권력이 있는 이들만 인정받는 사회에서 상처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회에서 사업 실패는 자신의 존재가치까지 위협받는 일이었다. 더 이상 가족이나 지인들 앞에 나설 수 없었던 그들은 결국 속세를 등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연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자애롭기에 자연의 넓은 품 안에서 위로받고, 다시 살아나갈 힘을 얻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이날은 팀장님의 생신이었지만, 내용은 이와 (결단코) 무관하다. 차에서는 마틴 셀리그만의 <긍정심리학>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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