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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차이즈 유니폼이 주지 않는 것

내가 사랑하는 상점 03-<조용한 흥분색>

by 김준정

"<조용한 흥분색> 가볼래?"


연이 언니와는 가끔 만나서 소자본 독립영화나 전시회를 보고는 한다. 취향이 맞는 사람과 노는 건 재미있다. 아니 자신의 취향을 소중하게 가꾸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면 마음에 바람이 부는 것 같다. 언니와 최근에 알게 된 독립서점을 가보기로 했다.


책은 어디에 있는 거지? 언니가 차를 주문하는 동안 나는 책이 진열되어 있는 곳을 찾았다. 생각보다 규모가 컸고 대부분의 공간은 카페로 운영되고 있었다. 안쪽에 밀실 같은 조그만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이 서점인 것 같았다. 한 발을 들여놓는데 주인장으로 보이는 분이 말했다.

"책 보시려면 손 소독하셔야 돼요."

"아, 네..."

두리번거리다가 카운터에 있는 손소독제를 사용했다. 서점 안에 들어가니 입구에 손소독제가 있었다. "손소독제는 서점 내에 구비되어 있습니다"라는 말도 덧붙여주면 안 되나? 주인장은 영수증으로 보이는 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책에 관심 없는 사람이 구경삼아 책을 만지작거리는 게 싫은지도 몰랐다. 무슨 이유가 있겠지. 윤이 갖고 있던 아거 작가의 <어떤, 문장>이 보였다. 이 책을 출판한 공가희 작가 겸 출판사 대표 얘기를 윤한테서 들었다. 퇴사 후 유럽여행을 갔고 그 이야기로 글을 쓰고 출판사를 차려서 책을 냈다는 분. 재미와 용기가 있는 사람 같았다. 공가희 작가의 <어떤, 여행>, <어떤, 시집>을 샀다.


"무슨 책이야? "

언니가 물었고 나는 윤한테 들었던 얘기를 해줬다.

"집에 책 엄청 많지? "

좋아하니까. 좋아하니까 갖고 싶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도 궁금하다. 그들이 책을 아끼는 마음을 어떻게 풀어내고 있는지 알고 싶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응원해주고 싶고 그런 응원을 나도 받고 싶다.


언니는 수업이 있어서 먼저 일어났고 나는 조금 더 있으면서 책을 읽기로 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책을 읽어볼까? 음식 시식을 앞둔 사람처럼 군침이 돌았다. 차를 한 잔 더 시켜서 홀짝거리면서 읽어야지. 내가 일어나자 뭔가에 몰두해 있던 주인도 따라 일어섰다.


"커피 말고 어떤 게 많이 나가나요?"

가게마다 주력상품이 있을 테고 주인장이 추천하는 메뉴를 물어본 거였다.

"우유가 들어간 걸 드셨으니 바틀을 드셔 보셔도 좋겠네요."

바틀? 병? 금방 라테를 마셨으니 병에 들어간 주스나 탄산수를 마시라는 건가? 이해가 안 되는 표정으로 메뉴판을 올려다봤지만 주인장은 설명해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요거트 스무디 주세요."

다시 우유가 든 걸 주문하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주인장은 오늘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친절을 요구할 권리가 내게 있는 건가? 나를 부당하게 대한 것도 아닌데? 불쾌한 마음을 가지는 내가 부당한 거라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책을 펼쳤다.


주인은 요구르트 스무디를 갖다 주며 한약 봉지를 건넸다.

"커피 에스프레소예요. 물이나 우유에 타서 드세요. "

혹시 이건 서비스? 그럼 저한테 화나신 거 아니죠? 아니 이제 화 풀리신 거죠? 왜 그런지 모르지만 화해를 한 기분이었고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생각해보면 나는 스타벅스의 친절에 피로를 느끼는 사람이었다. 한 번의 결제로 끝나지 않는 포인트 적립, 현금영수증으로 이어지는 질문을 하는 직원이 수고스러워 보였다. 이 분은 오늘 몇 명의 사람에게 같은 말을 되풀이했을까? 매뉴얼대로 움직여야 하는 직원뿐 아니라 나까지 거대기업에게 조정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 나도 모르게 과잉친절에 길들여졌는지도 모른다.


<어떤, 여행> 책은 좋았다. 여행을 떠난 이의 흥분과 느긋함이 전해졌다. 여행지를 설명하느라 힘을 들이지 않았고 글을 읽는 사람을 의식하지도 않았다. 책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애쓴 흔적이 없어서 편안했다. 여행서라면 이래야지. 언제부턴가 여행을 가면 뭔가를 발견하고 잃어버린 자아라도 찾아와야 할 것 같은 강박을 가지지 않았나 싶다. 책 한 권에도 뚜렷한 주제가 있어야 하고 얻는 게 있어야 한다는 것도.


글을 쓰면서도 그랬다. 주제와 메시지를 고민하는. 최근에 그동안 쓴 글을 모아서 퇴고를 하면서 이 생각에 더욱 사로잡혔다. 주제의식이 분명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는 집착으로 스스로를 다그치고 있었다. 주제가 명확한 책을 쓴 작가를 보면 대단해 보였다. 책을 읽으면서도 작가가 숨겨 논 상징이나 메시지를 찾고 성공하면 나는 괜찮은 독서가라고 뿌듯해했다.


그러느라 피로했는지 모르겠다. <어떤, 여행>은 그 피로를 풀어주는 여행 같은 책이었다.


피로한 이유는 상대를 조정하려는 의도 때문이 아닐까? 스타벅스의 친절은 호의가 아닌 상업적 이익을 위한 매뉴얼일 뿐이다. 치밀한 계산을 통해서 이렇게 하면 고객이 좋아할 것이다 하는. 마음이 아니라 지갑이 열리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


의도가 느껴지지 않는 책이 주는 편안함. 그건 개성 있는 사람을 만나 대화하는 기쁨과 비슷했다. 우연히 들른 식당에서 기대 이상의 음식을 만나게 될 때 느끼는 기쁨처럼. 그런 건 프랜차이즈 유니폼이 주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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