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둘 중에 준정 씨를 선택했어. oo는 우리 없어도 잘 지낼 거고 우리는 준정이 씨 챙기기로 했으니까 그런 줄 알아."
남편 친구들 중 내가 유일하게 오빠라고 부른 G의 전화였다. G는 크리스마스 모임 장소를 알려 주면서 꼭 오라고 했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S와 M부부는 나를 보기 위해 군산을 몇 번 찾아왔다. 지나는 길에 들렀다고 했지만 내가 걱정이 되어서 온 게 분명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냥 내가 하는 말만 조용히 들었다. 그때 나는 산에 간 얘기만 두서없이 떠들어댔다. 마지막으로 일어설 때 M언니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나를 불안하게 바라보면서도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고 참는 게 느껴졌다.
고마웠지만 그때는 그들을 보는 일 자체가 나한테는 못 견디게 힘든 일이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자꾸만 떠올랐고 나의 상처를 온통 헤집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그들의 마음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이었다. 남편이 나보다 8살이 많았으니 남편 친구와 아내들도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이 모임에 가장 늦게 합류한 나를 그들은 막내 동생쯤으로 여겼고 지금 와 생각하면 예민하고 참을성이 없는 나를 많이도 참아줬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의 삶이 그렇듯 그들도 나름의 어려움을 감당하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밤새 술을 마시며 우스갯소리도 많이 했지만 당시 나의 고민을 가장 많이 털어놓은 사람이 그들이었다. 주로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어려움, 억울함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곪아가고 있던 남편과의 갈등은 자존심 때문에 차마 이야기할 수 없었다.
결국 남편과 헤어지는 길을 택한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벌써부터 알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보다 10년, 20년 먼저 남편을 알아온 사람들이었고 내가 지나온 고비를 다른 방식으로 통과해온 사람들이었으니까. 내가 어떻게 말했어도 내 마음 다치지 않게 도움이 되는 얘기를 해주었을 텐데. 어쩌면 내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찾아오는 문제를 해결하며 살지는 못하지만 가끔은 그저 견디는 것만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 었으니까. 누군가 힘든 사람이 있으면 그냥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거라는 걸 아는 사람들이었으니까.
M언니 아버지의 부고 문자를 받았을 때, 나는 덕유산에 있었고 딸은 남편과 있었다. 나는 곧바로 전주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향했고 남편도 그곳으로 왔다. 4개월 만에 보는 남편이었다. 우리 사정을 모르는 G가 자기 집으로 이끌었고 자연스럽게 술자리로 이어졌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지만 나는 그저 복잡한 심정으로 자리를 지키고만 있었다.
밤이 되어서 대리운전 호출을 했다. 남편은 형식적으로 인사만 하고 갔는데 G가 기사님에게 대리비를 주면서 잘 부탁한다고 했다. 그리고 나를 보고 조심해서 가라고 하는데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우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오빠, 고마워요”하고 웃었지만 군산으로 가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벌써부터 G는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도 모르는 척 자리를 마련해준 거였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울컥했고 남편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내가 한없이 초라해서 눈물이 났다. 그의 눈에 내가 얼마나 가여워 보였을까 생각하니 설움에 북받쳤고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때 다 그만두자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기대하는 일도, 실망하는 일도 모두. 나를 연민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달리는 차처럼 뒤돌아보지 말자고 결심했다.
4년이 지난 지금, 딸이 캠핑을 다녀와서 G삼촌, M이모 얘기를 했다. 그들이 몹시도 궁금했고 보고 싶었다. 아니 눈물이 차오르면서 가슴이 뻐근해졌다. 사실 그때 많이 고마웠고 힘이 되었다고 그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 말을 하지 못해서 내내 미안했다고, 언젠가는 꼭 말하고 싶은데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겠다고. 다시 보는 그때에는 불안하지 않는 모습으로 앞에 서고 싶다고 그렇게 전하고 싶다.
언니, 오빠들 덕분에 지난 시간이 그렇게 아프게 기억되지만은 않는다고, 좋은 것도 있었구나, 이렇게 따듯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전할 방법을 모르겠다. 그것 때문에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