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트랙에서 달리기를 강요받을 때
고등학교에 등교한 첫날, 나는 실내화를 갈아 신다가 트레이닝복을 입은 괴한에게 따귀를 맞았다.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챌 때처럼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그는 전방 몇 미터 전부터 달려오고 있어서 가속도가 실린 타격의 크기는 실로 엄청났다. 내 몸은 잠시 붕 뜨는가 싶더니 이내 부서진 듯 바닥에 축 늘어졌다. 입은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교복에 흙먼지가 묻었다.
트레이닝복의 괴한은 체육선생님이었고 처음 만난 선생님을 그런 방식으로 인사를 하게 될지 몰랐던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따귀를 맞은 이유는 내가 한 계단 위에서 실내화를 갈아 신고 있어서였다. 나 말고도 많은 학생이 나와 같은 곳에서 실내화를 갈아 신고 있었는데 체육선생님은 계단 아래로 내려가라는 말을 하는 대신 나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었다.
"너 몇 반이야?"
체육 선생님이 물었다.
"1학년 2반이요."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뭐? 2반?"
선생님은 내 얼굴을 잠시 쳐다보더니 고개를 까딱하며 가라고 했다.
2반은 성적우수자로 구성된 특반이었다. 체육선생님의 얼굴에서 내가 2 반인 줄 알았더라면 때리지 않았을 거라는 거다, 복장 검사 같은 꼬투리를 잡아서 탈탈 털려고 했는데 김이 새 버렸다 같은 걸 읽을 수 있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무력한 표정으로 선생님의 화를 돋우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1층 로비에는 칠판이 있었다. 내 키보다 컸던 칠판에는 아이들의 성적이 적혀 있었다. 1등부터 100등까지만. 시험은 보름에 한 번씩 쳤고 각 과목의 성적, 평균까지 쓰느라 2시간은 족히 걸리던 그 일을 학교에서는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그걸 담당한 국어 선생님이 칠판에 학생들의 성적을 쓰고 있으면 아이들은 몰려가서 구경했다.
칠판에 적힌 성적은 우리의 반 등수이기도 했다. 담임선생님은 칠판에 이름이 없는 사람은 우리 반이 될 자격이 없다고 했다. 내가 원해서 특반이 된 것도 아닌데 이제는 자격이 없다니. 학교는 일방적으로 특반을 개설한 것도 모자라 우리들이 당연히 특반에 남고 싶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학교에 대한 응답으로 나는 시원하게 전교 400등의 신기록을 경신했고 부상으로는 우울증을 얻었다. 담임선생님은 내가 우리 반에서 존재할 이유가 가장 없는 인간이라며 하루 종일 복도에 꿇어앉아 있게 했다. 칠판에 이름이 있는 사람만 존재할 가치가 있었고 공부를 못하면 선생님한테 맞아도 되고 벌을 받아도 되는 거였다.
일요일이면 수학 문제집이 네 권이 든 가방을 메고 집을 나왔다. 도서관을 가야 하는데 공원 벤치에 멍하게 앉아있었다. 그러다 해가 저물어 오면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었다. 내일이 온다는 게 학교를 간다는 게 그렇게 절망스러울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그때 나에게는 친구도 없고 선생님도 없고 부모님도 없었다. 그리고 나도 없었다.
내가 졸업한 중학교는 대구에서 최저학력에 빛나는 곳이었다. 눈이 오는 날은 하루 종일 운동장에서 눈싸움을 했고 백일장을 하는 날은 공원에서 야외수업을 했다(심지어 그 학교는 실내화는 신지도 않았다!). 초등학교 때나 신는 실내화 때문에 따귀를 맞고 나니 중학교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몹시도 그리웠고 나는 멀리 이국땅에 온 이민자 심정이 되고 말았다. (실내화를 문화충격의 예로 삼을 수 있겠다)
바로 몇 달 전까지 과학 고등학교 진학을 권유받고 자신감에 넘치던 내가 맞는지 나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전까지는 괜찮은 성적을 나와 동일시하고 거기에 기대 왔다. 그러다 나보다 잘하는 다수의 학생들이 나타나자 나는 전의를 상실하는 것은 물론 나 자신의 존재가치까지 잃어버리고 말았다. 담임선생님의 말을 진짜 믿어버렸는지 모른다.
한 가지로 경쟁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오늘 이겼다고 내일도 이길 거라 장담할 수 없다. 우리는 매번 이길 수 없다. 그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만 필요할지도 모른다. 어떤 평가가 나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생각하면 내면은 한없이 나약해지고 만다. 일어서야 하는데 도무지 일어설 수가 없다. 그때 나는 그랬다.
같은 트랙을 달리기를 강요받을 때 우리는 최선을 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은 어디쯤 가고 있는지 흘끔거리느라 정작 내가 어디를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저마다의 다른 트랙을 가지고 있고 그 길 위에서라면 비로소 전력 질주를 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닐까? 아니 그저 멈추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