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있어도 외롭고 나를 보고 있어도 내가 아닌 다른 어딘가를 향해 있는 것 같은 기분. 변심한 애인? 아니다. 사춘기 딸 얘기다. 단답형의 대화, 바쁘다는 핑계. 변심한 애인과 사춘기 아이는 유사점이 많다.
아침에 나림이 밥을 차려주고 설거지를 했다. 음식물쓰레기가 넘치고 있었고 재활용 쓰레기도 폭발 직전이었다. 설거지만 하고 커피를 마시려고 물을 끓이고 있었는데 음식물쓰레기를 옮기다가 바닥에 (국물을) 흘렸다. 이런... 닦아야겠네. 그런데 머리카락이 왜 이리 많이 떨어져 있는 거야? 청소기도 돌려야겠네. 아, 끝도 없는 이놈의 집안일.
"나림아, 재활용 쓰레기 버리고 와."
학교 갈 준비를 하는 애한테 시키는 게 미안했지만 혼자 하다가 짜증을 내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물걸레 밀대로 바닥을 닦는데 아이고 힘들어라, 허리 나가겠네, 뭐 이리 힘든 거야, 하는 소리가 플레이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나왔다. 중얼거리면서 방과 거실을 오가고 있는데 나림이가 옆에 쓱 다가오더니 말했다.
"내가 할게. 시간 좀 남았어."
엥? 웬일이지? 괜찮다고 하는 엄마도 있겠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그런 엄마가 있었으면 하는 쪽이다.
"그러면 청소기 좀 돌려줄래?"
'경량 패딩 사건'으로 우리는 냉전 중이었다. 사건 개요는 이랬다. 한 달 전, 할아버지가 나림이한테 용돈을 30만 원을 보냈다. 나는 그걸 나림이한테 줬다. 한 달 뒤인 어제 나림이가 롱 패딩은 더우니까 다른 옷(경량 패딩)을 사달라고 했다. 나는 할아버지가 준 용돈을 생각해냈고 동시에 나림이한테 돈을 받기로 하고 나이키 바지(9만 원)를 사줬던 일도 생각났다. 순간 그 돈이 아직 내 손에 오지 않다는 사실이 내 머리를 강타했다.
"아참, 그때 나한테 9만 원 안 줬지 않았냐?"
순간 나림이의 동공이 흔들렸다.
"나 그럼 패딩 못 사."
나림이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이 말을 남기고 떠났다. 내 손에는 9만 원이 쥐어져 있었다. 뭐지? 내가 추리한 바는 이랬다. 남아있는 용돈에 맞는 패딩을 찜해놓았다. 룰루랄라 엄마한테 돈을 주며 사달라고 할 참으로 말을 꺼냈다. 난데없이 엄마가 9만 원을 기억해 내버렸다. 평소에 머리도 나쁜 엄마가 말이다. 졸지에 패딩이 날아가 버렸다.
나 같으면 그냥 사달라고 우길 텐데, 아니면 엄마가 치사하게 뭐 그런 것까지 받냐고 그냥 사주면 안 되냐고 할 텐데. 그 녀석 누구 딸인지 몰라도 양심이 참 곱구나, 하는 마음에 그냥 사줄 수도 있지만 참기로 했다. 큰 사람으로 키우는 게 보통의 인내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나림이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기 방에만 콕 박혀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마늘빵을 구워놓았는데 녀석은 손도 대지 않았다. (딱딱한 마늘빵이 네 얼굴과 똑같아. 먹어봐. 네 생각하면서 만들었다고)
"배 안 고파?"
"빼빼로 먹으면 돼."
"아하! 오늘 빼빼로 데이구나."
"..."
"뭐 꼭 달라고 한 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하하."
조금 후 나림이가 빼빼로 세 개를 가지고 왔다. 딸기맛, 크런치, 쿠앤크
"아몬드 없냐? “
"그거는 하나밖에 없어. “
"나는 그게 좋은데. 달라고 하는 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하하."
나림이는 아몬드 빼빼로를 주고 다시 자기 방에 콕 박혔다. 그 뒤에는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는 옷 때문에 삐진 건지 빼빼로 때문에 삐진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호르몬 변화로 일어나는 일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