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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출판은 하고 싶지 않았다

by 김준정

하루치 글이 사라졌다. 어제 수업을 마친 시간은 밤 10시, 잠깐 쉬었다가 글을 조금 고치고 자려고 노트북 끄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노트북을 실행시켰더니 “뭘 불러올까요?”라고 하길래 창을 닫아버렸다. 화면 하단에 문서가 없길래 파일에 있겠지 하고 열어보니 정확히 하루 전, 그러니까 어제 아침 파일을 열어본 그 상태로 되돌아가 있는 게 아닌가. 순간 땀이 났다.


청소도 못하고 보미 산책도 시켜주지 못하고 고친 글이 모두 사라지다니. 1분마다 자동 저장이 되는 걸로 설정했기 때문에 당연히 저장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1시간 30분 동안의 검색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은,


“이전에 한글 문서를 편집하던 중 비정상적으로 끝낸 적이 있습니다. 자동 저장된 파일을 불러오려면 ‘불러옴’을 선택하세요.”

에서 x를 누르면 불러오지 않겠다는 뜻이고 그 순간 파일은 지워진다는 거였다. 이토록 소중한 지식을 나는 2021년에서야 알게 되었을까.


독립출판을 하는 <엄마의 원피스>를 이번 주까지 인쇄소에 넘겨야 했다. 퇴고를 하다 보면 새로운 글을 써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생겼다. 초고만 쓰자며 새 폴더를 열어서 글을 쓰다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고치던 글로 돌아가고, 그러다 블로그에 글을 올린 지가 오래되었다며 수학 공부법을 쓰고, 그렇게 네 개의 폴더를 열어놓고 썼다.


최근에 수업이 늘어나서 어제는 2시부터 10시까지 수업이었다. 두 달 전까지 하루에 한 타임 하는 날도 있었기 때문에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심정으로 재수생과 고 3 학생 수업을 새로 맡았다. 새벽 6시부터 자판을 두들기다가 밥 하고 치우고, 다른 건 못해도 책상과 화장실은 청소해야지, 서두르다가 이렇게 돼버렸다.


생각해보면 하나라도 제대로 쓴 게 없어서 딱히 아깝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 종일 동동거린 게 어이없을 뿐이었다. 오늘은 저절로 마음이 비워지는 게 밥이나 먹자 싶어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천천히 먹었다.


그래도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멈출 수가 없었다. 힘 빠지는데 오늘은 아무것도 쓰지 말자 했다가 그러면 내일은 더 힘들 거야 하는 두 가지 마음이 교차했다. 이건 뭐 애인이 바람피운 걸 알고도 사랑하니까 헤어지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좋아하니까 그냥 하자. 샌드위치를 다 먹었을 쯤에는 오늘 할 수 있을 만큼 조금만 고치자고 마음을 추슬렀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런 것이 필요해. 말로는 설명이 안 되지만, 의미를 가진 그런 풍경. 우리는 그 뭔가에 제대로 설명을 달기 위해 살아가는 그런 면이 있어. 난 그렇게 생각해.”


소설 <1q84>에 나오는 말이다. 나무토막으로 쥐를 기가 막히게 조각하는 한 아이가 있었다. 고아원에 사는 그 아이는 아무리 고달프고 힘들어도 조각칼만 들고 있으면 행복해 보였다고 했다.


글을 쓰는 게 힘들지만 그만둘 수 없는 건, 나한테 맞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찾은 일을 열심히 하고 싶은데 그럴수록 잘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힘들고 지쳤다. 이건 마치 사랑에 빠지면 상대를 소유하고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마음과 비슷했다.


상대를 구속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처럼 글 쓰는 일도 그런 마음으로 할 수는 없을까. 상대를 가지려 하면 할수록 멀어지는 것처럼, 아직 갈 길이 먼데 이렇게 조바심을 내면 얼마 못가 포기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독립출판은 하고 싶지 않았다. 편집자의 손을 거치지 않은 미숙한 내 글은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 것 같았고 나조차도 부끄러워서 못 볼 것 같았다. 작년부터 출판사에 투고하기 시작했지만 계약을 하자고 연락이 온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아직은 부족한 글이고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걸 나도 아는데 알면서도 자꾸 욕심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나에게 보연 언니가 읽어보라며 책 <그림 그리는 할머니 김두엽입니다>을 건넸다. 올해 94세인 김두엽 할머니는 83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70세에 한글을 배웠고 80세까지 일을 해야 했던 할머니는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지금은 조용히 그림을 그리면서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할머니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6년이 지났을 때 전시회를 열게 되는 기쁨을 맛봤지만 그림은 한 점도 팔리지 않았고, 이후 6번의 전시회를 여는 동안에도 그림이 팔린 적은 없었다고 했다. 김두엽 할머니의 아들은 이현영 화가로 그는 택배 일을 하면서도 그림을 그리고 어머니와 전시회를 열었다.


욕심을 버리고 상대를 존중하는 사랑은 해본 적 없는 나지만 이번만큼은 내 마음을 이겨보고 싶었다. 좋은 걸해도 힘들다는 걸 알았으니까 쉬워질 거라는 기대를 버리고.


윤희가 <엄마의 원피스>를 읽고 이상한 부분 말해주겠다고 해서 사양하지 않고, 214페이지의 원고를 프린트해서 줬다. 윤희는 페이지 번호도 없는 원고에 번호를 달아가며 곳곳에 소감을 남겨주었다. 무슨 편지 같기도 한 메모를 읽는데 불쑥 눈물이 났다. 그냥 계속해야겠다고, 혼자가 아니니까 그냥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일도 해왔는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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