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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Oct 24. 2021

지리산 마지막 주막 ‘대성 주막’

2020. 09. 20

지리산의 마지막 하나 남은 주막이 있다. 이름은‘대성 주막’, 의신에서 세석대피소로 가는 길에 있다. 지리산 산행기를 읽어보다가 알게 되었는데 낮은 지붕에 아담하게 지은 산막이 대성계곡 사이에 있는 모습이 정겹게 보였다. 그곳에서 민박을 했다는 산행후기도 있어서 어떤 곳인지 궁금했는데 이번에 갈 기회가 생겼다.


“준정 씨 진짜 자신 있어?”


지리산 무박 종주를 하자는 나에게 희남이 삼촌이 한 말이다. 성백종주는 지리산 성삼재부터 백무동까지 35 킬로터의 지리산 종주다. 삼촌은 2주 전 덕유산 육구 종주할 때의 내 실력으로는 무리라고 판단했다.


“30킬로미터 넘는 산행은 20킬로미터가 넘어가는 순간부터 고행의 길입니다. 누차 말하지만 훈련이 필요하고 먼저 20킬로미터대의 산행으로 내 몸의 한계를 점차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삼촌은 지리산 대성계곡 환종주를 제안했다. 의신-벽소령-세석-의신(25킬로미터) 코스로 그 길에 대성 주막이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대성 주막이 있어, 거기서 목을 축이고 가자고.”


곰이나 고라니 같은 산짐승은 물을 마신다는 것보다는 목을 축인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힘든 산행을 하다가 마시는 막걸리도 그렇다. 잠시 목을 축이고 바랑을 메고 길을 걷는 떠돌이처럼 그래야 할 것 같다. 


사극 드라마를 볼 때 진수성찬을 차린 부잣집 밥상보다 국밥 한 그릇과 술병이 올려진 소반이 더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비단옷을 입은 양반이 체면을 차리며 먹는 모습보다 국밥에 숟가락을 푹 꽂아서 바쁘게 입으로 퍼 나르며 먹는 양민이 먹는 장면을 보면 내 입에서도 침이 고였다.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을 가는 가난한 주인공이 “주모, 국밥 한 그릇 주슈.”했던 그런 조상의 피가 나에게 흐르고 있어서일까?


오래 걷다가 잠시 쉬면서 먹는 음식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좋은 자리를 발견하면 배낭(바랑)을 내려놓고 엉덩이를 붙인다. 9월의 선선한 바람과 따뜻한 볕을 쪼이며 막걸리를 마시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세석 대피소를 처음 갔을 때는 3년 전 1월이었다. 주변의 높은 산들이 바람을 막아주어 아늑하고 따뜻한 곳이었다. 나무가 거의 없어서 척박하고 이국적인 분위기의 세석평전에서 나는 여기가 우리나라가 맞나, 어리둥절했다. 한겨울에도 따뜻한 볕을 넘치도록 쪼일 수 있는 세석 대피소에서는 등산객들은 여유로운 모습이 되고 만다.


연하천 대피소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세석 대피소까지 9.9킬로미터를 걷고 나니 배속 깊은 곳에서 허기가 올라왔다. 일행이 라면을 끓이는 동안 매점에서 초코파이를 사서 두 개를 겹쳐서 먹었던 일도 떠올랐다. 그런 배고픔을 느끼는 것도 오랜만이었고 그럴 때 먹는 음식의 맛도 놀라웠다. 아, 재미있다.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고 생기가 돌았다. 걸을수록 자유롭다고 느껴졌다.


자유롭다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보다 힘든 순간을 극복하는 경험을 하나하나 쌓아 올린 다음에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 감당하는 힘이 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


떠돌이, 걷기, 자유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단어 같다. 힘든 고비를 내 몸의 감각으로 새겨두고 싶다. 이 모든 순간을 헤쳐 나온 나는 힘 내 앞에 놓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힘을 얻고 싶다. 그건 나를 단련하는 일일 것이다. 나는 믿는다, 목을 축이면서 간다면 끝까지 갈 수 있을 거라고. 그 길의 끝에서 하늘을 훨훨 나는 장면을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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