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잘하고 싶다”
“진작 수학 좀 해둘걸”
신호를 기다리다가 본 학원 현수막에 적힌 글인데 학원인 시절 나도 광고 문구를 고심한 기억 때문에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는 명문대 진학한 학생이나 성적 우수자를 내세운 학원 광고가 많았다면 요즘은 ‘학습 의욕 고취’ 목적이 많은 것 같다. 과부 사정 홀아비가 안다고 점점 수학을 어려워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원인들의 답답함이 전해지기도 했다.
나 때는(라떼는) 막연한 생존에 대한 두려움으로 공부를 했지만 지금 친구들한테 그런 걸 바라기는 어렵다. 직업을 가져야 한다거나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는 게 그들에게는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한테 검정고시를 보거나 대학을 가지 않고 갈 수 있는 여러 가지 길을 알려주고 선택하게 했으면 좋겠다. 아이들도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주변에 다양한 길을 가는 어른들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면 더욱 좋겠다.
사정이 있어서 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학생이 있다. 가끔은 스스로 낙오되었다는 생각이 드는지 무기력해 보이는 아이에게 나는 말했다.
“무조건 수능 보고 대학 가는 게 아니라 2년쯤 아르바이트하고 여행을 다녀와서 하고 싶은 공부가 생기면 대학 가면 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배울 수 있는 게 많으니까.”
자기는 검정고시 준비도 벅찬데 수능 준비를 해서 다른 아이들과 경쟁한다고 생각하니 지금 하는 노력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괜찮은 대학을 갈 수 있을까, 남들처럼 취업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날지 모른다.
그런 걱정은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도 다르지 않다. 괜찮다 싶은 직업에 대해 알아보면 소도시에서는 전교 1, 2등을 해야 갈 수 있는 명문대를 졸업하고도 살벌한 취업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나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 한 사촌도 취업준비생, 공시생인데 나는 말해 뭐할까. 그런데도 부모님은 무조건 공부를 하라고 하는 게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한 고등학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라고 했단다. 공무원이 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는 세상, 소고기 등급도 아니고 과목별로 등급을 받는 치열한 학교를 떠나면 더한 경쟁이 기다리고 사실이 아이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이 얘기를 해준 고등학교 2학년 지연이는 밥을 먹다가 친구들과 울었다고 했다.
가을 해가 가득 찬 급식실에서 재잘거리는 말과 웃음이 끊이지 않아야 할 아이들이 한 명이 울기 시작하자 다른 아이들도 따라 울었다고 했다. 서로 왜 우냐고 물어보면 모르겠다고 대답하며 이유도 모른 채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시험 준비에 급급한 시간 속에서 우울함이 아이들의 기본 정서로 자리 잡았는지 모르겠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97학번인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는 정보가 없어서 구체적인 미래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는 대학 졸업장으로 취업이 되던 시절이라 “대학만 가라”는 말이 통하던 시절이었다(IMF 이후 상황은 달라졌지만).
교대 원서를 내라는 아빠에게 나는 평생을 학교에서 썩을 수 없다며 ‘비행기 타고 외국에 출장 가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아빠는 드라마가 애들 다 망친다며 한탄했고, 텔레비전에서 본 이미지로 승무원을 꿈꾸거나 약사인 사촌 언니를 보고 약사가 되면 좋겠다, 그런 식으로 진로를 정했다.
빈약한 정보 속에서 앞으로 갈 길을 정하는 것도,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나한테 필요한 정보와 검증된 정보를 가려내는 것도 힘든 건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아는 게 없어서 힘들고 지금은 너무 많아서 혼란스러우니 뭐가 나은지 모르겠다.
가수 이적이 집사부일체에서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지속 가능한 일을 해라. 남이 가진 재능을 부러워하기보다 내 안에 작은 재능을 발견하고 물을 주고 키워보자. 자기에게 맞지 않는 일을 하면 지속할 수 없고 번아웃이 찾아온다. 자기의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면 크게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계속할 수 있다. ”
이 이야기는 그의 어머니 박혜란 작가가 한 말과 연결되었다.
“성공해서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하면 성공한 것이다.”
그녀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해야 행복하니 부모는 자식이 원하는 걸 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가정과 학교에서 어떤 성공 모델을 아이에게 강요하기보다 각자 가지고 있는 재능을 발견하고 존중해주는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를 예비 입시생으로 보지 않고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하게 하고 아이가 스스로를 알아갈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했다.
부모는 가장 가까이에서 아이가 자신을 발견하는 걸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다. 부모가 정한 틀에 아이를 맞추기보다 아이가 자기 안의 특별함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함께 이야기하고 생각을 나누어야 할 사람이다. 아이가 유일하고 고유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부모는 단단한 대지가 되어주어야 한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