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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Nov 24. 2021

딸에게 집안일을 어느 정도 시킬 것인가

“바닥에 머리카락 떨어진 거 수습하고 가.”

"그러려고 했어."


허리까지 내려오는 까만 생머리를 가진 초밥이는 불만 가득한 대답을 하고는 오늘도 어김없이 머리카락을 치우지 않고 떠났다. 매일 아침 초밥이가 머리를 빗고 떨어진 머리카락과 노화로 이탈하는 내 머리카락이 낙엽도 아닌데 바닥에 흩날리는 걸 보며 커피를 마시는 기분은 전혀 상쾌하지 않다.


딸에게 집안일을 어느 정도 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엄마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70년대생인 나는 시대에 정직하게도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을 대신해서 집안일을 했다. 이런 건 예외가 되어도 좋으련만 그런 행운은 나에게 주어지지 않아서 연탄 갈 시간이면 놀다가도 집에 들어와 연탄을 갈았고 엄마의 퇴근이 늦어지면 저녁을 준비했다. 나보다 한 살이 많은 오빠는 이 모든 일에서 열외였고 오빠의 밥을 챙기는 것과 방학에는 공장에 일하는 아빠와 삼촌의 점심을 챙기는 일도 내 몫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 되자 내가 처한 불공평한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어느 날 퇴근해서 돌아온 엄마에게 나는 설거지와 청소, 교복과 운동화를 빨았노라고 했지만 엄마에게 들은 대답은 내가 기대한 것과 달랐다.


“오빠 거는? 오빠 것도 빨았어?” 


이후 상황은 독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강도 높은 노동에 지쳐있던 엄마와, 강도 높은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던 나는 철저히 자기 입장에 입각한 내용을 원초적인 표현으로 다다다다 따발총처럼 발사하고 쾅하는 문소리와 함께 상황은 종결되었다.


전에 없는 반항을 하는 나에게 엄마는 짜증을 냈고, 나는 엄마에게 납득이 될만한 이유와 설명을 요구했다. 엄마는 설명을 해줄 능력과 여유가 없었고, 나는 엄마가 내 노력을 알아주지 않았다는 원망만 했을 뿐 엄마가 나보다 더한 불공평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건 알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은 나를 그때의 엄마의 입장으로 데려다 놓고 복기하는 기회를 주었다.


이런 기억을 가진 나로서는 딸과 어느 정도의 가사분담을 해야 할지 여간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 나는 초밥이가 싱크대에 가득 쌓인 설거지거리를 보거나 집이 지저분한 것을 볼 때 책임감을 느끼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보다 ‘자기에게 중요한 일에 집중하기’를 바라고 집은 그걸 하기에 편안한 곳이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내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사의 많은 문제는 사람 마음이 한결같지 않다는 데 있는 법. 화장실에 휴지가 없으면 마지막으로 쓰고 새 휴지를 걸지 않은 동거인에게 화 한 스푼, 밥을 먹고 그냥 일어서는 모습에 화 두 스푼, 몸만 빠져나간 옷이 바닥에 (그것도 내 방에) 방치된 걸 보고 화 세 스푼, 이렇게 모은 화들은 어느새 수북하게 쌓여서 ‘자기에게 중요한 일에 집중하기’만 하는 동거인을 원망하기에 이른다.


“집안일이라는 게 혼자만 하고 그걸 가족이 몰라주면 너무 힘든 일이야. 이런 감정이 먼지처럼 쌓이면 나도 모르게 다른 일로 너한테 화내게 된다고.”


내가 집안일을 다하니까 너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거나 학원을 빠져서는 안 되고 친구들과도 많이 놀아서는 안 된다. 내가 널 위해 희생하니까 너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식이다.


공부는 자기를 위해 하는 거고 학원은 이유가 있으면 빠질 수 있으며 친구들과 많이 놀고 싶으면 놀면 된다. 내가 집안일을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데도 사람 마음은 제멋대로 엉뚱한 것들을 연결시켜서 스스로를 모순덩어리로 만들어버리고는 한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몇 가지 규칙을 정했다. 초밥이는 밥을 먹고 난 후에는 식탁 정리를 돕고 일주일에 한 번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기로 했다. 안방 화장실은 초밥이의 청소 담담 구역, 빨래 널기와 개기는 공동작업이라는 데 합의했다.


“내가 빨래 두 개 너는 동안 너는 하나 널고 있네? 우리 개수를 똑같이 나눠서 널까?

“그러면 나 안 할래.”

“아냐 아냐, 그냥 하자.”


“엄마 색깔 있는 스티로폼은 분리수거 안 된다고 했잖아. 이건 종량제 봉투에 넣어.”

“듣고도 잊어버렸네. 미안. 그 마트는 어째서 재활용이 되지 않는 스티로폼을 사용하는 거지? 다음에 갈 때 말해줘야겠다.”

정육점 사장님에게 재활용이 되는 걸로 사용을 부탁드렸다

재활용 쓰레기 담당이 되기 전 초밥이는 음료수 캔도 종량제 봉투에 넣었지만 지금은 분리수거 달인이 되었다. 사용한 컵은 씻어서 제자리에 두기도 하고(매번은 아니지만) 빨래가 모이면 자기가 세탁기를 돌리기도 했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으로 이상하다. 이제 더 이상 초밥이가 거실 탁자에 다리를 올리고 휴대폰을 하는 모습이불편하지 않았다.


생활을 유지하는데 드는 노동을 분담하는 일은 책임감을 키우고 세상을 배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편하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아무렴.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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