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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Jul 12. 2022

네가 좋아했던 농담

이군과 나는 한 달만 사귀어보자는데 합의했다. 한 달 후 누구든 원하면 다시 친구로 돌아가자고, 기자회견은 생략하고 벌떼들에게 공식 발표는 그때 하자고 했다.     


이군은 같은 과로 우리(벌떼)에게는 객원 멤버 같은 존재였다. 전부터 이군에게 이상한 낌새가 있긴 했다. 일요일, 나의 손가락만 바라보고 있는 벌떼들의 기대를 등에 업고 나는 단 하나의 건수를 위해 분투하고 있을 때 이군에게 전화가 왔다.     


“왜?”
“영화 보러 가자.”

“전화 잘못 걸었어.”

전화를 끊자 다시 전화가 왔다.

“아니야, 너한테 한 거야.”

“나 지금 바빠.”

“끊지 마. 이상한 놈들 만나지 말고 가자.”

“네가 제일 이상한 놈이야.”

“너희 집 앞으로 갈게.”

“왜?”

이번에는 이군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다시 전화를 하려다가 어디서 바람을 맞고 엉뚱한데 와서 이러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하는 생각에 

에잇, 작업을 중지하고 벌떼들에게 통보했다.     


“나 이군이랑 영화 보러 간다.”

“이군하고 왜?”

“나도 몰라.”     


대충 옷을 챙겨 입고 나가자 희한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군이 머리에 맞지도 않는 베레모를 쓰고, 소문만 들었을 뿐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가 사줬다는 아반떼 문에 기대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다른 한 손으로 모자 끝을 잡은 채 한눈에도 불편한 자세로 있는 이군을 보자마자 나는 웃음이 터져버렸다. 웃느라 반쯤 굴러서 가는 나를 이군이 흘끔 보더니 김이 샌 얼굴이 되었다.     


“누구한테 바람맞고 여기 와서 개폼이냐?”

“그런 거 아니야.”     


나는 이군한테 접이 우산도 아니고 그동안 차를 잘도 숨기고 다녔네, 영화는 무슨 영화냐, 술이나 마시자 했고, 이군은 그럼 밥을 먹자며 동성로의 한 레스토랑에 나를 데리고 갔다. 벌떼들도 없이 단둘이 마주 보고 있으니까 이상했다. 얼마간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고 그럼 그렇지 이군이 요즘 공들이고 있는 승무원 지망생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깐족을 곁들인 상담을 해줬고, 저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날은 여자랑 약속이 깨져서 나를 불러낸 거라고만 생각했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소주 20병이 감독과 각본을 맡은 그날의 스토리는 이랬다. 봄이네, 비 오네, 외롭네 하며 학교 후문에 있는 싱글벙글 막창에 이군, 주, 나, 정군(영의 전 남친)이 모였다. 세상 쓸모없는 이야기를 하며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봄비는 밤새 내렸다. 가게 앞에 내놓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우리는 술과 비에 젖고 길거리의 소음과 사람들의 열기에 점점 취해갔다.   

  

맛이 좋아 싱글! 친절 청결해서 벙글!


주와는 피를 나누고, 나와는 스피릿을 나눈 주의 언니가 우정 출연해서 현실적 문제(십만 원이 넘는 술값)를 해결해준 덕분에 우리는 무리 없이 흐릿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앞의 전개를 무시하고 코미디에서 로맨스로 장르 변화를 시도한 인물이 있었다.       


내가 화장실을 갔다 나오는데 이군이 앞에 서있었다.


“우리 사귀자.”

“우리 사귀고 있잖아.”

“아니, 진짜로.”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셨어도 이군이 형제 같은 나한테 어떻게 고백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소주 20병은 이렇게도 개연성 없는 연출을 했고, 내 속에 수많은 나중에 하나가 나타나 한 달 계약 연애를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축제 기간, 이군이 후배들에게 산 쿠폰을 써야 한다며 우리 과 주막(일일 포장마차)에 가자고 했다. 수업에도 잘 안 들어가는 내가 과행사에 참여할 리가 없기에 우리 과 주막은 처음이었다. 학교 안에서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귀신을 본 것처럼 놀라고, 내가 매점에 가느라 도서관 로비를 통과해 갔던 날에는 “도서관에서 널 봤다는 제보가 들어왔는데 사실이야?”는 전화를 받는, 일관성 있는 학교 생활을 해왔다. 

  

주막에 들어서자 여자 후배들이 이군만 반기고 벌떼들에게는 ‘여기는 왜?’라는 물음 담긴 눈빛을 던졌다. 이군은 후배들이 만들어 준 상석에 앉고 우리는 테이블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군이 여자 후배들한테 인기가 많다는, 자기 입으로 말해서 믿지도 않았던 그 말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지금은 배 나오고 머리숱이 줄어든 중년이 되었을 이군은 당시에도 아저씨 같았기 때문에 어떻게 변했을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어쩌면 좀 더 젊어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잘 생겼다는 평도 있었음을 추후 법적 다툼의 소지가 있을지 모르니 밝혀두는 게 좋겠다.      


기껏해야 두세 살 많은 복학생 선배가 세상 이치라도 통달했을 것 같은 환상이 과거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 후배들에게도 있었는지, 그런 게 왜 궁금할까 싶은 걸 이군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협소한 자리 탓에 후배들과 이군의 대화는 나는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선배 좋아하는 사람 없어요?”

눈이 큰 후배가 물었고, 그걸 받아서 이군이 대답했다.

“있어. 지금 이 자리에.”

“진짜요? 누군데요?”

분위기가 이상하게 흐른다 싶어 내가 눈으로 가방을 찾고 있을 때, 이군이 마이크를 장착한 것처럼 큰소리로 말했다.

“97학번 김준정,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고, 나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밖으로 나갔다. 따라 나온 이군은 내 손목을 잡고 가지 말라고 했는데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것 같았다. 그때 분명히 알았다. 이건 삼강오륜에 위배되는 일이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키지만 이군은 나한테는 남동생 같기만 했다. 서로의 연애사의 민망한 부분까지 공유한 우리가 왜 이런 그림이어야 하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들하고 짜고 몰래카메라를 찍는 게 아닌가 주변을 두리번거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후 이군은 친구로 지낼 수 없으니 연락을 끊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고 몇 마디 농담과 술잔이 오가면 전처럼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 학기 그리고 일 년이 지났지만 이군은 나도 벌떼들도 학교에서 마주치면 못 본 척했다. 남자 같은 내 이름 덕분에 대출해줄 수 있어서 좋다던, 술 마시고 싶다고 하면 어디서든 돈을 구해오던, 나처럼 농담 잘하는 여자가 좋다고 했던 친구는 사라졌다. 일상에서 이군이 빠져나간 공백은 생각보다 컸고, 이군이 모진 놈이었다.    

 

나는 졸업했고 이군은 눈이 큰 후배와 사귀었다.




(생각나면 미안한 친구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기억해주고 싶은 마음에 대한 글이기도 하고요. 어쩌면 읽기에 불편할 수도 있는데요, 이게 그 친구가 좋아했던 농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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