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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Jun 05. 2022

나는 생존자

큰언니, 작은 언니와 나는 각자 작은 밥상을 펴고 뭔가 끄적이고 있었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창호지를 바른 문밖으로 눈이 내리던 오후에 내 정서의 향수가 있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그날의 기억은 나의 메마른 유년 시절 한 줄기 빛이었다.    


중국어학과를 다니던 작은 언니는 중국어를 쓰면서 이따금 성조로 소리 내 읽었다. 백화점에서 메이크업 시연을 받고 화사하게 웃던 사람, 남자를 소개받고 설레하던 사람, 인생에서 반짝이던 시절의 언니를 기억하고 있는 내게 언니의 죽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나와 사촌인 작은 언니의 50년생에서 반은 원가족, 반은 남편과 두 아들과의 삶이었다. 자기주장과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이 큰집 제사와 집안일을 도우며 공기처럼 존재했던 언니는 결혼 후에도 다르지 않았다. 가족 내 여성은 대체로 비슷한 모습이었기에 누구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사이 언니의 병은 깊어져 갔다.    


누군가는 언니의 죽음이 갱년기 우울증 때문이라고 했지만, 나는 언니가 가부장제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여성에게 의무만 요구하고 권리는 없는 문화의 희생자. 가족에 대한 언니의 배려는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공기처럼 소중한 존재였지만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라디오 소리가 흐르던 그날처럼 아늑한 봄날, 작은 언니가 잠든 납골당에 큰언니와 둘이 앉아있으니 3년이 흘렀지만 바로 어제 작은 언니가 떠난 것만 같았다. 왜 그렇게 양보만 했냐고, 결국 세상에 언니 자리가 없어져 버렸다고, 뒤늦게 나는 언니가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귀를 기울였다.     


개복동 화재 참사 희생자 가족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고, 몰라줘서 가슴이 무너지고, 마지막 순간에 얼마나 외로웠을지 잊히지 않아 떠올릴 때마다 20년이 아니라 어제 일어난 일 같을 것이다.   


죽은 사람은 힘이 세다. 그들은 못다 한 말을 죽음으로 알렸다. 여성들을 사망에 이르게 한 건 ‘감금’이었다. 건물 안과 밖이 자물쇠로 잠겨있었기 때문에 불이 나도 나갈 수 없었다. 밖으로 나올 수만 있었어도 인명피해는 없을 화재였다. 그곳은 살아서는 나갈 수 없는, 죽어야만 나갈 수 있는 곳이었다.     


피해자들이 혼자 목욕탕도 가지 못하고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삶을 살았던 건 업주와 상납금을 받고 이를 묵인한 관할 경찰관, 그리고 우리들의 무관심 때문이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외면한 대가로 소중한 생명이 희생되었다.     


성매매는 나와 연결된 문제다. 나는 생존자다. 나는 단지 운이 좋아서, 여러 자원이 있어서 성매매라는 철창에 갇히지 않았을 뿐이다.   


낯선 아줌마가 말했다.

“아줌마 집에 가서 살래? 가면 너만 한 아이들이 많아.”   


아줌마의 손을 잡고 막 걸음을 떼려고 할 때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득한 길 끝에서 아빠가 달려오더니 금세 나를 안았다. 뭐 하고 있었냐는 아빠의 물음에 돌아봤을 때 아줌마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 나는 7살이나 8살쯤이었다.    


부모님 계모임이 있던 날, 이층 양옥집이 많았던 그 동네로 갔다. 오빠는 오락실을 가기 위해 나갔고, 나는 그 집에 있던 언니들과 있는 게 어색해서 오빠를 따라갔다. 오빠가 오락하는 걸 구경하다가 지겨워 돌아가는 길이었다. 전에도 그 집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는지 어른 중 한 명이 나에게 그 집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하지만 골목을 벗어나 도롯가로 나오니 덜컥 겁이 났고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었지만 내가 외운 번호가 아니었다.


아빠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한참을 나를 안고 있었다. 나는 평소와 다른 아빠가 낯설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때 아빠는 나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간신히 벗어났던 것 같았다. 아빠는 나를 내려놓지 않은 채 해가 저물어 어두워지고 있는 길을 되돌아갔다.   


“우리 집에 너만 한 아이들이 많아”라는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섭게 다가왔다. 어떤 곳이길래 아이들이 많다는 건지, 왜 부모님이 어디 있냐고 묻지 않았는지, 어째서 경찰서가 아닌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는지. 그곳이 내가 상상하는 범죄의 현장인지 알 수 없지만, 아빠가 나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의 봄날 작가는 말한다. 가족이 해체되고 자원이 없는 여성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남자였다면 성매매 피해를 입지 않았을 거라고. 18살 아이를 업주가 돈 벌게 해 주겠다고 유인한 다음, 교묘한 수법으로 빚을 지게 하고 착취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누구라도 성매매 현장에 한번 걸려들면 빠져나올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못다 한 말을 듣는 일이다. 한 줌 햇볕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그들의 마음이 되어보는 일이다. 성매매업소 전단, 성매매를 유인하는 스팸메일을 112에 신고하는 일은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성 산업 착취 구조 해체를 위해 국가가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부분을 감시하고 문제제기를 하는 것, 작은 목소리를 모으는 일이 우리를 지키는 일이다.    


창문 가득 들어오는 햇살을 받고 바람에 일렁이는 머리카락의 감촉을 느끼는 일, 빨래를 널고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는 일, 소박한 반찬에 밥을 먹고 마루에 누워 낮잠 자는 일. 평범하지만 빛과 같은 시간을 빼앗긴 채 살아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흉터처럼 남았다. 잡초가 무성한 개복동 화재 현장처럼.      

 <군산시민예술촌>에서 잡초를 제거해 말끔해진 개복동화재현장
해가 저무는 개복동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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