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행복이 있는 섬 '돈없이도' 06
책 <행복의 기원>은 행복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에 유전적으로 외향성을 지닌 사람이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서 행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뭐야, 행복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거잖아, 단념할 수 없다. 행복에 절반의 영향을 미치는 유전적 요인은 어쩔 수 없지만 나머지 절반은 내가 바꿀 수 있다는데 희망을 갖고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
저자 서은국 박사가 한 강의에서 지나가는 말로 “뭐 꼭 행복해야 합니까?”라고 했는데 그 말이 나는 인상 깊었다. 행복은 ‘감정’이고 이를 쫓는 삶은 본능에 따라가는 삶이라면, 우리에게는 의미 있게 살고 싶은 욕구도 있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고생은 우리를 자신 있게 살게 해 준다.
행복은 어딘가에 벗어났을 때 잠깐 느끼는 기분이기도 하다. 초밥이가 학교 가고 혼자 남았을 때, 운동이 끝났을 때, 과외를 마쳤을 때처럼.
해방감이 행복이라면 등산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글이 산으로 가지 않기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애를 썼던가). 어떤 얘기든 끝에는 “절에 가야 된다”는 엄마를 반면교사 삼아 나는 기승전‘산’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이번 주 호남정맥에 중간에 빠지는 코스도 있다는디, 한번 가볼껴?”
몇 달 전부터 희남이 삼촌은 산악 마라토너들이 있는 산악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가고 싶다고 말한 적도, 후기를 궁금해하지도 않았는데 삼촌은 내가 가면 바로 폭탄 되니까 평균 시속 3.5킬로미터 될 때까지 훈련하라고 했다.
삼촌이 말한 산악회는 군산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전주에서 새벽 5시에 출발했다. 삼촌이 늦으면 안 된다고 서둘러서 3시 30분에 출발했더니 4시 28분에 전주 종합 경기장 주차장에 도착했다. 바람조차 잠든 고요한 그곳에서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래야 되는데요?”
“아침 먹었어?”
“밤인데 무슨 아침을 먹어요.”
“난 먹었는디.”
땅끝 기맥 7구간, 닭골재,-달마산-도솔봉-땅끝마을 탑비. 19.8킬로미터. 초반 코스인 달마산은 오르내림이 커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땅끝마을까지 12킬로미터가 남아있었다. 그냥 미친척하고 달렸다. 러너스 하이인가, 내리막을 달리는데 몸이 붕 뜨면서 나는 것 같았다. 진짜 미친 건지도 모른다. 다리에 감각이 사라져서 내 다리 인지도 모르겠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중간에 탈출해서 택시 타면 버스 있는 곳까지 12만 원이 나온다는 어느 회원의 말에 가속도가 붙었다.
그렇게 힘들어놓고 다음날 왜 산에서 찍은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는지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몸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면 이상하게 머리가 편안해지는데 일상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힘든 만큼 몸에 기억된 쾌감도 강력해서 하산한 뒤에 마신 맥주, 돼지 주물럭 맛이 잊히지 않았다.
한치의 의심 없는 행복감, 등산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돌아오는 버스 안은 뿌듯함으로 가득 차고 모두 깊은 잠에 빠져 무덤 같은 고요가 흐른다.
자의식을 벗어나야 온전한 휴식이 된다. 유일한 관심사는 남은 거리가 얼마냐인 것뿐인 그 순간, 통장 잔고 따위는 안중에 없다. 직전에 5킬로미터 남았다고 했는데 다음 이정표에 7킬로미터가 남아있다고 했을 때 회원들 모두 하나가 되어 성토대회를 펼쳤더랬다. 이정표를 설치하는 담당자들이 이 마음을 안다면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거리를 기재할텐데.
3분마다 휴대폰을 확인하는 생활에는 쉬어도 쉬는 게 아니다. 수면 루틴 따위 깔끔하게 무시해주고, 퍼스트 클래스 비행기 좌석이 아닌 4칸짜리 일반버스에서도 스위치를 내린 것처럼 잠을 잘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휴식이다.
한편, 산악 마라토너들은 나 덕분에 젊은 피가 수혈됐다며 환영해마지 않았다. 50대가 젊은 축에 속하고 60대 회원이 가장 많은 산악회에서 45세인 나는 유소년 축구단 같은 존재였다. 젊다는 건 준거집단이 누구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걸 실감했다.
“다음 주(백두대간)는 오늘(기맥) 보다 힘들지 않으니까 꼭 와요.”
보는 사람마다 한 마디씩 했다.
내가 등산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를 대자연 앞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털어놓아야겠다. 45살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늙는 기분이었다. 35살 때를 생각해보면 5살 차이는 엄청난데도 나는 왜 사십 대는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45살에 찾아온 노화는 차원이 달랐다.
산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얼굴뿐 아니라 체형과 머리숱까지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등산복의 최고 기능은 제 나이보다 서너 살은 많게 보이고, 그 어떤 것(좋은 것)도 감춰주지 않는 데 있다. 해마다 피는 철쭉은 그대로인데 나만 늙어가고 있는 기분. 본격적인 노화에 입문할 때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
젊으니까 적응이 빠르네, 젊어서 회복력이 좋아, 몸의 성능에 대한 칭찬이기는 하지만 산악회 회원들이 하는 말은 산악회 기대주의 어깨를 으쓱하게 했다. 미용실을 다녀와도 새 옷을 입어도 똑같다고만 하는 딸보다 산악회 회원들이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상대적 충족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내 꿈은 70대에 장거리 산행을 하는 것이기에 그분들은 나의 롤모델이기도 하다. 계절의 미묘한 차이를 만끽할 수 있다면 젊음의 한 복판에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지금 누리는 기쁨이 있다면 나이 드는 게 서운하지만은 않다.
“행복을 부정적인 감정이 전혀 없는 늘 즐거운 상태여야 한다고 기대하면 조그만 고통에도 크게 좌절할 가능성이 높고, 결과적으로 그런 기대를 갖지 않은 사람보다 역설적으로 더 낮은 행복감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최인철 <굿 라이프>의 한 구절이다.
“부정적인 감정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기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순간 차오르는 만족감을 느낀다면 몇 살이든 당당하게 살지 않을까. 내 몸하나 건사하는 게 겁 나는 삶보다 몸 하나만 있으면 되는 삶을 살고 싶은 이유다. 해방감은 부산물이기에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건, 행복을 목표로 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