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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Sep 18. 2024

벌떼 모임, 이십 년 전 어느 하루처럼

한때 나와 이인조였던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거의 일 년 만에 하는 통화였다.     


나: 오랜만이다.

주: 어제 내가 한 단톡방에 끌려가게 되었는데 말이야. 거기 누가 있었냐 하면 영, 수, 미가 있었어. 미와 수가 얼마 전에 대구에 이사 왔다고 하더라고.

나: 미는 인천에 살고 있었던 건 알았는데, 수는 쭉 대구에 살았던 거 아닌가?

주: 아니었나 봐. 근데 그 세 명 집이 동구로 서로 가깝더래. 대구 동구모임을 갖자 하던 차에 나를 부르게 되었고, 추석도 다가오는데 동동맘과 준정이도 대구에 오지 않을까, 그러면 이번 참에 다 같이 한번 보자 하는 말이 나와서 말이야. 그걸 내가 전해주려고...

나: 잠깐 있어봐. 이거 동동맘이랑 그룹통화로 이야기하자!     


나는 주, 동동맘과 단톡방을 만들고 보이스톡을 연결했다. 동동맘에게 주가 나한테 한 이야기를 요약해서 전했다.     


동동맘: 가고 싶은데 그날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청도 갔다가 다시 대구로 나올 수 있을지 상황을 봐야 하거든. 진짜 가고 싶은데...

동동맘은 시댁과 친정이 청도다.     

나: 순수하게 놀고 싶은 욕구로 들끓기는 진짜 오랜만이다.

주와 동동맘은 맞아, 맞아, 백 번은 했다.

나: 가만있어봐. 6명이면 한 테이블이 넘잖아. 신창원이 다른 건 몰라도 네 명 넘으면 두 테이블 잡으라고 단호하게 자르는데 어쩌지.

둘의 웃음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흘러넘쳤다. 신창원은 그 옛날 우리가 가던 나이트클럽 담당 웨이터로 십 년의 세월을 함께 한 동료다.     


아쉽게 동동맘이 빠지기는 했지만, 벌떼 완전체 모임은 십 년 만이었다. 만날 생각만으로 이렇게 들뜨는데 그동안 어째서 연락도 하지 않고 지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벌떼와 만날 날을 앞두고 평소처럼 지내면서도 순간순간 낯선 감정에 사로잡혔다. 오래된 친구를 만난다는 건 그런 느낌이다. 과거의 나를 만나는 기분. 얼굴을 들여다보는데 마치 26살의 내가 46살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중년의 이 여성은 누구인지 매일 보던 내 얼굴이 새삼스러웠다.      


기억 속에 친구들은 이십 대에서 멈춰있기 때문에 그들의 눈으로 나를 보는 것 같았다. 한 명이 아니라 떼로 만나니까 감정이 쓰나미처럼 덮쳐서 현실 감각이 흐려졌다. 우르르 몰려와 나를 과거로 끌고 가서 가상과 현실을 오가는 며칠을 보냈고, 드디어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 되었다.    

 



5일간의 추석연휴가 시작되는 날, 나는 본가에 도착해서 부모님한테 인사만 하고 곧장 약속장소로 날아갔다.      

장소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막창집. 가게에 들어서자 이십 년 전 어느 하루처럼 영은 집게를 들고 막창을 굽고 있고, 주는 떠들고 미와 수가 웃으며 듣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정겨운 장면 속으로 풍덩 뛰어들 듯 나는 주를 뒤에서 껴안았다. 오메야, 주가 놀라며 돌아봤고 모두 악, 탄성을 질렀다. 나는 영, 수, 미를 차례로 힘껏 끌어안았다. 가슴이 막창 불판보다 뜨거워졌다.      


“하나도 안 변했잖아? 다들 어떻게 된 거야? 타임캡슐에라도 들어갔다가 나온 거야?”

“너야말로 하나도 안 변했네. 예전이랑 똑같아.”     


주변에 있는 손님들이 들으면 딱 봐도 중년 여성들 계모임인데 무슨 소리냐며 어이없어할 것 같았지만, 우리는 이런 말을 잘도 했다. 하지만 내 눈에 친구들은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과거에 박제되어 있다가 나타난 것만 같았다. 나도 늙어 보일까 봐 괜히 걱정했다. 객관성은 던져버리고 과거 모습을 투영시켜서 볼 줄 알았다면 말이다. 

 

뜻밖의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한 사람이 말하면 나머지는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벌떼라니. 예전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사람이 말하고 있으면 누군가 끼어들고, 건수가 생겼다 하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물어뜯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날 우리는 한 사람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어떤 평가도 하지 않았다.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삶을 내가 살아온 것처럼 친구도 그랬을 테니까. 그랬구나, 그렇게 지냈구나, 그냥 들었다.      


내 이야기도 편안하게 할 수 있었다. 친구들도 그랬구나, 그렇게 지냈구나, 그냥 들어주었다. 마음 편하게 말하고 들어주는 건 우리에게 낯선 일이었다. 예전처럼 웃고 신나 하면서도 ‘들어주는 일’이 추가되었다. 농담을 하다가도 한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하면 나머지는 잠자코 듣기를 반복했다.   


그런 친구들을 보는데 왜 이렇게 기특하고 장한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집안에 한 명씩 있는 사고뭉치가 제 앞가림을 하고 사는 것만으로 안심하는 부모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김훈 작가는 신작 에세이 제목인 <허송세월>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내가 건강 때문에 술을 못 먹게 되었어요. 가끔 위스키를 입에다 대면 야, 이게 정말 술맛이구나, 나에게 필요한 것이 드디어 왔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이제까지는 이 맛을 모르고 그 많은 술을 내가 먹었구나 허송세월한 거구나 하고 말이죠.”     


한때 나는 벌떼와 몰려다녔던 시절을 인생을 낭비한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감정을 느끼며 야, 이게 정말 재미구나, 나에게 필요한 것이 드디어 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는 이 재미를 모르고 그 많은 시간을 보냈구나 허송세월한 거구나 하고 말이다. 본게임은 지금부터 시작인지 모른다.

동동맘도 함께 하는 날을 기약하며
그리고 이인조, 너를 보고 웃는 게 얼마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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