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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Aug 16. 2024

완벽하지 않아도 <퍼펙트 데이즈>

오늘 점심은 지난주에 동동맘이 놀러 왔을 때 주고 간 가지로 가지밥을 만들었다. 동동맘은 텃밭농사를 짓고 있는데, 가지 말고도 오이, 꽈리고추, 호박을 잔뜩 따 가지고 왔다. 혼자 먹기에는 많은 양이라서 나는 삼등분을 해서 같은 아파트에 사는 지샘과 은덕샘한테 가져다주었다.   


가지를 파기름에 볶아서 쌀 위에 얹고 전기밥솥의 취사 버튼을 눌렀다. 가지밥을 만드는 건 이번이 두 번째인데, 처음 가지밥을 먹었을 때 콩나물밥이나 버섯밥과 달리 가지를 기름에 볶아서인지 쌀알이 기름으로 코팅이 되어서 마치 볶음밥을 먹는 것 같았다. 가지 덕분에 느끼하지 않고 담백함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전기밥솥이 가지밥을 만드는 동안 반찬을 준비했다. 여름 내내 먹고 있는 꽈리고추를 밀가루와 섞어서 찜기에 올려놓고 양념을 만들었다. 서걱서걱 파를 써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매미소리가 가득한 주방에서 파를 썰고 있자니 지금 모습이 여름에만 볼 수 있는 한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지밥, 꽈리고추찜, 매미 소리는 얼마 후면 사라질 것이다. 이제 입추가 지났으니 거실창을 통해 들어오는 열기와 불 앞에서 음식을 만드는 게 힘든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지. 그러자 얼마 전에 봤던 영화가 떠올랐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는 매일 아침 이웃 할머니의 비질 소리에 잠을 깨고 주방싱크대에서 양치와 세수를 한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서 카세트테이프로 올드팝을 들으며 출근한다. 점심에는 산사 벤치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을 필름 카메라로 찍는다. 일을 마치면 공중목욕탕에 들렀다가 지하상가의 단골 식당에서 술을 한 잔 마신다. 그리고 헌책방에서 산 소설을 읽다가 잠이 든다. 영화는 그런 일상을 물 흐르듯이 보여준다.

히라야마 역을 맡은 야쿠쇼 코지는 이 영화로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 나는 잔잔하면서 영화제 수상을 했다는 영화는 죄다 재미없었다. 그때만큼 젊지 않은 지금은 1시간 넘게 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기만 하는데도 그 자체로 아름다워서 빠져들었고, 어느 순간부터 화면에 나의 일상이 겹쳐지면서 눈물이 맺혔다.

히라야마에게도 일상에 균열이 일어나는 사건이 일어난다. 연락을 끊고 지내던 조카가 가출을 해서 히라야마를 찾아온 것이다. 조카에게 잠자리를 내주고 창고에서 자고 일어난 다음날 아침, 이웃집 할머니의 비질 소리가 아니라 빗소리에 깨는 것으로 변화가 생겼음을 보여준다.

그는 평소와 다르지만 그 나름대로 편안하게 하루를 보낸다. 자판기에서 두 개의 커피를 뽑고, 늘 가던 산사 벤치에 조카와 나란히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영화는 반복되는 일상의 소중함을 말하지만, 어쩔 수 없는 변화가 생겼을 때는 비가 오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그런 하루하루가 모여 완벽한 날이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히라야마는 작은 집에 살면서 샤워실이 없어서 싱크대에서 양치와 세수를 하고, 공중목욕탕을 간다. 퍼펙트 데이즈는 부족한 걸 채우는 게 아니라 부족한 삶 그 자체에 집중했을 때 가능한 걸까. 일상을 벗어나는 게 아니라 일상 깊숙이 들어갔을 때 비로소 삶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음을 말하는 것 같았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히라야마는 아버지와 여동생과 연락을 끊고 살아가고 있었다. 영화에서 그 이유를 자세히 다루지 않는 것이 마치 누구나 저마다의 사정과 상처가 있지만, 그럼에도 삶의 기쁨은 공평하게 찾아온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스며들 듯 하지만 명확하게.

<퍼펙트 데이즈>가 개봉했다는 소식을 들은 한 달 전부터 보고 싶었지만 내가 사는 군산에는 상영관이 없었다. 검색해 보니 전주독립영화관에 오전에 상영하는 날이 한 달 중에 딱 하루가 있었다. 오후에는 과외수업을 해야 하고 군산에서 전주까지 왕복 두 시간이 걸리니 오전이 아니면 보기가 어려웠다.

상영시간은 10시 40분부터 12시 44분. 9시 30분에 군산에서 출발했더니 영화관까지 가는데 정확히 한 시간이 걸렸다. 오후에는 봉사모임이 있어서 1시 20분까지 군산으로 돌아와야 했다. 어쩔 수 없이 후반 이십 분을 보지 못하고 12시 25분에 극장을 나와야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완벽해야 하는 건 아닌 데다 영화를 본 뒤로 나에게 기분 좋은 습관 하나가 생겼기 때문이다. 영화에 나왔던 올드팝을 찾아 들으면서 나의 일상을 머릿속 스크린에 띄워보는 일이다.


가지 볶아서 밥 짓기

   

가지밥으로 차린 점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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