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에 혼자 앉을 때

by 김준정

오랜만에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대안학교는 퇴학당한 아들이 가는데 아이가? 공부는 아예 포기할라 카는 기가?”

아빠는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나림이가 인근 도시에 있는 대안중학교 입학설명회를 다녀온 걸 엄마한테 들은 모양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고 거기에 자신의 불안을 최대치로 불어넣어 말하는 건 아빠의 특기다. 말려들면 안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초창기에는 아빠가 말한 대로 일반학교의 중도 탈락한 학생들을 수용할 목적으로 설립되었어요. 학력을 인정되지 않는 비인가 학교도 있고요.”

“요새도 문제가 있어서 학교에 적응 못하는 애들이 모인단 말이다. 그런 데를 와 보낼라 카노? 데리고 있으면서 학원 보내고 하면 공부도 잘할 아를.”


김제에 있는 지평선 중학교는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토론과 독서를 중심으로 하는 학교다. 모둠 수업이 많고, 가족과 함께하는 행사가 많다. 그중 백미는 2박 3일 지리산 종주. 학부모 지원도 받는다고 했다. 산악인 엄마로서 기대가 안될 수가 없다. 딸과 지리산 종주를 하는 게 꿈이었는데 드디어 이루어지는구나, 왜 내 가슴이 두근거리는 거지? 선생님과 아이들 관계, 친구들 관계가 끈끈해서 졸업식 때 학부모들조차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는 졸업생 학부모의 후기를 읽고 왜 내가 훌쩍거리는 건지. 내 멋대로 가슴이 뭉클해져서는 ‘그래 이 학교야’라고 결심했더랬다.


내 아이가 가족 외에 다른 사람과 깊은 연결감과 안정감을 가지기를 바란다. 친구들을 경쟁자로 여기는 대신 함께하는 것 자체가 즐겁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우열감을 느끼는 대신 자신이 공동체에 유익한 존재라는 느낌을 가지길 바란다. 나의 성취가 곧 공동체에 기여로 연결되어 자기 존중감을 키워가길. 그건 공부가 아닌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익혀지는 거라 믿는다.


처음 20분은 잠자코 아빠 얘기를 듣기만 했다. 아빠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었지만 지적하지 않았고, 어느 부분에서는 “아빠 말이 맞다”라고 했다. 덕분에 오늘 우리의 대화는 순풍에 돛을 단 배였다.


“나림이가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네가 신경 써야 한다. 나중에 부모 원망하지 않도록 말이다.”

아빠가 결론을 내듯 말했다.

“아빠, 토마 피케티라는 경제학자는 부가 대물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양도세를 80프로까지 올려서 징수하고, 확보된 재원으로 25세 청년에게 1억 2천만 원의 기본 자산을 주자고 했어.”


아빠는 그런 발상은 공산주의나 유럽의 복지국가에 해당되는 말이고, 우리나라에서 그런 생각을 가지면 낙오자가 되기 십상이라고 했다.

“공산주의는 인간 본성에 맞지 않아서 실패했고, 유럽의 복지국가도 후진국에 수출을 많이 한 덕분에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거다. 앞으로는 후진국도 경제자립 정책을 펴기 때문에 어려울 거다.”


그래도 지금처럼 우리나라가 미국식 자본주의를 계속 유지하다가는 불평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서 자살률, 묻지 마 범죄가 더 늘어날 거라고 내가 말했다.


“이번에 코로나 19 때문에 미국에 폭동이 일어난 것 보면 모든 걸 시장논리로 따져서는 안 된다는 게 증명이 되었잖아요. 주택, 의료, 교육은 국가에서 보장해줘야 사회가 안정적으로 돌아가요.”

“네가 말한 게 가능하려면 수준 높은 연대의식을 가진 시민이 70%는 돼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멀었다.”


“아빠, 그래서 내가 나림이를 대안학교 보내려고 하는 거예요. 학교 교육에서 자연스럽게 공동체 감각을 익혔으면 해서.”

아빠는 더 이상 아무 말하지 않았다.


아빠한테 침묵은 동의를 의미했다. 뿌듯했다. 가족끼리 이런 대화를 했다는 것도, 무엇보다 우리가 서로의 얘기에 귀 기울여 주었다는 게 큰 소득이었다. 내 생각이 말도 안 되는 거라고 하지 않은 아빠가 고마웠다. 다른 경험과 가치관을 가진 아빠와 나 사이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아빠와 나는 그렇지 못했지만 다음 세대인 나림이만은 우리와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란다는 걸 확인했다.


무일푼으로 가내 공업사를 차려서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는 아빠에게 경쟁은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다. 남보다 더 부지런하고 요행을 바라지 않으면 조금씩 살림이 불어났다. 적어도 내 자식들은 집 한 칸씩 마련해줄 수 있어서, 그러면 자신처럼 악착같이 살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여기고 살았다.


하지만 나는 아빠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쟁이 불편했다. 내가 가진 자원을 오직 내 자식이 잘 되게 교육시키는 건 어쩐지 반칙 같았다. 그건 학원에서 오래 일하면서 생긴 거부감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왜 공부하는지도 모른 채 온갖 투정을 부리며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면 회의감이 들었다. 내가 잘 되려고 공부하는 건데 부모를 위해 공부하는 양 생색을 부리는 아이들이나 공부를 최우선으로 놓고 아이들의 불평을 받아주는 부모를 보며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는 자기 수련이기에 하다 보면 의식이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사회구조의 모순이 보이게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육환경에서는 그런 걸 기대하기 어렵다.


요가를 다녀오니 10시 30분. 지금은 방학, 나림이가 자고 있을 때 나갔기 때문에 밥부터 차렸다. 닭가슴살을 오븐에 넣고, 냄비 두 개를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냉장고에서 호박잎과 고구마순을 꺼내 다듬어서 호박잎은 찌고, 고구마순은 데쳤다. 그동안 식탁을 닦고 호박잎과 싸 먹을 갈치속젓과 어제 만든 꽈리고추 찜을 꺼냈다. 차려놓고 보니 육식주의자 나림이가 먹을 반찬이 없었다. 어제 먹고 남은 김치찌개를 데우고, 닭가슴살을 접시에 담았다. 닭가슴살이 질렸으려나? 햄을 구우면서 밥을 펐다.


“나림아, 밥 먹자.”

대답이 없었다. 다시 잠들었나? 더 큰 소리로 불렀다.

“밥 먹자니까?”


방문을 열어보니 녀석이 없었다. 침대에서 내려와(이불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잠옷을 벗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뒤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몸이 빠져나간 잠옷은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있고, 뭘 입을지 고민하다가 선택받지 못한 옷들은 책상 위와 의자, 침대에 널려 있었다. 현장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추리가 어렵지 않았다.


전화를 걸었다.

“놀러 갔어?”

“응. 서현이가 불러서.”

“밥 안 먹었잖아.”

“괜찮아. 친구들이랑 뭐 사 먹으면 돼.”


친구들이랑 노는 중이니까 전화를 끊으라는 압박이 느껴져서 더 물어보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햄을 구웠다고, 나는 햄 안 좋아하는데, 이걸 나 혼자 어떻게 다 먹으라고. 2인분의 반찬과 밥을 앞에 놓고 혼자 식탁에 앉았다. 녀석이 배고플까 봐 옷도 안 갈아입고 정신없이 차렸는데 힘이 쭉 빠져나갔다. 녀석이 중학교에 가버리면 매일 식탁에 혼자 있게 되겠지. 이제 나는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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