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바넬과 샤넬

by 김준정

아침 식탁에서 나림이가 말했다.

“형진이가 진우 휴대폰을 부셨대. 걔 꺼 아이폰 11인데.”

나림이가 짜장밥을 비비며 말을 이었다.

“둘이 롤(게임)하다가 형진이가 졌대, 진우가 나한테 졌지? 하면서 화면을 사진 찍으니까 형진이가 하지 말라고 손을 탁 쳤는데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졌어. 그때는 괜찮았는데 진우가 집에서 보니까 배터리도 엄청 빨리 닳고 속도가 느려졌다는 거야.”

“그래서?”

(밥 먹으면서 말해, 학교 늦겠다, 일주일에 한 번 가는 학교에 지각할 거냐? 이런 모든 말들은 꿀꺽 삼키고) 내가 말했다.

“진우가 형진이한테 페메(페이스북 메시지)로 너 때문에 휴대폰 망가졌다고 하니까 형진이가 어떻게 고장 났냐고 묻기만 하고 미안하다고 안 했대. 진우가 화나가지고 사과부터 하라고, 이거 고치려면 몇십만 원 든다고 했대.”

“몇십만 원?”

“아이폰 11이니까. 그런데 그 뒤로 형진이가 톡을 읽지도 않았대. 그래서 진우가 단톡 방에 얘기했고 우리도 알게 됐어.”


뭐라고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설교는 짜장밥을 사이에 둔 훈훈한 분위기를 연기처럼 사라지게 하고 우리를 시베리아 한복판으로 데려다 놓는다. 가만있어 보자, 초등학교 때 나는 어땠나? 친구들과 패를 갈라서 다른 편 아이의 험담을 했고, 그중 한 아이 집에 전화해서 욕도 했었지, 그때 그 아이 엄마에게 엄마라면 마땅히 할 수 있는 일련의 질책을 푸짐하게 들었지, 참 바람직하지 못했고 다사다난했어, 까지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진우 휴대폰 파손보험 가입하지 않았나? ”

“모르겠어. 그래도 사과도 안 하고 모른척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진우는 수리비가 얼마 나오는 지도 알아보지 않은 것 아닌가? 형진이 입장에서는 그 자리에서는 이상이 없었으니까 당장 몇십만 원 물어주겠다, 미안하다 이렇게는 말 못 하겠지.”


내가 이렇게 말한 데는 이유가 있다.

“너희 엄마는 샤넬 백몇 개 갖고 있어? 우리 엄마는 00개 있어.”

진우가 5학년 때 한 말이었다. (샤넬이 뭔지 모르는 나림이는 “네 가방도 아닌데 뭘 자랑하냐”라고 했었다)


진우는 구찌, 루이뷔통, 샤넬 같은 명품 브랜드 감별사였다. 나림이가 ‘바넬’이라고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고 갔을 때 진우가 샤넬 짝퉁이라고 알려줬는데 그때까지 우리는 그게 바나나 그림이라고 생각했지 샤넬을 본뜬 건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신기해했다. 한 번은 나림이의 양말을 본 진우가 말했다.

“그거 구찌 아니지? 네가 구찌 양말을 신을 리가 없지.”

진우는 양말 밴드의 손톱만 한 곳까지 명품 로고가 스며들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반면 형진이는 여름 티셔츠가 세 벌이다. 매일 같은 옷을 입는 형진이에게 아이들은 옷이 그거밖에 없냐고 옷 좀 사라고 했다. 용돈이 부족한 형진이는 편의점에서 아이들에게 사달라고 하는 일이 많았고 피시방에서도 이용료를 친구들한테 대신 내달라고 할 때가 잦았다. 몇 번인가 그것 때문에 짜증 난다고 나림이가 말했던 게 기억이 났다.


“휴대폰이 고장이 났다고 해도 수리비 전부를 형진이가 물어줄 이유는 없어. 사치품을 소유한 사람이 감수해야 할 것도 있으니까. 예를 들어 비싼 만년필을 가져와서 친구가 쓰고 고장이 났다면 상대방이 그걸 고스란히 물어줘야 할까? 비싼 물건이라면 가지고 오지 않거나 간수 못한 본인에게도 책임이 있지 않을까?


내 물건을 네가 망가뜨렸으니까 물어내야 한다, 어찌 보면 공정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부모님이 사준 거니까 내 거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부모님을 만난 건 내가 뭘 잘해서가 아니지 않나? 세상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것들이 얽혀 있는 거니까 내가 보는 게 다라고 생각하면 안 돼. 그중에서도 그 친구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은 너그럽게 넘어가 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그 친구는 자존심이 다쳐서 나중에 큰 상처가 될지도 모르니까.”


내가 말을 끝냈을 때 우리 사이에는 ‘진지’의 강이 넘실거리고 있었고 나림이는 과묵해져 있었다. 나도 못하는 걸 아이한테 떠들었군, 하면서 반성했다.



사실 나는 전과 사뭇 다른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대용량의 짜장과 카레를 사서 냉동실에 넣어두고 사용하고 바디샴푸가 떨어졌는데도 사지 않았다. 가능하면 절약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충분한 돈을 벌지 못하는 이유도 있고 얼마간 생활습관을 바꾸려는 훈련을 (어쩔 수 없이) 하려는 의도도 있다. 상실감이 들기도 하지만 대신에 늘어난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야겠다며 마음을 다잡는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보통 수준 정도의 생활만 할 수 있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게 좋다고 했다. 나는 현재 보통 수준의 삶을 살 정도로 돈을 벌고 있지는 못하지만 글 쓰는 일과 더불어 노력을 기울여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하는 집안일처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요리를 해야 먹을 수 있고, 설거지와 청소를 해야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살아가기 위해서 감당해야 하는 노동을 하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그런 이야기만이 현실에 발을 딛고 사는 이들에게 닿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돈을 벌고 식사를 준비하고 걸레를 빨고 글을 쓴다. 나림이 친구 이야기가 어째서 이런 결말이 돼버렸는지 모르겠지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존재만으로도 위안이 된 <한길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