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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플리트 Oct 28. 2022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2008년 5월 13일, 어느 시간 강사는 이 날 이후 4년 간 ‘대학생’들을 주제로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그날의 일을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책의 내용을 빌어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경기도 소재의 한 대학에서 ‘인권과 평화’라는 과목을 강의하던 나는 매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주제를 하나 골라서 이를 보편적 인권의 차원에서 설명해 나가고 있었다. 그날의 주제 역시, 당시 장기 파업으로 사회적 주목을 끌고 있던 ‘KTX 여승무원들의 철도공사 정규직 전환 요구’ 문제였는데 여느 날과 특별히 다른 사안은 아니었다. 그 사안의 내용을 잠깐 보자면, 2004년도 최초 채용 당시 정규직 전환을 보장받고 들어왔다는 여승무원 측과, 그런 적이 없고 노동자들은 분명히 계약직임을 알고 들어왔다는 사측, 이 두 입장이 충돌하고 있는 문제였다. 그러다 2006년 3월부터 350여 명의 여승무원들이 ‘철도공사의 정규직 직접 채용’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시작했는데. 이에 사측이 강경한 입장으로 일관하면서 상당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중략---

이 KTX 문제는 찬반 의견을 공정히 들을 그런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당시의 모든 정황상 ‘이건 사측이 무조건 잘못한 거다.’ 정도로 사태를 이해하는 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처음부터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뭘 잘못했는가’를 확인해가는 정도의 논제였다. 이십 대 대학생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에 관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그들의 ‘정규직 전환’ 주장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타당한 사회적 연대임을 강조하는 것이 ‘인권과 평화’라는 강좌명에도 어울리는 수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학생의 대답은 나의 이런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게 만들었다. 경영학과 4학년 학생 K(당시 27세)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날로 정규직 되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라고 답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사실 K를 걱정했었다. 왜냐고? 피 끓는 시절의 대학생이라면, 지금껏 수많은 이십 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다소 진보적인 게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게다가 이 수업은 뭐든 ‘효율성’의 관점이 우선되는 경영학과 수업이 아닌, 사회적 문제의 해결책을 고민하는 사회학 전공자의 ‘인권과 평화’ 강의였다. 

대형 강의를 많이 하다 보면 자연스레 느낄 수 있는 특정 분위기라는 게 있다. 이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대다수 학생들의 생각을 K가 대변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의실을 아주 차분하지만 강렬히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K를 바라보는 다른 학생들의 눈빛에는 ‘그래! 너 말 한 번 제대로 잘했다!’라는 동의가 넘쳐났다. 이를 눈치챈 K는 더 공격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처우 개선과 정규직 전환의 문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대학생들이 왜 이렇게 고생을 합니까? 정규직이 되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입사할 때는 비정규직으로 채용되었으면서 갑자기 정규직 하겠다고 떼쓰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행위인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로 볼 수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다른 요구도 아닌 정규직이길 희망하는 것이, 보편적인 이십 대 대학생들에게는 인권의 범주에서 논의될 성질의 사안이 아닌 셈이었다. 나는 오히려 “그런 당위가 더 비윤리적이다.”, 민주주의가 만능열쇠냐!”라는 반론에 부닥쳐야 했다. 이런 생각과 확신이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이런 물음들이 내 발걸음을 차츰 이십 대에 대한 연구 쪽으로 내딛게 했다.



'괴물이 된 이십 대의 자화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 오찬호 연구원은 이십 대들의 처절한 삶과 환경을 가까이 목도하고 진술했다. 이십 대가 힘든 사회구조적 이유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이유가 별반 다르지 않기에 동병상련 해주길 바랐지만 그런 반응은 나타나지 않는다고 의아해했다. 

정부의 입김이 듬뿍 들어갔을 통계자료에서조차도 계약직이 전체 노동자 대비 33%에 이르며, 이는 600만 명에 육박하는 숫자라고 한다. 이십 대의 상당수가 저 ‘600만’ 중 하나가 될 것이니 자신들이 진출할 곳의 상황이 조금이라도 좋아지길 바라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냐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에 지지와 연대를 보내는 게 정작 이십 대 자신들에게 이득임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이 구조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냐며 서두를 열었다.

그 이유에 대해 ‘학력 위계주의를 내재화하여 자기 계발이라는 보편적 특성을 갖게 된,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이십 대’로 정리한다. 수능점수에 근거하여 대학 서열이 정해지고 그 기준을 절대시 하는 한 우리 청춘들은 계속 아플 수밖에 없다.


EBS <교육대토론>의 사회자 박남기 교수는 ‘왜 우리는 열심히 노력해도 여전히 불행한가?’라는 부제가 붙은 『실력의 배신』이라는 책에서 실력(능력)주의 사회가 과연 좋은 사회인지 화두를 던진다. 필자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실력이야말로 그 어느 기준보다 공정하고 합리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주장을 살면서 처음 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돈과 달리 능력은 개인의 노력이 더해진 실력을 통해 보상을 받으므로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사회의 상위 10퍼센트에 속한 사람들의 실력과 성공을 결정한 핵심 요인이 정말 노력인지, 화두를 던진다. 실력이 능력과 노력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부모의 배경을 포함한 우연(운)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을 들어 실력주의가 학벌사회를 만든 원인이었으며, 실력주의가 타파되어야 학벌사회가 타파됨을 주장한다. 


이 두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로우며 실력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실력 또한 불평등에서 출발해 불평등을 야기하는 요소이며, 수능점수로 한 줄 세워 서열화된 대학으로 학벌을 나누고 실력을 나누는 실력주의 허상이 계속되는 한 ‘열심히 살아도 불행한 다수’가 계속 생겨나게 된다. 빈부격차는 실력주의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 결과가 아니며,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실력주의가 진행되면서 나타나는 그림자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이십 대의 주장을 다시 떠올려보자. K군의 주장대로 비정규직의 도둑놈 심보 때문에 실력주의가 흔들리는 게 아니라, 열심히 노력하여 실력을 갖춰야만 부를 가져갈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수많은 좌절과 빈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두 권의 책을 읽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니 자연스럽게 물음표 하나가 생긴다. 

“그렇다면 사람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무엇일까?” “회사는 어떤 사람을 뽑아야 할까?” 

우리가 하는 말들을 가만히 복기해보면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일하는 것’을 갈망한다. 


결국은 인성이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존중이 없으면 관계는 병든다. 존중은 사랑에 기반하는데,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것이 결핍되었을 때 드러난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부차적인 요소인 것 같아도 그것이 결핍되면 공기가 결핍될 때와 마찬가지로 영혼이 질식한다. 나는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아마 이성의 사랑에 한정된 것이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 없이 존재할 수가 없다.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등 뇌의 구조가 병든 사람은 사랑 대신 이익을 취함으로써 사회의 악이 된다. 자신 안에 갇혀 사는 아이를 둔 부모는 무엇보다 아이와 눈을 맞추며 사랑을 전하고 받을 수 없어 슬프다. 독거노인은 타인의 온기를 느낄 수 없어 더 빨리 늙어간다. 부모로부터 학대받은 사람은 치유 과정을 거치지 못하면 평생 인생과 사람을 불신하며 불행하게 살아간다. 사랑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요소가 아니다. 우리는 애초에 ‘사랑’에 기반하여 살아가게끔 만들어진 존재다.


중학생 아이들도 인성이 좋은 아이돌을 좋아한다. 인성이 안 좋다는 팩트가 뜨는 순간 돌아선다.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할 때 인성을 보고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나를 해치지 않을 거란 심리적 안정감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좋은 인성이 별건가. 그와 함께라면 내가 안전할 거란 믿음이 어디에서 오는가? 마음에 사랑이 있는, 그래서 그것이 인성으로 드러나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안정감을 느낀다. 

어느 날 대화를 나누다가 어떤 실수나 잘못이 있을 때, 거짓말하지 않고 인정하는 고객사의 문화가 참 인상 깊었단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회사에서 인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런 인재를 선별했을 수도 있고, 입사 후 여러 교육을 통해 그런 자질을 개발시켰을 수도 있겠다. 결국 팀을 이뤄 일을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수용, 존중, 협동심, 긍정적인 마인드 등이 아닐까? 나도 너도 마음 다치지 않게 역지사지의 자세로 일터에 임하는 것이 시작일 수 있겠다.


우리는 어른이지만 다들 마음 안에 불완전하고 여린 꼬맹이가 있다. 직장 안에서, 관계 속에서 어떤 상황에 어떤 대처를 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한 부분들이 있다. 필자는 그런 것들을 일부 회사에서 메꿔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여러 사람들의 반복되는 실수, 반복되는 잘못에는 어떤 공통분모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해결 팁이나 가이드 또한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기업들이 교육을 하지 않는가. 우리 유플리트에서도 엑스퍼트 포럼 등을 통해 리더십이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양질의 포럼을 접할 수 있는데, 이런 교육들을 잘 활용해서 인성을 함양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어느 순간 느끼게 되는데, 내 아이만 잘 키워서 될 일이 아니더라. 내 아이와 함께 하는 모든 아이들이 행복해야 그 안의 내 아이 또한 행복할 수 있겠더라. 그래서 한 아이를 온 마을이 키운다는 말이 나오는구나 싶었다. 우리 어른도 다르지 않다. 내 주위 사람이 좋아야 그 안의 나도 행복하다. 그 얘긴 나도 그 환경에 일조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우리, 실력이 아닌 인성으로 사람을 품자. 타인의 인성보다 내 인성으로 먼저. “내 인성이 제일 훌륭해! 내 인성이 1등이야!” 이건 해볼 만하지 않은가? 공부보다 사랑이 쉬운 법이니까.


‘사랑 충만한 유플리더’가 되어 나의 발전, 좋은 동료, 일의 즐거움이 있는 유플리트를 만들어 보자고 권해본다. 내 안의 사랑이 채워지고 넘쳐야 타인에게 흐르는 법이다. 내게 없는 사랑을 무슨 수로 흘려보낼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사랑을 채워주는 존재들을 꼭 찾아내자. 가족이든 반려견이든 등산이든 친구든 뭐든 좋다. 당장 그들에게 달려가 충전하는 불타는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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