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금 스페인을 여행 중이다.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가우디에 매료된 채 마드리드에 왔고, 마드리드에서 만난 플라멩코에 넋이 나간 채 이 글을 쓰고 있다. 지금까지 전혀 모르고 살던 스페인의 민속춤은 순식간에 감정을 휘몰아치게 하고는 필자의 마음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다짐 하나를 새겨 넣었다.
무대는 1~2미터 앞이었다. 늙은 두 남자의 걸걸한 노랫소리와 젊은 청년이 연주하는 애절한 기타 소리가 날 것 그대로 고막에 흘러들어온다. 무희의 표정, 춤출 때마다 옷자락에 걸려 펄럭이는 바람소리가 바로 앞에서 전해진다. 이렇게나 생생하게 애절하고도 강렬한 플라멩코를 만나 스페인의 열정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강인함이 드러날 때는 슬플 때다. 슬픔에 맞설 때 비로소 강인함이 드러난다. 소설, 연극, 음악, 춤 등 모든 극적 요소는 위기에서 시작된다. 위기가 극복되거나 실패임에도 다시 일어서리란 희망이 있어야만 이야기로 만들어지고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남긴다. 온실 속의 화초는 그의 인생만 살다 간다. 어디서도 이야기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아니, 만들 이야기가 없다. 그러니 슬픔이 찾아오면 그로 인해 강해질 나를 볼 수 있어야겠다. 고통의 시간이 빚어낼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없는 게 비극이며,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고통만 보이는 게 비극이다. 이 시간은 지나갈 것이고, 그로 인해 내 마음이 더 단단해질 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견디는 그 시간이 때때로 감미로울 수도 있다.
플라멩코는 애절한 기타 소리로 시작되었다. 기타 소리 앞에 선 무희의 미간과 손끝에 이미 슬픔이 서려 있었다. 첫 장면만으로도 그가 지금 고통과 슬픔의 시간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느리고 절제된 몸짓으로 표현된 슬픔은 힘차게 발을 구르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강렬함으로 공간을 물들인다. 이제는 슬픔에 맞서겠다는 무희의 표정과 손뼉과 발 구르는 소리로 리드미컬하게 만들어내는 소리가 심장을 두드린다. “인간에게는 맞설 힘이 있어. 인간은 나약하지 않지. 아니, 나약해서는 안돼. 그 어떤 순간에도, 그 누구에게라도 굴복당하지 않을 힘이 있기에 인간이야.” 온몸의 세포가 깨어날 때까지 무희의 춤과 발구르기는 계속된다. 이렇게나 내 심장이 잠들어 있었나, 심장이 뛰고 나서야 깨닫는다. 살만 해서 스페인씩이나 여행 온 줄 알았는데, 내 일상이 얼마나 무료했던가를 절절하게 깨닫고 말았다.
악기는 오직 기타 하나였다. 인간의 목소리와 손뼉 소리와 발 구르는 소리가 얹어져 그렇게 풍성하고도 강렬한 소리를 만들어 내다니, 드럼과 베이스 없이도 이렇게 심장을 두드릴 수 있다니, 공연하는 내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무희의 표정과 몸짓과 그녀가 만들어내는 소리에 감탄하기를 사십여분, 조명이 잠시 꺼졌다 다시 켜졌을 때 남자가 등장했다. 남자의 춤이 시작됐을 때, 무희가 춤출 때만큼의 감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클라이맥스는 지나간 건가, 싶은 순간 남자의 발구르기가 시작됐고, 무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그 힘찬 소리에 잠시 경이로움을 느꼈다. 무희가 표정과 몸짓으로 매혹시켰다면, 남자는 오로지 힘 하나로 관중을 매혹시켰다. 무대가 부서질 듯 울려 퍼지던 그 소리와 격정적인 움직임에 따라 흩뿌려지던 그 땀들을 지금 이 순간에도 잊을 수가 없다. 남자는 여자와 다른 삶을 사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찾아왔다. 힘을 겨루는 인생, 힘을 믿는 인생, 힘 앞에 굴복하는 인생. 여자인 나로서는 알 수 없었던 그들의 세상을 찰나에 느꼈던 것 같다. 연약한 여자가 슬픔에 맞선 순간 느꼈던 강인함이 힘으로 압도하는 남자의 강인함으로 점점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달았다.
플라멩코는 ‘강하게 살라’고 한 시간 동안 소리를 지르는 듯한 춤이다. 계속 그렇게 살 거냐고, 슬프다고 좌절만 할 거냐고, 한 사람에게라도 영감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될 생각은 없는 거냐고, 고고하게 살다 가는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다그치는 춤이다. 젊은 여자, 나이 든 여자, 그리고 젊은 남자가 춤을 춘다. 늙은 남자들이 노래를 부르고 젊은 남자가 기타를 친다. 스페인에서 만난 플라멩코에서 인생의 주인공이 결코 젊은이만은 아님에 위안을 얻었다. 나이 들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도 저렇게 멋있을 수 있다니. 그들이 지나온 시간 자체가 슬픔을 자아내고, 또한 지나왔기에 강인함을 느끼게 한다. 그러니까, 늙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서사다. 늙은 사람들끼리는 그게 보이고 눈빛만 봐도 통한다. 자기 삶에만 몰두해서는 안 되는 이유기도 하다. 자기 슬픔만 바라보면 매몰된다. 남의 슬픔을 보고 들으며 그들의 입을 통해 내 감정이 읽혀져야 이겨낼 힘을 얻는다. “나도 그런데 너도 그렇네. 네가 이겨냈듯 나도 이겨낼 수 있겠네.” 서로 내보이고 어루만져줘야 고통의 시간을 아름답게 통과할 수 있다. 지치는 순간이 오면 내 인생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음에 다행으로 여기자. 이 시간이 지나면 강인해져 있을 나를 떠올리며 그 무엇에라도 굴복하지 말자. 나의 인생이 누구에게라도 영감이 되도록 강렬하게 살아보자. 온실 속의 화초로 존재감 없이 살다 가기보다는 처절하도록 아름다운 이야기가 쓰여지는 삶을 살아보자.
사실은 얌전한 내게 하고 싶은 말들이다. 스페인에서 만난 가우디와 플라멩코는 굳어 있던 뇌와 심장을 깨웠다.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임에도 그들의 천재성과 강렬함은 영감을 가득 부어 주었다. 내가 인생을 끌고 가는 것 같아도 때론 인생이 날 끌고 갈 때가 있는데, 모든 감각의 문이 열리고 온갖 영감이 다 흡수되는 것 같은 이번 여행이 인생의 선물인 것 같다. 늙었다고 한계를 짓지 말고 다시 시작해보라고. 더 강인해지라고. 더 강렬하게 살 수 있다고 마음을 두드려준 인생에게 감사하다.
파랑새는 집에 있었다는 걸 집을 떠나고 나서야 알 수 있듯이 내가 행복한 사람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는 떠남의 기회가 여러분에게 찾아왔으면 좋겠다. 어떤 강렬한 깨달음이 여러분의 어떤 시간에 찾아올지 알 수 없으나 때에 맞게 가장 좋은 것이 여러분에게 찾아오길 바라며 11월의 유플에세이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