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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플리트 Dec 30. 2022

날 매혹시킨 사람들

일에 푹 빠져 살 때가 있었다. 노는 것도 연애도 일을 이기지 못했다. 거창하거나 어마어마한 성취가 있는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렇게 푹 빠져 지냈는데 뭐, 별 거 없다. 일을 다 마무리하기엔 하루가 너무 짧았고, 어둑할 때 출근해 어둑할 때 퇴근하는 게 대수롭지 않았으며, 친구들과의 약속을 펑크 내고 빨간 날에 일하러 가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단 뜻이다. 체력도 받쳐주는 때였으니 힘들기는커녕 일이 세상의 전부인 사람처럼 살았다.

아마도 토요일에 근무했거나 밤샘 근무를 해서 오후에 퇴근했을 때였나 보다. 가로수를 가득 채운 노란 은행잎을 보고 깜짝 놀랐다. “벌써 가을이라고??” 출퇴근 시간이 평균 1시간 40분을 훌쩍 넘는 인천시민일 때라 새벽에 나가 밤에, 새벽에 나가 새벽에 퇴근했으니, 그리고 쉬는 날엔 집에서 잠만 잤으니 나뭇잎 색이 울긋불긋 물드는 줄도 몰랐던 거다. 하루아침에 계절이 바뀌어 있던 생경한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의 충격이 뭔가를 바꿔놓진 못했다. 그 후로도 일만 있는 사람처럼 살았다. 시간이 가는 게 그다지 아깝지 않은 젊은이어서, 혹은 감수성과 감각이 한참이나 무딘 사람이어서 그랬나 보다. 그때는 계절이 바뀌는 것도 12월 31일, 1월 1일도 큰 의미가 없었다.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란 말이 지긋지긋한 저주가 아니라 생산적이고도 즐거운 나날의 연속을 뜻하는 말로 받아들여지는 때였다.


2022년 12월 31일을 하루 앞둔 오늘, 시덥지 않은 말들로 글을 열었는데 마치 프러포즈를 앞둔 사랑꾼이 말이 꼬여 횡설수설한 느낌으로 읽히는가? 그렇다면 제대로 파악했다! “벌써 가을이라고?” 했던 날부터 열 손가락을 두 번 꼽아야만 셀 수 있는 나이가 되었는데 지금은 한 계절 한 계절, 한 해 한 해를 금쪽같이 여기게 되었으며, 그동안 봉해 놓은 감수성을 반포대교 분수처럼 여기저기 아스라이 흩뿌리는 사람이 되었다. 정리하자면 유플리더에게 한 해의 마지막 글을 어떻게 써서 이 애정을 전해야 할지 전전긍긍할 줄 아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제 잘난 맛에 살던 풋풋한 젊은이가 이리저리 고꾸라진 후에야 세상 이치를 깨닫고 ‘함께’의 미덕을 부르짖는 사람이 되었달까? 그렇게 겨우겨우 사회성을 한 스푼 가미한 intj형 인간 에밀리가 뭐라도 전하고 싶어 서두를 정신없이 열었다. 오늘은 유익한 글을 써야겠단 마음보다 이 마음을 기필코 전하리라는 마음으로 공적 공간을 사적 욕심으로 채우련다.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내 마음을 꺼내 보여주면 쉬울 것을 그럴 수 없어 답답한 이 마음.


마지막 유플에세이를 통해 전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오랫동안 생각해 왔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전문용어로는 회복탄력성이라고 한다. 두껍디 두꺼운 성경책을 쥐어짜 단 하나의 단어로 요약하자면 사랑이라던데, 필자가 한 때 몸담았던 유플리트를 향해 갖는 여러 마음을 단 하나의 단어로 요약하자면 바로 이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여러분들이 느끼셨는지 모르겠지만 유플리트는 회사를 다닐 때도 필자를 매료시켰고, 한 걸음 뒤에서 응원하는 지금도 매료시킨다. 여러 글이나 인터뷰를 통해서 이런 마음이 드러났을 것 같다.

유플리트는 참 이상한 회사다. 필자가 근무하던 시절에도, 그 이후에도 유플리트는 바람 잘 날이 없었던 것으로 안다. 한낱 직원이었기에 입체적으로 보기엔 부족했을 수 있겠지만 유플리트가 편한 날은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왜 매료되었을까? 이유를 생각해 보니, 지금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표현되는 그 마음이 유플리트에 항상 있었던 것 같다. 필자는 그 희망이 좋았고 그 외침이 좋았다. 좋은 정도가 아니라 참 좋았다.


회복탄력성에 대한 여러 정의가 있지만 마음의 근력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듯하다. 살다 보면 크던 작던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유독 잘 이겨내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의 근육이 탄탄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2015년 중앙일보에서 보도한 “학문 분야별 최다 인용 저〮역서 랭킹” 사회과학 부문에서 2위를 차지한 김주환의 『회복탄력성, 시련을 행운으로 바꾸는 마음 근력의 힘』 책에서 필자가 밑줄 그은 내용을 먼저 적어보겠다.


강력한 회복탄력성의 기반이 되는 진정한 행복감은 나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긍정적 태도에서 오는 것이지 외부적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결단을 통해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 관계가 건강한 사람이다."

행복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행복하기로 결단하는 거야,라는 메시지가 이 책에서도 나온다.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은 상황을 탓하기보다 받아들인다는 게 다양한 통계에서 일관적으로 드러난다. 회복탄력성의 정체를 더 잘 알 수 있는 문장이 있어 공유해 보겠다.


회복탄력성을 약화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부정적 정서는 두려움이다. 두려움에서 좌절감이 나오고 좌절감에서 분노가 싹튼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행복의 조건이라고 굳게 믿는 것을 얻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며, 다른 하나는 이미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을 혹시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한다고 한다. 작가의 말 그대로를 마저 옮겨본다.


‘이러한 두려움을 근본적으로 없애기 위해서는 내가 얻고자 하는 성공이나 성취가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야만 한다. 나의 행복은 나의 내면적 결단에서 오늘 것임을 깨달아서 어떠한 실패나 역경도 나를 불행하게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나의 삶이 어떻게 전개되든, 나에게 어떠한 삶의 조건이 주어지든 늘 만족할 수 있다는 오유지족의 상태가 되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어지고 따라서 두려움도 사라진다. 두려움이 사라지면 당연히 적극적 도전성이 생긴다. 이것이 회복탄력성이다. 실패에 대한 어떠한 두려움도 없는 상태가 곧 회복탄력성을 지닌 상태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상태. 우와! 너무 멋진 태도다!! 이런 사람을 몇 명 만났었는데, 정말로 그랬다. 완벽주의자인 필자의 눈엔 무모해 보이고 무질서해 보여도 그들은 도전을 했고, 분명 실패할 줄 알았는데 해낸 사람들이 있었다. 크게 성공하지 않을 바에야 도전 자체를 안 하는 필자에게 소소한 도전과 소소한 성취를 쌓아가는 그들이 깨우침을 주곤 했다. 다행히 그런 사람과 함께 살아서 ‘실패하면 뭐 어때, 그냥 해보는 거지.’란 가벼운 마음이 ‘뭐든 해내야 한다.’는 무거운 마음을 이긴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이 역시 아빠를 닮아서 여기저기 뽈뽈뽈뽈 다니며 크고 작은 실패와 성공을 쌓아가고 있으며, 그 실패와 성공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하루를 재밌게 채우며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아이로 자라고 있다. 두 사람이 없었으면 필자는 평생 두려움에 벌벌 떨며 어쩌다 주어진 소소한 만족감이 세상 전부인양 알고 살았을 것이다.

회사(특히나 에이전시)에 다니면 날마다 마주치는 문제들 앞에서 우왕좌왕할 때가 있다. 변수도 많고 이해관계도 많고 헤아려야 할 마음들도 많아서 딱히 정답이라는 게 없이 선택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새가슴들에겐 너무나 가혹한 전쟁터요, 심판대이다. 이 업이야말로 실패와 문제, 문제와 실패가 반복되는 과정 중에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하는 사람들이 버틸 수 있는 거 아닌가 싶다. 닳고 닳아서 아무것도 못 느껴요,라는 사람도 있지만 그럴 수 있지,라는 사람도 있다. 살면서 회복탄력성을 획득하거나 다행히도 탑재한 채 태어난 사람들이다.

회복탄력성 책 표지의 이미지를 따왔어요. 저작권법에 걸리진 않겠죠?!


인상 깊은 연구 결과가 있더라.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점을 알기 위해 실수에 대한 민감도를 실험했는데, 이외로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이 실수를 빠르고 민감하게 인지했다. 실험내용은 간략히 정리하자면, 컴퓨터 모니터에 영어 알파벳 M, 혹은 W가 0.1초 동안 제시된다. 실험자는 최대한 빨리 M이 나오면 오른쪽 버튼을, W가 나오면 왼쪽 버튼을 눌러야 한다. 특정 알파벳을 80% 비율로 노출시켜 익숙하게 만든 후 간간히 반대 알파벳을 노출시켜 실수를 유도함으로써 실험을 진행했다. 뇌파 신호를 분석한 결과, 회복 탄력성이 낮은 사람들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응답했고, 따라서 실수를 덜했다. 반면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들은 훨씬 더 빠르게 응답했고 따라서 실수율도 높았다. 결과를 종합해보면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들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스스로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뇌를 지닌 사람들이다. 설령 실수를 범한다 해도 실수로부터의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습관이 들어 있는 뇌를 지닌 사람들이다. 회복탄력성이 낮은 사람들은 정답률이 무려 73%나 되었지만, 이는 실수를 두려워하는 소심한 사람일수록 회복탄력성이 낮으며 자신의 실수, 혹은 역경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대단히 높다고 평가하고 있다. 아이고, 필자는 정답률을 높여야 한다는 강박증을 가졌고, 실수할 땐 엄청 자학했으며, 그래서 얼마나 그러한 상황을 피하려 노력했던가. 지난날의 세월을 콕콕 찌르는 실험이었다.


책에는 역경을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소개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역경에도 ‘불구하고’ 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역경 ‘덕분에’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역경을 딛고 일어나는 사람들을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들(R집단 : resilient group)이라 하고, 이와는 반대로 역경을 만나 맥없이 무너지고 굴복하는 사람들을 깨지기 쉬운 사람들(F집단 : Fragile group)이라 부른다. 전체 인구 중에서 R집단과 F집단의 비율은 대략 1:2 정도라고 한다. 당신은 어느 그룹에 속해 있는가? 책임감이 많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소심쟁이였을 뿐임을 깨달은 필자는 F그룹임이 명백해졌다. 내가 ‘역경을 만나 맥없이 무너지고 굴복하는 사람’이라니. 이거 원 자존심 상해서 살 수가 있나! 내 자존심을 붙잡고… 가 아니라 회복탄력성에 대한 희망을 갖고 일어서리라!!  

F집단에 속한 사람도 노력과 훈련을 통해 R집단으로 옮겨갈 수 있으며, R집단에 속한 사람 역시 회복탄력성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연구가 입증한다고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과 훈련에 대한 답은 얻었다. ‘실패하면 어때?’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고 하니,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이 험한 세상에 잽을 날리며 살아보자.


아이를 키우다 보니 바라는 게 몇 가지 생기는데, 필자가 바랐던 건 ‘어차피 살면서 힘들고 괴로운 상황을 만나지 않을 수 없다. 주저앉기보다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였다. 알고 보니 회복탄력성이다. 필자가 2022년에 다시 유플리더들을 만나면서 늘 이런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얼마나 힘들까. 부디 이겨내야 할 텐데.’ 돌아보니 끙끙 앓은 것이 무색하게도 일에는 늘 마침표가 있었고, 생각처럼 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결국 봉합이 되었고 아무렇지 않게 시간은 똑딱똑딱 같은 속도로 흘렀다. 나에게만 요란한 세상이었지, 세상은 그저 흐른다. 염세주의적 발언이 아니다. 너른 운동장에서 맘껏 뛰놀수록 승자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2010년의 윈디님, 초상권을 주장하지 않으시리라 믿어요 ^_____________^

오랜만에 유플리트 블로그에 들러 지난날들을 추억해 보았다. 블로그에 남겨진 찬란한 역사를 회고할수록 회복탄력성이 어마무시한 회사임이 드러난다. 힘들수록 힘을 냈더라. 필자의 시선이 편파적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블로그에는 즐거운 한 때들이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미래에 추억할 현재를 보내고 있을 유플리더들에게 2022년의 마지막 응원을 보내본다.

“그저 유플리더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당신을 존중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더군요. 이 회사가 참 좋고, 회사의 사람들도 참 좋아요.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유플리트에서 오래오래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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