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플 제이
극한의 P, 즉흥적인 나와 정반대인 극한의 계획파 J. 나와 동거중인 내 룸메이트의 MBTI는 ENFJ다. 같은 MBTI로는 버락 오바마가 있는데, 그러니까 나는 단발머리에 동양인인 버락 오바마와 함께 산다는 이야기다. ㅇ.ㅇ?
오늘 글을 쓴 이유는 어쩌다 늦은 전화 약속에 대한 이야기다. 내 친구는 알람을 100개 정도 갖고 있는 것 같은데(오버한 것 맞다.) 모두 시간약속을 어기지 않기 위해 설정해둔 것이다. 그런데 아뿔싸. 오늘 계획되었던 일정 중 하나가 틀어지고 말았다. 친구는 본인 책임이라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시간약속은 신뢰야. 내가 그러면 안됐어.
아, 안그럴 수 있던 건데 이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야.
아 정말 나는 ㅇㅇㅇ이 문젠데 이 문제좀 고쳐야겠어.
하... 진짜... 에휴...
깊은 자기성찰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항암중이라 차가운 바람이 스치면 안되는 친구는 에어컨을 쐬고 있는 나를 피해 거실에서 반성의 주문과 함께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쉬고 있었다. 방 안에서 발을 까딱이며 책을 읽고 있는 나는 속 좋게 이런 말을 떠들었다.
연락은 드렸어? 따로 대답은 안하셔?
너도 싫어하는 행동을 너가 하게돼서 속상하구나?
일단 늦었으니까 너무 많은 알람 안뜨게 내일 다시 연락드려.
그리고 이제 이미 지나서 어쩔 수 없으니 너무 자책하지마.
어차피 시간은 그때로 돌아가지 않지!
넌 가끔 보면 같은 잘못에도 남들에 비해
자책이 4~5배는 되는 것 같아.
난 나름의 위로를 하고 싶었는데 쓰고 보니 진짜 얄미웠겠다 싶다. 왜냐면 이 모든 말에는 웃음기가 서려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내 말투를 그대로 적자면 이렇다.
아이고~~ ㅎㅎㅎ 어차피 그렇게 말해도 시간은 안돌아가!
어쩔수 없어~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어~~
본인이 극한의 J. 남이 본인에게도, 본인이 남에게도 시간약속을 지키지 않는 걸 정말 싫어하는 룸메. 그녀가 자신의 문제를 너무 심각하게 분석하며 자아성찰로 지구 내핵까지 땅굴을 파고 들어갈까 걱정이 되어 문제를 가볍게 보자는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가벼워진 건 내 말투 뿐이었다. 참, 말이 어렵다. 내가 하고 싶은 건 진중한 말투에 룸메의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이었는데. 진짜 웃긴건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가는데 나는 이 얄미운 짓거리를 친히 거실까지 행차하여 다시 한번 반복하였다. 이번엔 얼굴을 보고.
에그! 계속 그래봤자 시간 안돌아가.
괜찮아. 내일 다시 말하면 돼~ 너무 그러지 마.
사실 나도 안다.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그냥 지금 당장 드는 후회의 생각을 그저 말로 튀어나오게 한 것이란 걸.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생각이 된다는 걸. 웃기게도 같은 상황을 부딪히면 나도 의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표현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속마음은 같다. 만약 나라면 겉으로는 "아.. 어쩌지? 에이 어쩔 수 없지!"라고 말은 해놓고 잘못했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며 뜬눈으로 지새우고 내일 적절한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바로 사과의 말을 전했을 것이다.
가만히 글을 적어보니, "이 부분은 명확하게 내가 잘못한 거야. 그러면 안됐어."라고 말하는 룸메가 대단해보인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는 걸 꺼려하고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자마자 본인의 잘못을 성찰할 수 있다는 건 어떻게 보면 큰 능력이기도 하다.
룸메는 이런 능력덕분인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갖고 있다. 오랜 친구와 함께 일을 할 때 내가 첫번째로 배운 것이었다. 특히 비즈니스 관계에서는 시간 약속을 엄수할 것. 그리고 잘못이 있다면 빠르게 시인할 것. 덕분에 까다로운 사수에게 좋은 비즈니스 매너를 배웠다.
이제 까다로운 사수와 유튜브를 찍으러 가야겠다. 12시 30분에 촬영을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6분이 늦었다. 혼날지도 모른다. P 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