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이 가까운 나이에도 100년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삼대의 이야기를 쓰신 작가가 위대하게만 보였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19차례나 집필실을 옮겨 다니며 하루 8~10시간 정도의 시간 동안 꼬박 글을 쓰셨다고 하니 그 세월이 느껴저서 오히려 내 몸이 무거워지는 듯 했다.
이제는 기운이 달려 기억력도 떨어지고 등장인물의 이름들도 헷갈려 쓰는 동안 바뀌어 고생했다고 하는 인터뷰에서도 그간의 노고가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진 그분의 작가에 대한 표현에 나는 한동안 먹먹함을 느꼈다.
"작가는 은퇴기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죽을 때까지 써야 한다. 그게 작가의 채무"
"기운이 남아있을 때까지 써야 하는데 마구 쓰는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새로운 정신을 갖고 새로운 작품을 써야 한다"
이래서 글쓰겠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있을까. 죽을 때까지 정신이 또렷해야 하고, 글을 쓸 수 있을 근력과 시력이 받쳐줘야 하고, 앉아있을 힘이 있어야 하고...
작가의 밤은 유난히 길다, 유난히 깜깜하고 유난히 차다. 혼자 허우적거리는 시간을 만겹을 쌓아야 겨우 몇 겹의 글을 써낼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은퇴기간이 없이 죽을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서 새로운 정신으로 새로운 작품을 창조해내기란, 어쩌면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일 듯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인생이 좋고, 글이 좋아서 글 쓰며 살기로 작정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를 포함해서 얼마나 많은가.
나 하나 제대로 된 작가가 되기도 힘든데, 3대가 모두 작가인 한 집안이 위대하게 보인다.
황순원-황동규-황시내 작가로 이어지는 작가 3대 집안, 작품만큼 유명한 이름, 작가의 이름 석자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작품으로 느껴지는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서 그에 한참 미치지도 못하는 나의 글이 볼수록 '대놓고' 부끄러워진다. 그리고 나 혼자 얼굴이 후끈거리는 마음에 슬며시 썼던 글을 지우게 된다.
글은 이처럼 사람을 스스로 발치까지 내려가게 만드는 무거운 자기성찰 프레임을 분명히 갖고 있다.
글 앞에서 오금이 저리고 고개도 제대로 못 들게 만드는 상황, 처음 방송작가가 되었을 때 20년 연차의 선배 앞에서 그랬고, 작가보다 더 글을 잘 쓰는 기자와 아나운서 앞에서도 그랬고, 작가 때려치우고 가방 장사나 하라는 피디 앞에서도 그랬다.
나는 그 순간 땅 밑으로 꺼지거나 땅 위로 솟아버리고 싶을 만큼 초라해짐을 느꼈다. 그때 느꼈던 해도 안될 것 같은 불안함과 자신 없음은 정말 내가 어딘가로 떠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었다. 어쩌면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다른 길을 선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책을 통해 위로를 받았다. 인간의 나약함은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갖고 있고 충분히 겪게 되는 아킬레스 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유선경 작가의 <아주 오래된 말들의 위로>에 보면 2007년에 출간된 황시내 작가의 에세이를 소개하며 그녀에 집안에 대해서 이렇게 짤막히 전하고 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황순원, 아버지는 황동규. 아버지는 원래 소설가를 지망했으나 할아버지를 극복할 수 없어 시를 선택했고, 그녀는 시인 아버지를 극복할 수 없어 산문을 쓴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황순원, 아버지는 황동규. 아무리 기를 쓰고 날개를 달아도 넘어설 수 없는 이름이 아니었을까. 굳이 넘어설 것도 없이 어디에 기대지않고 두 발로 온전히 서있기나 해도 대단한 것 같은데... 시인 아버지를 극복할 수 없어서 산문을 쓴다는 황시내 작가의 책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이 있다.
그녀는 일상의 아주 사소한 순간을 꽃처럼 피워내는 재주를 가졌다.
마치 눌러진 꽃잎이 다시 생기 있게 살아나 나를 사로잡는 향기를 내뿜는 듯이.
책장을 정리하며 우연히 책 사이에서 떨어져내린 잘 말려진 꽃 하나를 주워 들며 그녀는 13년 전의 교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메말라버린 마음에 향기를 불어넣듯 내게도 서너 송이 꽃다발을 함께 내미는 듯했다. 그녀가 보았을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과 찬란한 5월의 햇살도 마치 내가 그녀의 기억을 공유한 듯 함께 떠올랐다. 글은 그렇게 내 마음속에 들어와 나의 기억을 다시 일깨운다. 그리고 그녀는 툭 던지듯 이렇게 말한다.
"나의 책장 속에는 얼마나 많은 눌려진 꽃잎들이 우연인 듯 한 번쯤 펼쳐지기를 기대하고 있을까. 그리고 나의 기억 속에는 또 얼마나 많은 잊힌 시간들이 지나가듯 한 번쯤 떠올려지기를 기다리고 있으려나." (305p)
황시내 작가가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재주를 지녔듯이, 노년의 황석영 작가 역시 그렇다. (새삼 놀라울것도 없이)
평범하고 어디에 있는지 눈길도 안 가는 굴뚝을 보며 황석영 작가는 소설의 장치를 떠올렸다. 흔한 일상에서 작가는 보석을 주워 올려서 글을 쓴다. 그렇게 짜인 글은 어디 하나 빈틈이 없이 견고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소설가를 흠모하게 되고, 좋아하는 소설가가 쓴 작품은 보석보다 빛난다.
그래서 자꾸만 책을 보게 된다. 책이 아니고서 이렇게 영혼까지 채워주고 만족하게 하는 것을 만난 적이 없기에.
인생은 책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내 삶에서 누군가의 삶으로 들어가게 하는 굴뚝이 되어주기도 한다. 마치 황석영 작가가 굴뚝을 모티브로 소설을 펴낸 듯이. 우리 삶의 굴뚝은 무수히 많은 순간, 책이 된다.
"굴뚝이 재미있잖아요. 지상도 아니고 하늘도 아니고 중간 지점이에요. 일상이 멈춰있으니 상상력으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이를 통해 3대 이야기를 4대째 후손이 들락날락 회상하는 식으로 소설을 구성했습니다." (연합뉴스 2020.6.2)
할아버지 처럼, 손녀인 황시내 작가 또한 글을 통해서 그녀의 굴뚝 가득히 삶의 연기를 피워올리는 작가이다.
"세상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어. 죽을 때가 되었을 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 그리고 전혀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 나는 후자야. 만일 내가 죽음을 선고받는다면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로 향하겠어."- <황금물고기, 98p> 중에서.
나는 죽을 때가 되면 내가 평소 글쓰고 책읽던 곳에서 가만히 자는 듯이 꿈에 들고싶다.
그것이 꿈의 어느 한 페이지인 듯 여겨지도록. 꿈에서도 책을 쓰고 글을 보면서 종이를 어루만지고 글을 매만지며 눈감고 싶다. 내일 또 깨어날 것처럼...
이윤주 작가는 그의 저서 <나를 견디는 시간>에서 좋은 책의 기준을 이렇게 설명했다.
"실연에 쓸 에너지를 줄여서, 난방 못하는 집에 갖다 붓도록 하는 것이 좋은 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공감은 양이 아니라 넓이로 하는 것일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나를 넓히는 책을 읽는 데는 필연적으로 품이 든다. 그런 책은 '어머, 딱 내 얘기!'라고 호들갑 떨 기쁨을 주지 않는다. 그런 책은 절대로 '나'의 소중한 상처에 맞장구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책은 말한다. 너의 상처는 너에게나 성역이라고."
글의 성역으로 다가가는 일, 분명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보다 더한 것은 물러서지 않는 힘인 듯도 하다.
나는 오늘도 부끄러워 덮고 싶은 글을 꺼내어 햇볕에 말린다.
말린 꽃처럼 오래 남아 누군가에게 가닿을 그날까지 계속 쓰는 것이 내가 바라는, 내가 가보고 싶은 인생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