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자두의 노래 중에 <대화가 필요해>라는 노래가 있다.
또 왜 그러는데 뭐가 못 마땅한데
할 말 있으면 터 놓고 말해봐
너 많이 변했어 내가 뭘 어쨌는데
첨엔 안 그랬는데 첨에 어땠었는데
요샌 내가 하는 말투랑
화장과 머리 옷 입는 것까지
다 짜증 나나 봐 그건 네 생각이야
우리 서로 사랑한지도 어느덧 10개월
매일 보는 얼굴 싫증도 나겠지
나도 너처럼 나 좋다는 사람 많이 줄 섰어
간다는 사람 잡지 않아 어디한번 잘해봐
근데 그놈의 정이 뭔지 내 뜻대로 안 돼
맘은 끝인데 몸이 따르지 않아
아마 이런게 사랑인가봐 널 사랑하나봐
지금부터 내 말 들어봐
넌 집착이 심해 그건 집착이 아냐
나를 너무너무 구속해 그럼 너도 나를 구속해
우리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마치 와이프처럼 모든걸 간섭해
너의 관심 끌고 싶어서
내 정든 긴 머리 짧게 치고서 웨이브 줬더니
한심스러운 너의 목소리 나이 들어 보여
난 너의 긴 머리 때문에 너를 좋아했는데
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전화를 걸어
날 사랑하냐고 물어봤더니
귀찮은 듯한 너의 목소리 나 지금 바빠
듣고 보니 내가 너무 미안해
대화가 필요해 이럴 바엔 우리 헤어져
내가 너를 너무 몰랐어 그런 말로 넘어가지마
항상 내 곁에 있어서
너의 소중함과 고마움까지도 다 잊고 살았어
대화가 필요해 우린 대화가 부족해
서로 사랑하면서도
사소한 오해 맘에 없는 말들로 서로 힘들게 해
너를 너무 사랑해 대화가 필요해
결혼하고 살면서 알게 된 것은, 이 노래가 그렇게 명곡인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는 사실이다. 재미있는 노래 가사와 가수의 명랑한 모습, 남다른 발성에 그저 흥얼거리기 좋았던 노래였다.
한 시절 이 노래가 유행했을 때 들을 때마다 즐거웠고, 대화라는 건 그저 노래처럼 그렇게 즐겁게 흘러갈 수 있는, 내가 어떤 순간에도 감당할 수 있는 건 줄 알았다. 나는 대화를 좋아했고 대화하는 것이 무섭지 않았다.
누구와 대화해도 거리낌이 없었고, 대화를 통해 알아지는 것들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런데 웬걸?
'결혼체험 삶의 현장'에서 막상 ‘대화’란, 나보다 몇 배는 무거운 짐을 이고 전력질주해야 하는 데다, 결국엔 결코 도달할 수도 없는 목적지 같이 느껴졌다. 막막...암담...참담...포기...낙심...무반응, 무시도, 무관심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한 계단 한 계단 대화의 계단을 오르며 느꼈던 절망은 날이 갈수록 일찍 '포기'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교훈을 얻게 했다.
대화란 마주 보고 하는 것,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것, 서로가 하고자 하는 말을 번갈아 하는 것, 그러면 되는 것 아닌가? ‘서로 듣지 않아 문제야, 내 얘기만 해서 문제야, 자기주장이 너무 강해서 상대가 힘들 수 있어’. 그 정도의 상식이 대화 때 내가 알아야 할 최선의 기준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살면서 겪어보니 내가 하는 대화는 내가 능히 끌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꽁무니를 붙들고 겨우겨우 따라오는 아기의 걸음마 같았다.
앞으로 가자고 해도 뒤에서 잡아끌고, 좌로 가면 우로 가고 싶다, 우로 가면 좌로 가고 싶다, 가다 보면 이 길이 아닌가 보다 싶은 것.
실컷 오르고 올랐더니 결국 이 산이 아닌가 보다 하고 깨달아지는 것.
대화의 방향이 틀려지니, 내가 지금 어디에 서있는 것인지도 헷갈렸다. 내가 누군지조차.
지금까지 제대로 오긴 온 건지, 가고 있긴 한 건지, 아니면 같은 자리를 맴돈 것인지도 도대체 알 수가 없는, 빠져나갈 수 없는 큐브 속에 갇힌 기분.
그건 음계에서 도돌이표 같은 거였다.
도돌이표를 잘 읽을 수 있어야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 수 있지만, 반대로 아무리 좋은 곡이라도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게도 만드는 것.
도돌이표는 돌아가서 한 번 더 연주하라는 의미이지만, ‘대화’에서는 ‘돌아가서 한 번 더 들어라, 기다려라, 되물어라’는 의미인 것 같다.
스텐 나돌니의 <느림의 발견 2>에 보면 이런 글이 있다.
“인디언들이 더 이상 못 가겠다고 나섰다. 영혼이 아직 따라오지 못했으므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려갈 때 가끔씩 말에서 내려 뒤를 돌아본다고 한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잘 따라오고 있나 확인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영혼이 곁에 왔다 싶으면 그제야 다시 달리기를 시작한다.
괜한 말 한 것 같구나,
괜한 걸음을 한 것 같아,
괜한 소리를 들었네
괜한 일을 했네...
괜한 관심을 갖지 마...
여기서 ‘괜한’의 ‘괜하다’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daum 사전 참조)
1. 말이나 글 또는 어떠한 행동으로 나타내는 내용
2. 무엇을 바라거나 이루겠다고 속으로 품고 있는 마음
3. 어떠한 일이나 행동을 하는 가치나 중요성
하나 더하자면, 괜히 결혼했다는 생각도 했었다.
(미안하게도, 아이들을 떠올리기 전 까지는)
힘든 상대 – 특히 말 안 통하는 부부간의 대화에서는 더욱 – 한번씩, 아니 수시로 뒤를 돌아봐야 할 것 같다.
남편이건 아내 건, 어느 한 사람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내 할 말만 하며 앞만 보고 달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하객들 앞에 나란히 함께 섰던 그 마음으로, 나란히 귀 기울여 듣고 말해야 하는 관계.
내 영혼 조차 나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멘붕의 순간이 펼쳐질 때마다, 내 영혼과 네 영혼을 부디 확인할 수 있기를. 대화가 통하지 않아서 힘든 부부가 얼마나 많은지, 이혼할 것 아니면 대화의 기본부터 잘 세우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내가 이혼하고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대화가 참 힘들었었기에.
예전에 지인에게 들은 말이 있다. 지인의 부모님이 나눈 대화...
"여보, 거시기가 어디있지?"
"거시기? 거기 거시기 안에 보면 거시기 속에 있어요."
"아, 거기!"
<통역>
"여보,내 주민등록증이 어디있지?
"주민등록증? 거기 옷장 안에 당신 양복주머니 안에 지갑 열어보면, 그 안에 있어요."
"아, 거기!"
옆에 있는 애들은 못알아들어도, 부부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관계.
이렇게 '거시기'만으로도 통하는 관계.
참 거시기한 관계.
대화가 많은 것들을 이룰 수도, 잃을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