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전교생 미술 사생대회가 있어서 어느 공원으로 갔었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김밥이나 간식들을 자유롭게 먹으면서 정해진 시간 안에 풍경화 한 작품을 제출하면 되는 것이어서 나도 부담 없이 즐겁게 그렸었다. 특별히 그날을 기억하는 이유는 나는 그림에 소질이 없어 미술 대회는커녕 미술학원에도 가본 적이 없으나, 그날의 그 자유로움과 나를 둘러싼 풍경이 너무 즐겁고 행복했었다. 그래서 아마도, 그런 마음이 내 그림에도 반영이 되었던 걸까.
얼마 후 출품작에 대한 심사가 끝나자, 내 작품이 교내 전시공간에 걸렸다. 게시판에 한 번 작품이 전시되면 짧게는 한 달에서 두 달까지 그대로 전시되기 때문에 아침 등하굣길에 계단을 오르면서 그림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내 그림 아래에는 내 이름과 학년, 반 번호가 적혀있는 이름표가 붙었고, 친구들은 내 작품이 걸렸다며 축하해주었다. 많고 많은 그림들 중에 내 그림이 전교생이 다 지나다니는 길 옆 게시판에 전시가 되어있다니, 나는 새삼 감동했고 그림 그리는 일이 참 즐겁고 ‘행복을 주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불과 며칠 지나서 내 작품이 걸려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아이의 작품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가만히 보니 내 작품뿐만 아니라 함께 걸려있던 아이들의 작품도 다 바뀌어있었다. 훨씬 잘 그리고 보기 좋은, 누가 봐도 입이 떡 벌어지게 생긴 미술전공 지망생들의 작품이 걸려있었던 것이다. 이유는 그다음 날 알게 되었다. 주말에 장학사님들이 오신다고 해서 기존 작품들은 다 내리고, 실력이 좋은 아이들의 작품을 선별하여 다시 붙여놓은 것이었다.
장학사님이 오시는 날, 나는 또 한 번의 큰 충격을 받았다.
교내 동아리에서 내가 속해있던 ‘펜글씨부’에도 내 작품을 코팅까지 해서 선생님께서 전시하시겠다고 했는데 내 작품은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고, 당시 학교에서 글씨 꽤나 쓴다 하는 아이들의 작품이 새로이 올라와있었다. 심지어 그 작품들은 ‘펜글씨부’ 동아리에 속해있지도 않은 아이들이 쓴 것이었기에 나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장학사님들께 보이기 위한 전시였던 것이다.
그림으로 오른뺨 맞고, 펜글씨로 왼쪽 뺨 맞은 기분이었다.
그림 하나를 그리기 위해 내가 얼마나 정성을 쏟았었는지,
펜글씨 작품을 위해 내가 얼마나 시간과 정성을 쏟으며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었는지... 그렇게 만들어지는 작품을 보면서 나는 얼마나 뿌듯하고 감격했었는지... 그 시간들이 떠올랐고 그랬을 어느 학생의 마음을 ‘짐작은 하셨을까’ 생각하며 선생님들을 향해 미움과 원망도 솟아났다.
그 뒤로 나는 그림에도 흥미를 잃었고, 글씨 쓰는데도 흥미를 잃었다. 더불어 학교생활에도 재미를 잃었고 뭔가를 특별히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지를 잃었다. 선생님들께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그저 학교생활은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견디는 것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제 갓 중학생이 된 여린 여자아이가 겪었던 안타까운 사건이었으나, 다시 마음을 먹어보면, 이제는 내가 감당하고 책임져야 할 옛날 사건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내가 그림에 흥미를 잃은 이유를 탓할 순 없고, 펜글씨에 식어버린 내 계기를 곱씹으며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대신 나에게는 다른 즐거움이 있다. 내가 쓴 글에는 나만의 필체가 있고, 내 에세이는 나만이 쓸 수 있으며 다른 작가의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내가 책을 낸다면 책에는 내 이름이 새겨지고 오롯이 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어른’이 되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그런 행동’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성숙하고 배려심 있는 행동, 상대방을 생각하고 마음을 헤아리는 성의, 옳지 않은 일은 시작하지 않는 판단과 용기, 혹여 실수했다면 사과하고 책임지는 도의와 성실. 나는 그런 마음을 되뇌며 살아가려 한다.
남을 원망하고 탓을 하기에는 그렇게 보내는 시간이 오히려 내게 득이 될 것도, 덕이 될 것도 없다는 것이 알아졌다. 어느 순간, 나는 그런 하나하나의 과거로부터 벗어나면서 지금의 내가 되어왔다.
곱씹어 생각해봐도, 후회는 언제든 그다지 득 될 게 없다.
원망하지 않기
곱씹어 생각하지 않기
탓하지 않기
과거에 머무르지않기
앞으로의 더 나은 방향을 생각하기
나에 대한 것은 내가 책임지기.
그것이 후회를 남기지 않는 나만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