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년 만의 더위라고 했다. 전국엔 폭염특보가 내려졌고, 지역에 따라 휴교하는 학교도 있었다. 한 청소부는 일하다가 열사병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기도 했다. 전례 없는 더위에 모두가 사무실과 학교, 그리고 집에 꼭꼭 숨어 있었다. 때문에 서울 시내 한복판은 명절이라 해도 될 만큼 한산했다.
“오늘이 130년 만의 더위라는 거 아세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꼭 이런 날 외근이 있더라고요. 오늘 폭염특보래요.”
지은은 ‘헉헉’거리며 따라오는 박 팀장을 돌아보았다. 그의 누렇게 바랜 와이셔츠는 땀에 흠뻑 젖어있었고, 반쯤 벗어진 머리에선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박 팀장은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지은에게 물었다.
“김 대리, 도착하려면 멀었어? 아직이야?”
박 팀장의 재촉에 지은은 스마트폰 지도 앱을 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실 지은의 모습도 박 팀장과 다를 바 없었다. 옆으로 넘겨내린 긴 앞머리는 땀으로 떡져있었고, 입가의 팔자 주름은 땀과 파우더가 엉켜 곡선을 이루었다. 또, 두 다리는 오랜만에 신은 하이힐 덕에 걸을 때마다 바들 댔다.
“여기예요. 다 왔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민국 3대 기업 중 하나인 만월 그룹 본사가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 지하철역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대표가 자기 아들한테 회사 차만 안 빌려줬어도 편하게 오는 건데! 더워 미치겠네.’
예정에 없던 지하철 나들이와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더위에 지은의 짜증은 식을 줄 몰랐다. 하지만 어찌하랴. 아주 중요한 미팅, 그것도 만월 그룹과의 첫 미팅에 안 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은은 속으로 구시렁대며, 건물 계단을 오르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미팅 전, 꼭 알아야 할 게 있었기 때문이다.
“팀장님,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가서요. 이 프로젝트는 곽 대리님이 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전 제안서에 이름만 올라가기로 했던 거였잖아요. 도대체 왜 제가 담당자가 된 거예요? 곽 대리님은 어디 가시고요?”
박 팀장은 귀찮은 듯 말을 ‘툭’ 내뱉었다.
“곽 대리는 해외 프로젝트 건으로 옮겼어. 그 친구 정도 되면 더 큰 일을 맡아야지. 이 정도 일은 너랑 나랑 둘만으로도 충분해. 아, 더워 죽겠어. 빨리 들어가!”
그는 만월 그룹이 거대한 냉장고로 보이는지, 뒤뚱거리며 지은을 앞질렀다.
“팀장님, 같이 가요~”
지은은 박 팀장을 쫓아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순간, 구두굽이 무언가에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이내 그녀는 계단에서 떨어질 듯 비틀댔다. 지은은 본능적으로 있는 힘껏 양팔을 허공에 흔들며 허우적댔다. 다행히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그녀의 왼쪽 구두굽은 움푹 파여 있는 계단 한 부분에 끼어있었다. 지은은 얼마 전, 삼류 잡지에서 읽은 가난한 커리어 우먼의 고충이라는 칼럼을 떠올렸다. 자가용이 없고, 좋은 구두를 살 형편이 되지 않는 커리어 우먼은 다른 사람들보다 허리와 다리를 다칠 확률이 높다는 우스갯소리의 내용이었다.
지은은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끼며, 구두를 빼기 위해 왼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단단히 끼였는지 빠지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한번 발끝에 힘을 주었다.
‘철퍼덕!’
너무 힘을 준 탓일까, 지은은 왼쪽 구두가 벗겨진 채 계단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씨…”
엉덩이에 찌릿한 통증을 느끼며, 지은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갰다. 왠지 주위 사람들이 다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은은 어서 그곳을 벗어나고자 자리에 쭈그려 앉은 후, 두 손으로 계단에 박혀있는 구두를 힘껏 잡아당겼다.
“끙~”
요지부동인 구두. 더 세게 잡아당기는 지은.
“끙~”
온몸의 힘을 모아서였을까, 구두는 ‘퍽’하며 계단과의 이별을 선언했다. 왠지 모를 성취감에 지은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누군가의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를 드리웠다. 지은은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고,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 김지은 맞지?”
한 남자가 지은은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지은은 두 눈을 믿지 못했다. 어떻게 여기서 이 사람을…
“희건 오빠?”
희건은 흰 바탕에 남색 체크무늬가 있는 반팔 셔츠와 블루 톤의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키는 여전히 훤칠했고, 몸은 제법 관리한 티가 났다. 얼굴은 후광이 비칠 정도로 멋졌다. 그는 한 손에 아이스커피 4잔이 든 캐리어를 들고 있었고, 다른 손엔 ‘Blue Coffee’라고 쓰인 전단 뭉텅이를 들고 있었다. 예전부터 커피라면 사족을 못 쓰더니 결국 커피 전문점을 차린 것 같았다.
“김지은, 우리 6년 만이다? 동창회, 페북, 인스타, 카톡에도 없어서 이민이라도 간 줄 알았는데, 여기서 만나네.”
희건은 6년 전 지은과 사귀었을 때처럼 장난스러운 말투와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스스럼없이 편하게 말이다.
반면, 지은은 눈앞의 이 남자가 믿기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그동안 어떻게 희건을 피해 다녔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좀 더 잘난 모습을 보여줘도 모자랄 판에 계단에서 구두나 뽑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물론 언젠가 희건을 한 번쯤 만나야겠다는 생각은 했다. 화장부터 헤어, 옷, 커리어까지 그 모든 게 완벽할 때 말이다. 어찌 됐건 지은은 구겨진 자존심에 급하게 다림질이라도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를 바라봤다.
“벌써 그렇게 됐나? 오빠는 대학 때 그렇게 커피가 좋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커피 전문점 하나 봐. 난 만월 그룹에 다녀. 대기업은 야근이 잦고 스트레스도 많아서 가기 싫었는데, 하도 오라고 해서 얼마 전에 이직했어.”
지은의 입에서 허세 섞인 거짓말이 술술 나오고 있었다.
“니가 만월에 다닌다고?”
희건은 만월 그룹 건물을 가리키며 물었다. 좀 놀란 눈치였다.
“왜? 공부도 안 하고 맨날 오빠만 쫓아다니던 애가 좋은 회사 다닌다니까 안 믿겨?”
“아니, 그게 아니라…”
지은은 핸드폰을 확인하며, 희건의 말을 잘랐다.
“어쩌지? 나 지금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가야 해. 오랜만에 봐서 반갑긴 한데, 6년 전에 헤어진 사이에 이제 와서 촌스럽게 연락처 교환하고 그러지 말자. 잘 가.”
순식간에 몸을 획 돌려 계단을 저벅저벅 올라가는 지은. 그녀는 자신이 희건에게 한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참 강단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편으로 좀 아쉬웠다. 기를 더 눌러주고 싶었는데 말이다.
만월 그룹 건물 안은 시원하다 못해 쾌적했다. 넓은 로비 한편엔 회사를 소개하는 영상이 흘러나왔고, 다른 편엔 직원들의 사내 활동이 담긴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정장을 차려입고 목에 사원증을 건 사람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지은의 앞을 스쳐 갔다. 뭔가 멋들어진 그들의 모습에 지은은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딨다가 이제 와?”
지은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박 팀장이었다. 그는 로비에 마련된 의자에 앉은 채 손짓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갔다.
“잠깐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클라이언트는 어디서 만나기로 했어요?”
“통화했어. 여기로 온댔는데. 어? 저기 오는구먼.”
박 팀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킷 단추를 잠갔다. 그의 맞은편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준수한 외모의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박 팀장님.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박 팀장은 땀 묻은 손을 바지에 비벼 닦은 후, 남자가 내민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아닙니다. 생각보다 날이 별로 덥지 않더라고요. 여름 더위 따위는 저희의 열정을 따라잡지 못하나 봅니다. 하하하~”
그의 아부 섞인 개그에 지은은 경악했다.
“그렇습니까? 역시 늘 열정이 넘치시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옆에 계신 분은…”
남자가 말끝을 흐리자, 박 팀장은 지은을 자신의 옆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김지은 대리입니다.”
남자는 지은의 이야기를 미리 들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임수혁 대리입니다.”
수혁은 얼른 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을 꺼내 지은에게 주었다. 명함엔 ‘브랜드 홍보 2팀 임수혁 대리’라고 쓰여 있었다. 지은과 같은 직급이다. 월급과 대우는 천지차이겠지만.
“반갑습니다. 김지은 대리입니다.”
지은도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근데 정 팀장님은 어디…?”
박 팀장은 주위를 두리번대며 누군가를 찾았다. 수혁 말고 또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팀장님은 잠깐 밖에 나가셨습니다. 곧 오실 겁니다. 아, 저기 오시네요.”
수혁은 지은과 박 팀장의 뒤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둘은 자동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정 팀장이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
정 팀장은 지은을 보고 멈칫했다. 지은의 미소 띤 얼굴도 굳어졌다. 정 팀장은 이내 표정 관리를 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미팅 때 좋은 커피를 대접해드리고 싶어서 멀리 갔다 오느라 늦었습니다. 가게에서 홍보 좀 해달라고 전단을 줘서.”
정 팀장은 들고 있던 아이스커피가 든 캐리어와 전단 뭉텅이를 수혁에게 건넸다. 박 팀장은 지은을 그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제가 일전에 말씀드린 김지은 대리입니다.”
지은은 누가 ‘멈춤’ 버튼이라도 누른 듯 얼어있었다.
“처음 뵙습니다. 정희건입니다.”
그렇다. 정 팀장은 바로 아까 지은과 마주쳤던 그녀의 옛 연인, 정희건이었다! 만월 그룹에 다닌다는 지은의 거짓말은 15분도 안 돼서 들통이 나버렸고 그녀는 몸에서 멀어져 가는 영혼을 겨우 붙잡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뻔뻔하게 나가자! 아까보다 더 뻔뻔하게!’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빳빳이 들고, 명함을 꺼내 희건에게 주었다. 하지만 뻔뻔하게 구는 작전은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미소는 어색했고, 두 손은 달달 떨렸다.
“반갑습니다. 김지은 대리입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명함을 받으며 말했다.
“이제 회의실로 올라가시죠.”
박 팀장과 수혁은 먼저 엘리베이터로 향했고, 지은도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 뒤를 따라갔다. 그때, 희건이 그녀에게 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6년 전에 헤어진 연인이 연락처를 주고받는 건, 좀 촌스러운 거 아닌가?”
지은의 귀가 새빨개졌다.
6년 전
2008년 봄, 평야 대학교 광고학과는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앳된 신입생들로 가득했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에 최신 유행하는 옷을 입은 신입 여학생들은 남자 선배들의 관심의 대상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은은 예외였다. 동네 미용실에서 잘못 자른 어색한 앞머리와 고3 때 급격히 쪄 아직 덜 빠진 통통한 체형을 가진 그녀는 남학생들이 보기에 딱히 예쁘지도 세련되어 보이지 않았다.
지은의 대학 생활은 상상과 달랐다. 교수님의 강의는 따분하기 짝이 없었고, 빽빽한 시간표와 일주일에 몇 개씩 쏟아지는 과제와 쪽지 시험은 스트레스를 불러일으켰다. 그래도 한 가지 낙이 있다면 바로 정희건. 군대에서 갓 제대한 그는 광고학과, 아니 평야 대학 학생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명석한 두뇌, 훤칠한 키, 잘생긴 외모 , 부유한 가정환경. 한 마디로 엄. 친. 아. 였다.
전공 수업 때마다 희건을 살짝살짝 훔쳐보는 것은 지은의 유일한 낙이면서, 모든 여학생의 낙이기도 했다. 그래서 늘 수업 전 강의실은 희건의 이야기를 해대는 목소리들로 왁자지껄했다.
“희건 오빠 신입생 때 별명이 뭔지 알아? 오징어술사. 옆에 누가 서 있기만 해도 오징어로 만들어 버려서 붙은 별명이래. 완전 대박이지?”
“어제 대욱 오빠가 명동에서 SM 매니저가 희건 오빠한테 명함 주는 걸 봤다더라.”
“아이돌 그룹 데뷔 준비한다던 무용과에 정희 있잖아. 걔가 희건 오빠한테 사귀자고 했대. 이대 퀸카도 저번에 오빠한테 대시했다지, 아마.”
“아빠가 국무총리라고 했던 혜란이 있지? 걔도 희건 오빠한테 들이댔는데, 완전 쪽팔리게 희건 오빠가 싫다고 면전에 대고 이야기했다나 봐. 완전 멋있지 않냐? 직설적인 것도 매력적이야.”
“오빠한테 대시하는 여자들 클래스 봐봐. 우리한텐 희건 오빠는 그림의 떡이야.”
그때, 희건이 강의실 문을 열고 등장했다. 한 손엔 커피를 들고 있었다. 일순간 떠들어대던 여학생들은 조용해졌다. 모두 먹이를 노리는 사바나 초원의 치타라도 된 듯, 숨을 죽이고 그의 행동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지은도 안 그런 척 희건을 곁눈질하며 보았다. 어쨌건 보라고 있는 그림의 떡이니까.
희건은 강의실을 가로질러 자기 자리와 반대 방향에 있는 지은에게 다가갔다.
‘설마 나한테 오는 거야? 왜? 나한테 뭐 부탁할 게 있나?’
지은의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쳤다. 그는 그녀의 책상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오늘 유난히 커피 향이 좋네. 너 주려고 샀어. 마셔.”
지은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희건을 올려봤다.
“저.. 저요..? 저 아세요?”
멍청한 질문이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지은은 신입생 환영회 이후로 희건과 말조차 섞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알지. 우리 과 1학년 김지은이잖아.”
희건은 ‘씨익’ 웃고는 자신의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의실의 모든 여학생의 시선은 지은에게 꽂혀있었다. 평범한 지은에게 희건이 관심을 보이다니, 다들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여학생 중 한 명은 휴대폰으로 지은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 상황은 도대체 뭐지? 오빠가 왜 나한테… 친구들이랑 내기라도 했나?’
수업이 시작되고서도 지은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잠에서 덜 깬 기분이었다. 허벅지는 하도 꼬집어서 이젠 멍이 들 정도였다. 그녀는 몇 번이고 책상 위에 있는 커피를 바라봤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아니다, 꿈이 아니다. 현실이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커피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 모금 머금었다.
‘향이 좋다.’
6년 후,
지은은 멍하게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쳐다보고 있었다.
“김 대리님, 김 대리님!”
지은은 자신을 부르는 희건을 바라보았다.
“네?”
“그거 얼음 녹으면 맛없어요. 아메리카노 안 좋아하세요?”
“아니요. 좋아해요.”
지은은 급히 커피를 입에 대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익숙한 향. 예전에 희건이 자신에게 처음 건넸던 그 커피가 생각났다. 딱 그 맛이었다.
“그럼 고객소통캠프가 얼마 안 남았으니까, 서둘러 진행하죠. 저번에 말씀하신 것처럼 다운 커뮤니케이션에서 직원 한 명 파견해주실 거죠?”
순간, 지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파견이라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박 팀장의 반응은 달랐다. 잘 아는 이야기인 듯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죠. 지금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에 그 편이 일 처리에 도움이 될 겁니다. 저희 김 대리가 일 하나는 기똥차게 잘하거든요.”
‘!!!!!!’
지은은 놀란 눈으로 박 팀장을 바라보았다.
“저요?”
“그럼 김 대리가 가야지. 우리 회사에 자네만한 인재가 또 있나?”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희건과 수혁, 그리고 박 팀장을 보았다. 다들 뭘 그렇게 당황하느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씨, 사전에 이야기도 없이 이런 경우가 어딨어? 아무리 클라이언트랑 함께 있는 자리라도 이건 아니지! 게다가 쪽 팔리게 희건 오빠랑 어떻게 회사를 같이 다녀!’
“저기…”
지은은 거절하려 입을 열었지만, 희건이 말을 가로채며 그녀의 거취를 못 박았다.
“그럼 월요일부터 김 대리님이 우리 회사로 출근하시면 되겠네요.”
“아니… 그게 아니라...”
지은의 머뭇거리는 모습을 본 수혁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혹시 회사와 협의가 안 됐나요?”
지은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협의가 안됐다고 솔직하게 말할까? 아니다. 회사 망신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까지 쫓아온 자신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기도 했다. 지은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물론 알고 있었죠. 다음 주 월요일에 출근하면 되죠?”
지은은 박 팀장을 노려보듯 바라보며 대답했지만,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수혁에게 말을 걸었다.
회의는 희건이 박 팀장과 지은에게 고객소통캠프에 관한 설명을 모두 마친 후에야 끝이 났다. 곧 박 팀장과 지은은 회사로 돌아갔고, 그들을 배웅하고 돌아온 수혁과 희건은 회의실 책상에 남아있는 소지품을 챙겼다.
“아까 그 김 대리요. 예쁘지 않아요?”
수혁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뭐가?”
“몸매도 괜찮고, 얼굴도 그만하면 A급이죠. 좀 드세 보이긴 하지만.”
“임 대리, 그 여자는 협업 업체 직원이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희건의 표정이 굳어졌다. 수혁은 그의 표정을 읽지 못했는지 깐죽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요. 같은 회사도 아니니까 더 좋죠. 앞으로 김 대리랑 친하게 지내야겠어요. 딱 제 이상형이라니까요. 팀장님, 끼어들면 절대 안 돼요. 제가 침 발라놨습니다!”
수혁은 희건에게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리며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희건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뚫어질 듯 노려보다가 들고 있던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거칠게 내던졌다.
“저 자식이 진짜!”
1시간 뒤, 지은은 박 팀장과 회사로 돌아왔다. 직원을 다 합쳐봤자 20명 남짓한 아담한 곳. 그녀는 짐도 내려놓지 않은 채 대표실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리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스마트폰으로 고스톱을 치고 있던 대표는 익숙하다는 표정으로 지은을 ‘스윽’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아, 또 뭐?”
“어떻게 당사자한테 말 한마디 없이 파견을 보내요?”
대표는 귀찮은 듯 한쪽 얼굴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뭐?”
“저 만월 그룹에 파견 가잖아요.”
대표는 ‘퉷’하며 입안에 물고 있던 가래를 재떨이에 뱉었다.
“뭔 소리야? 그거 박 팀장이 가기로 했던 거잖아. 김 대리가 가는 걸로 됐어?”
“네?”
지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가 대표에게 다시 질문해도 같은 대답이었다. 지은은 바보같이 뱀 같은 박 팀장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박 팀장이 파견 근무를 가기 싫으니까 클라이언트 앞에서 그녀를 파견 근무 직원이라고 말해, 옴짝달싹 못하도록 한 것이다. 지은은 대표실을 나와 박 팀장에서 이런 경우가 어딨냐며 따졌지만, 그는 팥빵을 우걱우걱 씹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지은은 그런 박 팀장을 보며 생각했다. 그를 이곳에서 당장 치워버릴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