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애, 그리고 6년 후> 2화. 파견근무 1일

by 로꾸꺼

월요일 아침, 지은은 오랜만에 지옥철을 경험하고 있었다. 만월 그룹 본사로 가려면 꼭 타야 하는 2호선은 정말 터질 듯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다닥다닥 한 몸처럼 붙어있었고, 지하철 문이 열릴 때마다 내리는 사람과 타는 사람으로 비명과 짜증 섞인 탄식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지은은 자신의 이어폰이 어딘가에 걸리진 않을까, 뒤에 바짝 붙은 사람이 변태는 아닐까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험한 출근길이 끝나고, 지은은 드디어 만월 그룹에 도착했다. 출근 시간까지 아직 30분가량 여유가 있었다. 그녀는 희건에게 전화를 걸어 미리 사무실에 들어갈까 고민하다가,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여름 무더위에 화장은 반 이상 지워져 있었고, 블라우스는 흠뻑 땀에 절어있었다. 지하철에서 지은의 앞에 서 있던 여자의 머리카락에서 고등어 냄새가 났는데, 그 냄새도 옮겨 붙은 것 같았다. 그녀는 옷매무새라도 정돈할 겸 화장실로 향했다.


“쏴아~”


차가운 물을 손을 적시고 있으니 더위가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붕 떴던 정신도 돌아오는 것 같았다. 한참을 화장실 세면대 수도꼭지 앞에 손을 대고 있던 지은은 인기척이 들리자 수도꼭지를 잠그고 핸드타월로 손을 닦았다. 그리고는 가방을 열어 엄마에 친구에게 선물 받은 명품 브랜드 립글로스를 집어 들었다.


‘한 번 발라볼까?’


지은은 입술 구석구석을 예쁘게 물들였다. 그런데 이게 웬걸! 립글로스 성능이 좋은 탓인지 별로 바르지도 않았는데도 튀김 너덧 개는 집어먹은 듯, 입술이 번들거렸다. 그녀는 짜증스럽게 립글로스를 세면대에 놓고, 핸드타월을 뽑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어느 정도 정돈되자 지은은 다시 립글로스를 챙기기 위해 세면대에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엥? 어디 갔지?’


지은은 두리번거리다가 옆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는 여자의 손에 눈길이 갔다.


‘저거 내 꺼잖아!’


지은의 립글로스를 여자가 들고 있었다. 지은은 어쩔 줄 몰라 그저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봤고, 여자는 시선을 느꼈는지 지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기… 그거 제 립글로스인데요…”


그녀가 머뭇거리며 여자에게 말을 건네자, 여자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네?”

“제 립글로스라고요. 뭔가 착각하신 모양인데, 제가 아까 세면대에 놓았거든요.”

“무슨 말이에요?”


여자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지은은 여자의 뻔뻔한 반응에 기가 막혀 좀 더 힘을 실어 말했다.


“제 입술을 보세요. 그쪽이 손에 쥔 립글로스랑 색이 똑같잖아요. 그거 제 친구가 여행 갔다가 면세점에서 사 온 거예요!”


여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지은을 위아래로 쓸어보곤 ‘피식’ 웃었다.


‘저 XX가 날 보고 웃어?!’


여자의 무례한 태도에 지은은 발끈했지만, 한 편으로 속없게도 여자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늘씬한 몸매. 남이 입었으면 평범한 정장이었을 텐데, 여자가 입으니 섹시했다.


“지금 절 보고 웃는 거예요?”


지은이 묻자, 여자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왼. 손.”


왼손? 지은은 여자의 왼손을 보았다.


“나 말고, 당신 왼손이요.”


순간, 지은의 왼손 감각이 느껴졌다. 뭔가 딱딱한 질감. 크기는 딱 립글로스.


“어? 이게 왜...”

“당신 왼손에 있는 거, 당신이 찾던 립글로스 맞죠? 이봐요. 괜한 사람 의심하지 말고, 정신 좀 똑바로 차려요.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그렇지, 선량한 사람을 도둑 취급하고 그러면 안 되지 않나? 딱 보니 우리 회사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화장실 쓰려고 왔으며 조용히 볼일이나 보고 나가요. 우리 회사는 화장실 개방을 왜 해가지고선 개나 소나 다 들어오게 만드는지 모르겠네.”


여자는 하고 싶은 말을 죄다 뱉어놓곤, 지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은은 멍한 표정으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아무리 깜빡해도 말이지. 어떻게 손에 들고 있는 립글로스를 깜빡한단 말인가! 그녀는 자신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드르륵~ 드르륵~'


지은의 가방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희건이었다. 그는 지은에게 출입카드를 주겠다며 회사 로비에서 만나자고 했다. 지은은 쏜살같이 화장실을 나섰고, 화장실 코너를 돌자마자 저 멀리에서 걸어오는 희건이 보였다. 체크무늬 포인트 카라가 돋보이는 청색 셔츠에 아이보리 컬러의 바지, 그리고 왼손엔 반짝이는 메탈 재질의 시계. 근처 여사원들이 희건을 넋 놓고 바라보았고, 남자 사원들은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저렇게 멋진 남자가 내 남자 친구였다니. 지은은 왠지 어깨가 으쓱했다. 그리곤 문득 6년 전이 일이 생각났다.



6년 전,


희건과 지은이 막 사귀기 시작할 때였다. 희건은 일찍이 친구들에게 지은과 사귄다고 커밍아웃했지만, 지은은 조용했다.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싫었다. 뭔가 귀찮고 시끄러운 일들이 생길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 달리, 둘의 연애 소문은 빨리 퍼졌다.


“둘이 사귀는 거 맞아?”

“무슨 계약 연애 같은 거 아니야?”


둘이 캠퍼스를 걸어갈 때면 이런 웅성거림이 들렸다. 아마도 희건 같은 멋진 킹카가 평범한 지은과 연애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날도 같은 상황이었다.

희건과 지은이 오전 수업을 마치고, 학생 식당에 가던 길이었다. 둘을 발견한 한 무리의 학생들이 둘이 진짜 사귀는지 아닌지에 대한 진위를 놓고 쑥덕거렸다. 지은은 그들의 시선을 피하려 빨리 걸었지만, 희건은 무언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곤 느닷없이 지은에게 달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는 그녀와 맞잡은 손을 높이 들었다.


“바보들아, 우리 사귀는 거 맞거든!”


지은은 희건의 돌발 행동에 얼굴이 새빨개져선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싫지 않은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둘은 손을 꼭 잡고 당당하게 캠퍼스를 걸었다.

지은과 희건의 연애가 완전히 공식화되자, 그를 좋아하던 여자들은 지은을 시샘하기 시작했다. 뒷담화는 물론 전공수업 때 노골적으로 지은을 괴롭히기도 했다. 사실 희건은 대학에 입학하고 제대 후 복학할 때까지 여자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정혼자가 있다’, ‘동성연애자다’ 등 무성한 소문을 달고 살았다. 또한, 여자 친구가 있다 해도 그와 비슷한 외모와 배경을 가진 멋진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지은은 희건과 사귀고 꽤 힘들어했다. 근거 없는 소문과 사람들의 시기가 그녀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지은은 희건처럼 멋진 남자를 얻은 대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끔은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을 당하기도 했다. 희건은 그런 지은의 마음을 잘 알기에 더 따뜻하게 대했고, 그의 그런 모습은 지은을 늘 미소 짓게 했다.



6년 후,


“출근길이 굉장히 험난했나 봐?”


희건은 이미 반나절을 회사에서 보낸 듯한 몰골을 한 지은을 향해 물었다.


“팀장님은 차 타고 오셨나 봐요? 옷에 구김이 하나도 없네요.”


희건은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서 출입카드를 꺼냈다.


“1시간 전에 출근해서 지하철에 사람이 많지 않았거든. 그 뾰족한 말투는 그대로네. 자, 여기 출입카드. 이게 있어야 구내식당도 가고, 사무실에도 들어올 수 있어. 혹시 잃어버리면 발 동동 굴리지 말고 나한테 전화하고.”

“그럴 일 없거든요? 제가 얼마나 꼼꼼한데요.”


지은은 희건의 손에서 출입카드를 낚아챘다.


“지금쯤이면 사무실로 다들 출근했을 거야. 올라가자. 소개시켜줄게.”


지은은 희건을 따라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출근 시간대라 그런지,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지은과 희건은 사람들과 함께 차곡차곡 안으로 들어갔다.

지은은 희건의 바로 앞에 섰다. 좁은 공간에 그와 가까이에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꼭 둘만 있는 것 같달까? 자꾸만 희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희건의 시원한 스킨향과 따뜻한 숨결이 지은에게 닿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지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지은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희건은 그런 지은을 보고 부드럽게 미소 짓더니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너 아침에 고등어 먹었냐?”


지은은 그 자리에서 딱 죽고 싶었다.

내일 그 고등어녀를 만나면 페브리즈를 뿌려줄 테다!


월요일 아침의 사무실은 한 주를 시작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어디론가 급히 전화하는 사람, 양손 가득 서류 더미를 들고 뛰어다니는 사람, 아침부터 상사에게 군소리를 듣는 사람 등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지은의 회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희건은 지은을 팀 정중앙에 세웠다. 희건이 팀 구석구석을 보자, 소란했던 주변이 차츰 잠잠해졌다.


“오늘 우리 회사로 파견 온 다운 커뮤니케이션의 김지은 대리입니다. 이번 주만 우리 회사로 출근하니까 잘 챙겨주세요. 그리고 동주 대리!”


희건은 누군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시계를 쳐다봤다. 8시 35분.


“동주 대리, 지각이야?”


그때, 수혁이 갸우뚱하며 입을 열었다.


“분명 아까 봤는데…”

“저 여깄어요!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느라고…”


희건은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동주는 ‘헉헉’대며 얼른 자리에 앉았다.


“동주 대리, 내가 언제쯤 동주 대리한테 먼저 인사를 받아볼 수 있을까?”

“아니, 팀장님. 사실은 제가 진짜 일찍 왔거든요. 그런데…”


동주가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하자, 희건이 딱 잘랐다.


“변명을 나중에 듣고, 이쪽은 저번에 말했던 다운 커뮤니케이션의 김지은 대리야. 동주 대리의 일을 많이 도와주실 분이니까 잘 대해드려.”

“안녕하세요? 김지은입니다.”


지은은 밝게 웃으며 동주와 마주했다. 순간,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찌릿찌릿한 전율이 흘렀다. 동주라는 여자, 아까 자신이 화장실에서 도둑 취급한 그 여자다.


‘이런 된장!’


지은은 속으로 아침의 일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화장실 따위,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다. 반면, 동주는 지은을 보고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 구면이네요.”

“어? 둘이 만난 적 있어?”


희건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게 아니라, 아까 화장실에서…”


지은은 고개를 저으며 동주에게 그만 입 좀 다물어달라는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잠시 멈칫하던 동주는 이내 악랄한 미소를 지었다.


“아까 화장실에서 똥 싸고 있더라고요.”


주위 사람들이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지은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니, 아니에요! 대리님, 제가 언제 똥을 쌌다고 그래요! 저 똥 안 쌌어요!”


지은이 강력하게 부정을 할수록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더 커졌다.


식은땀을 한 바가지 쏟은 자기소개 시간이 지나고, 지은은 책상에 앉아 짐을 정리했다. 짐이라고 해봤자, 펜 두 개와 슬리퍼, 머그컵이 전부지만.

지은은 옆에 앉은 동주를 슬쩍 쳐다봤다. 그녀는 쇼핑몰 사이트를 검색하며 구두를 구경하는 듯했다. 지은은 아까 일도 그렇고 이런 상태론 안 되겠다 싶어, 슬쩍 말을 걸었다.


“저, 어떤 일부터 하면 될까요?”


동주는 새초롬하게 지은을 바라보더니, 서류 뭉텅이를 건넸다.


“고객 리스트 정리나 좀 해주세요. 행사 스케줄도 조정해야 하는데 일단 그건 나중에.”


지은은 서류들을 책상에 펼쳤다. 그런데 이거, 보통 작업이 아니다. 무려 150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전화번호와 주소, 행사 참석 여부 등을 확인해야 하는 작업이다!


“이거 제가 다 해요?”


놀라는 지은을 보며 동주는 ‘그럼 누가 해?’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너무 많잖아요.”

“할 일이 필요하다고 해서 줬잖아요. 퇴근할 때까지 그거 하면 되겠네.”


동주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려, 다시 쇼핑 삼매경에 빠졌다.



지은은 동주 덕분에 정신없는 오전을 보냈다. 전화통을 붙들고 수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배가 꼬르륵거릴 정도로 허기져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 다들 자리에서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점심을 누구와 먹어야 할지, 구내식당은 어디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지은은 주위를 두리번댔다.


“김 대리님, 같이 식사하러 가시죠.”


지은의 건너편에 앉은 수혁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럴까…”


반가운 마음에 지은은 승낙하려고 했으나, 동주가 갑자기 말을 가로챘다.


“김 대리님은 식사 따로 하신대요. 오늘 이 근처에서 친구랑 약속이 있다고 하던데요?”


지은은 그런 약속은 없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동주는 얼른 수혁의 팔짱을 끼고는 순식간에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런 나쁜!!!!’


지은은 혼자 점심을 먹어야 할 판이었다. 처량한 기분에 자기도 모르게 희건의 책상을 바라봤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아, 아까 회의 갔지.’


지은은 가까운 편의점으로 향했다. 파견 첫날부터 왕따처럼 식당에 홀로 앉아 밥을 먹기도 그랬고, 괜히 팀원들과 마주치면 민망한 상황이 생길 게 뻔했다.

편의점에 들어선 지은은 삼각김밥, 소시지, 사이다, 컵라면, 초콜릿바 등 양손 가득 먹을거리를 집어 들고는 계산대 앞에 내려놓았다.


“7,500원입니다.”


편의점 알바생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잠깐만요.”


지은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려던 찰나, 남자 손이 불쑥 튀어나와 계산대에 라면과 김밥, 그리고 김치를 올려놓았다.


“이것도 같이 계산해주세요. 이걸로요.”


남자는 알바생에게 신용 카드를 건넸고, 놀란 지은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희건이다.


“팀장님이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넌 왜 식당에서 밥 안 먹고, 여기서 이러고 있어? 벌써 왕따야?”


희건의 말에 지은은 짜증이 확 밀려왔다.


“약속이 있었는데 취소돼서 그래요!”

“난 또 동주 대리가 너한테 텃세 부린 줄 알았지. 만약 그런 거였음 따끔하게 한 마디 해주려고 했는데.”


지은은 ‘아차’ 싶었다. 그냥 사실대로 말할걸…


“사주시는 거니까 감사히 먹을게요. 근데 팀장님은 왜 편의점에서 식사하세요?”


희건은 피곤하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임원 회의 끝나고 다 같이 식사하자고 하는 거 그냥 핑계 대고 나왔어. 어제도 그저께도 그들과 밥 먹고, 술 먹고, 또 밥 먹고, 술 먹고 그랬거든. 오늘은 마음 편히 밥 좀 먹고 싶었달까.”

“팀장이라는 자리가 쉽지 않은가 봐요.”

“형식적인 위로는 됐고, 배고프니까 밥이나 먹자.”


희건과 지은은 편의점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나란히 밖을 바라보며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후루룩, 후루룩”


편의점을 메우는 라면 먹는 소리. 지은은 이상하게도 이 소리가 듣기 좋았다.

희건은 배가 고팠는지, 뜨거울 법한 라면을 쉼 없이 들이켰다. 어쩜 저 남자는 라면 먹는 모습도 그림 같은지. 희건의 조막만한 얼굴은 왕뚜껑에 넉넉하게 가려질 정도였고, 흰 목덜미는 매끈했으며, 빨간 입술은 탐스러웠다. 길고 부드러운 손은 나무젓가락을 들어 올릴 때마다 눈길이 갔다.


“내가 라면 먹는 모습이 섹시하긴 한데, 그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면 부담스러워.”


희건의 기습공격에 지은은 민망한 듯, 황급히 시선을 거두었다.


“제… 제가 언제 쳐다봤다고 그래요?”

“방금 뚫어져라 쳐다봤잖아.”

“아니거든요! 팀장님이 산 김치 먹고 싶어서 그래요. 좀 줘봐요!”


지은은 젓가락을 김치 쪽으로 뻗었다.


“넌 꼭 내꺼 빼앗아 먹더라.”


지은과 희건이 연인이었을 때, 둘은 가끔 학교 매점에서 컵라면을 하나 사서 나누어 먹었다. 각자 하나씩 먹는 것보다 둘이 머리를 맞대고 먹는 라면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마지막엔 서로 남은 한 젓가락을 먹겠다고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식사 후, 지은은 또다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오후를 보냈다. 업무와 관련된 일을 제외하곤 동주와 딱히 대화할 일이 없었다. 그녀는 지은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다. 낮에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선 아무런 죄책감이 없어 보였다. 희건은 외부 미팅이 있다며, 사무실을 나선 이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미팅 후 곧장 퇴근하는 것 같았다.

퇴근시간이 되자, 사람들은 각자 주변을 정리하며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지은도 일을 마무리하고 퇴근하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퇴근하세요?”


짐을 챙기던 수혁이 지은에게 물었다.


“네. 이제 가려고요.”

“동주 대리랑 혁주 씨랑 맥주 마시러 갈 건데 같이 안 갈래요?”


지은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전 집에 일이 있어서요. 맛있게들 드세요.”


팀원들에게 인사를 한 지은은 집으로 향했다. 퇴근길 지하철도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출근 시간대만큼 심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집에 가서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마냥 가벼웠다.

집에 도착한 지은은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냉장고에 있는 시원한 맥주 한 캔을 꺼내어 꿀꺽이며 단숨에 마셨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시원한 맥주는 오늘 하루 쌓였던 스트레스를 씻어내는 듯했다. 아, 기분이 너무 좋다!



jiyen.jpg


이전 02화소설 <연애, 그리고 6년 후> 1화. 뜻밖의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