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애, 그리고 6년 후> 3화. 파견근무 2일

야근의 끝을 잡고

by 로꾸꺼


또다시 출근 지옥철에서 압사당할 뻔한 지은은 우울한 얼굴로 사무실 문 앞에 섰다. 어제 지옥 같은 하루를 맛본 터라 쉽사리 사무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녀의 모습은 흡사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았다.


“하… 퇴근하고 싶다. 그냥 집에 가고 싶다.”


지은의 머릿속은 오늘도 동주 대리에게 왕따 당하고 일만 지지리 많이 할 거란 생각으로 가득했다.


“여기에서 뭐해?”


희건이었다. 그는 아침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길이었는데, 지은은 그가 온 지 모르는 듯 멍하게 사무실 유리문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퇴근하고 싶어요…”

“퇴근? 너 지금 출근했잖아.”


희건이 되묻자, 지은은 정신을 차린 듯 놀라며 말을 얼버무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빨리 일하고 싶다고요. 하하… 근데 팀장님 언제 오셨어요? 저 이제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지은은 횡설수설하며 사무실 안으로 재빨리 들어가 짐을 자리에 놓았다. 그리곤 옆자리의 동주에게 인사를 했지만, 그녀는 가볍게 무시했다.


“어젠 잘 들어갔어요?”


한 손에 커피를 든 수혁이 ‘방긋’ 웃으며 지은에게 인사를 건넸다. 지은도 수혁을 보고 밝게 웃었다. 이 남자, 뭔가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기운이 있다!


“네. 맥주는 맛있게 드셨어요?”

“제가 김 대리님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만든 자리였는데, 김 대리님이 참석 안 하신다고 해서 파투냈어요. 안 그래요, 동주대리?”


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곁눈질하던 동주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지은은 수혁에게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에이~ 제가 안 가서 술자리가 파투났다고요? 지금 저 미안하라고 그렇게 말하는 거죠? 사실은 다들 각자 약속이 있었던 거면서.”


수혁은 한 손으로 머리를 넘기며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아닌데요. 진짜 대리님을 위한 자리였다니까요. 그럼 어제 제가 만든 자리 거절하셨으니까, 오늘은 어때요?”

“글쎄요. 일이 늦게 끝날 것 같은데…”

“그럼 그때까지 기다릴게요. 우리 맛있는 거 먹어요.”


순간, 지은은 뭔가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희건이었다. 그는 파티션 너머로 머리를 빠끔히 내놓고 둘을 바라보다가, 지은과 눈이 마주치자 자리에서 일어나 한마디 했다.


“두 분, 시끄러우니 잡담은 좀 나가서 하시죠. 그리고 김 대리님.”


지은은 자리로 돌아가려다 말고, 희건을 향해 몸을 돌렸다.


“네?”

“오늘 박 팀장님과 프로젝트 회의있는 거 기억하죠? 회의 시간이 10시에서 11시로 변경됐으니까 그렇게 알고 준비해주세요. 팀장님께도 연락해서 시간 확인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지은은 희건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 시작 전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지만 지은은 참 많은 일을 처리했다. 이메일 쓰느라 컴퓨터 자판을 열심히 두드린 열 손가락은 마디마디가 끊어질 듯했고, 캠프 사회자 섭외하느라 수화기에 대고 쉼 없이 떠든 목은 반쯤 쉬어 있었다. 한창 일에 매진하고 있던 그때, 동주가 그녀를 불렀다.


“김 대리님!”


지은은 자연스레 그녀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네. 무슨 일이세요?”


동주는 지은에게 신용카드를 하나 내밀었다.


“이거 법인카드에요. 우리 회의 때 마실 커피를 사야 하는데, 대리님이 박 팀장님 뭐 드실지 물어보시면서 사다 주세요. 전 아이스 바닐라 라떼이고 우리 팀장님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로요. 임 대리님꺼는 주문할 필요 없어요. 회의 시작까지 30분 정도 남았으니까 지금 사오면 시간이 딱 맞을 거에요. 이런 기회도 흔치 않은데, 비싼 걸로 주문하세요.”


얄미운 미소를 짓는 동주를 보며, 지은은 법인 카드를 받아들었다.


‘진짜 별걸 다 시키네. 그리고 내가 거지야? 공짜 커피 못 먹어서 안달났어?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지은은 지금 상황에 대해 따지고 싶었지만, 다운 커뮤니케이션과 만월 그룹과의 회의를 앞두고 굳이 안 좋은 분위기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알겠습니다.”

“카페테리아는 지하 1층에 있어요.”


지은은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온갖 불만으로 속이 끓어 올랐지만,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주문을 외며 자신을 위로했다.


지하 1층에 도착하니, 카페테리아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일찍이 점심을 해결하러 온 사람들로 몹시 북적였으니 말이다. 지은은 20분을 기다려 겨우 주문을 할 수 있었고, 또 20분을 기다려 음료를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희건과 박 팀장에게 회의에 늦는다는 연락을 해야 했지만, 깜빡하고 핸드폰을 사무실에 두고 온 탓에 그럴 수 없었다. 아마 동주가 대략 지은의 이야기를 해줄 터.


커피가 가득 든 캐리어를 들고 돌아온 사무실엔 희건과 동주는 없었다. 수혁만이 놀란 얼굴로 지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 갔다가 이제 와요?”

“회의 때 마실 커피 좀 사오느라고요.”


어리둥절한 지은의 표정에 수혁은 답답한 듯 말했다.


“그럼 미리 말을 했어야죠. 20분 전에 다들 9층 회의실로 갔어요. 박 팀장님은 훨씬 전에 올라가셨고요.”


동주 대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걸까? 그녀는 얼른 핸드폰을 보았다. 박 팀장에게서 5건의 부재중 통화와 7개의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임 대리님은 안 가세요?”


지은은 자기 좀 살려달라는 눈빛을 그에게 보냈지만, 수혁은 어떨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 다른 프로젝트로 옮겼어요. 고객소통캠프 건은 저 없이 팀장님과 동주 대리, 두 분이 맡기로 했고요.”

“진짜요? 그럼 저 빨리 올라가 볼게요.”


지은은 회의 자료와 커피, 그리고 핸드폰을 들고 급하게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은 적막하다 못해 고요했다. 희건은 말없이 태블릿PC로 메일을 체크하고 있었고, 동주 대리는 지루한 듯 펜을 두 손가락으로 돌리며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반면, 박 팀장은 초조한 듯 양손을 주무르며 한쪽 다리를 덜덜 떨고 있었다. 그는 곁눈질로 희건의 얼굴을 살피기도 했다.


“하아… 하아… 죄…송합니다.”


지은이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회의실로 들어왔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다가 이제 와? 늦으면 늦는다고 미리 알려줘야지!”


지은에게 버럭 화를 내는 박 팀장.


“커피 사러 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았어요. 하필 핸드폰도 사무실에 두고 와서 연락할 수 없었고요.”


그녀는 들고 있던 물건들을 테이블에 와르르 내려놓고, 캐리어에서 커피를 꺼내 박 팀장에게 건넸다.


“아이스 카라멜 마끼아또 맞죠?”


박 팀장은 ‘크음’ 헛기침을 하며 휘핑크림이 가득 뿌려진 커피를 받아들었다.


“다음부턴 이런 일 없도록 해.”


그의 당부에 지은은 꾸벅 머리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아, 그리고 여기 법인카드요. 이건 팀장님께 드리면 되죠?”


지은은 희건에게 아메리카노와 법인카드를 내밀었다. 희건은 뭔가 못마땅한 듯, 인상을 쓰며 카드를 받았다. 그리고 잠시 지은을 쳐다보더니, 박 팀장을 향해 꾸벅 머리를 숙였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우리 쪽에서 실수했습니다. 당연히 저희가 음료를 준비했어야 했는데, 너무 바빠 챙기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왜 우리가 사과를 해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동주가 버럭 하며 큰 소리를 냈다. 그러자, 희건은 무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동주 대리는 4년 동안 회사 생활 하면서 도대체 뭘 배운 거야. 동주 대리가 해야할 일은 왜 다른 사람을 하는거지?”


나지막하지만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희건의 목소리. 동주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에 박 팀장은 별안간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일하라고 저희 직원을 만월 그룹으로 파견 보낸 건데 괜찮습니다. 앞으로 작은 일부터 큰일까지 많이 시켜주십시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사실 오늘 뵙자고 한 건, 논의 드릴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가졌으면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다운 커뮤니케이션이 파트너로서 우리 일에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해주시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있어야죠. 소문난 맛집을 예약해 두었으니까, 회의 후에 함께 식사하시면서 그동안 불편하셨던 부분들을 씻어내시죠.”


희건과 박 팀장은 고객소통캠프 장소와 날씨 건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필요한 서류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 진행 현황에 대해 서로 체크한 후, 회의를 마쳤다.

박 팀장은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회의 내내 희건이 지은과 자신의 일 처리 능력을 칭찬했기 때문이었다. 지은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점심 식사를 하러 간 곳은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일식집이었다. 희건과 동주, 지은, 그리고 박 팀장은 정장 유니폼을 입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이미 테이블 세팅이 완벽하게 돼 있었다. 지은과 박 팀장은 살짝 들뜬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곧 참치회 코스 요리가 줄줄이 나왔다. 박 팀장은 몹시 배가 고팠는지, 나오는 음식들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또한, 메인 요리인 참치회와 모듬회가 나왔을 땐 회를 국수처럼 빨아들였다. 지은은 동주와 희건의 눈치가 보이기도 했고, 박 팀장을 보고 있자니 입맛도 사라져 버려 금방 젓가락을 놓았다.


“회를 참 좋아하시나 봐요.”


동주가 박 팀장에게 빈정거리며 말했다.


“하하하. 정말 좋아합니다. 맛집이라더니 정말 음식이 기가 막히네요!”

“오늘은 다운 커뮤니케이션 분을 위한 자리니까 많이 드십시오. 김 대리님도 좀 드세요. 낯선 우리 회사에 오셔서 고생 많이 하고 있잖아요.”


희건이 지은을 향해 다정히 말하자, 동주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요, 김 대리님. 이렇게 좋은 곳에서 회 먹을 기회가 많지 않잖아요. 이럴 때 일수록 가능한 든든하게 드셔야죠. 박 팀장님은 맛있게, 그리고 많이 드시잖아요. 대리님도 많이 드세요.”


순간 지은의 가슴 속 응어리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멀쩡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방을 무시하는 동주가 지은은 정말이지 믿기지 않았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지은은 이번엔 꼭 동주에게 한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기요. 지금…”


지은의 행동을 미리 알아챈 걸까? 박 팀장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하하~ 대리님, 맞습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맛집에서 이렇게 좋은 음식을 실컷 먹겠습니까.”


너스레를 떠는 박 팀장을 보니 지은은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방을 나온 지은은 화장실이 아닌 밖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다. 정말이지 속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진짜 미치겠네.”


그녀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커다란 돌들도 장식된 화단을 향해 허공에 발길질을 해댔다.


“으아아~ 짜증나!!!!”


점점 더 격렬해지는 발길질. 순간, 그녀의 구두가 벗겨지며 화단에 떨어졌다.


“아, 진짜!!!!!”


그녀는 자리에 쪼그려 앉아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리를 절룩거리며 구두를 주우러 화단으로 향했다.


“가만히 있어. 내가 가져다줄게.”


희건이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그는 화단으로 가, 지은의 구두를 꺼냈다.


“발 줘봐.”


희건은 지은의 앞으로 다가와 앉았고, 그녀의 오른발을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손으로 지은의 발에 묻은 흙을 조심스레 털어냈다.


“넌 주로 구두로 곡예하는 걸 좋아하나 보지?”


희건의 그녀의 발에 구두를 신겨주었다.


“곡예 아니거든요. 그냥 구두가 제멋대로 벗겨진 거지.”


민망했는지 지은의 얼굴이 빨개졌다. 희건은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동주 대리 일은 미안해. 아직 부족한 게 많은 친구야. 네가 이해해줘.”


자신의 속상한 마음 따윈 안중에도 없는 희건의 말에 지은은 순간 욱했다.


“제가 왜요? 제가 왜 이해해야 하는데요? 우리가 아무리 만월 그룹에서 일을 받아서 하는 입장이래도 이런 취급은 아니죠. 제가 이 업계에서만 4년을 일했는데, 동주 대리 같은 클라이언트는 처음 봐요. 팀장님도 마찬가지예요. 결국을 동주 대리랑 같은 편이잖아요. 저희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결국엔 우리가 클라이언트니까 참으라고 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왜 자꾸 반말하세요? 공과 사, 구분해주세요.”


씩씩거리며 쏘아대는 지은의 모습에 희건 표정은 싸늘해졌다.


“너한테 존댓말을 쓰라고? 우린 서로 죽고 못 살았던 사이었어. 그걸 다 잊고 마치 처음 본 사람처럼 어떻게 서로를 대해? 난 싫어. 그리고 공과 사는 너나 먼저 구분해. 도대체 어떤 협력업체 직원이 팀장급 클라이언트를 이런 식으로 대하니.”


정색하며 말하는 희건의 모습에 지은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의 말 중 틀린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가 희건을 정말 클라이언트로 생각했다면 이런 식으로 대하면 안 되는 거다.


“두 분 지금 밖에서 뭐 하세요? 후식 나왔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동주는 식당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지만, 둘 사이의 싸늘한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희건은 지은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식사는 1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박 팀장은 연이어 희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택시를 타고 회사로 돌아갔다. 지은과 동주는 만월 그룹으로 돌아가기 위해 건널목으로 향했다.


“잠깐만.”


희건이 둘을 불러 세웠다.


“동주 대리, 난 지은 대리랑 근처에서 볼일 좀 보고 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 있어.”


동주는 가자미눈을 하곤 지은과 희건을 번갈아 쳐다봤다.


“무슨 일인데요? 일에 관한 거면 저도 알아야 하잖아요. 같이 갈래요.”

“동주 대리는 2시에 대리급만 들어가는 회의 있잖아. 거기 가야지. 그리고 우리 회사랑 다운 커뮤니케이션과의 계약 관련 이야기니까, 굳이 있을 필요 없어. 어서 들어가.”


동주는 희건과 지은을 번갈아 쳐다보며 뭉그적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회사로 향했다.


“계약 관련해서 의논할 게 아직 남았나요?”


지은은 동주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희건에게 물었다.


“그런 게 있어. 따라와.”


희건은 그들이 방금 나왔던 일식 음식점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곤 홀에 들어가 앉았다.


“여긴 왜요? 뭐 놓고 가셨어요?”


지은이 물었다.


“너 밥 거의 못 먹었잖아.”

“네?”


희건은 매니저로 보이는 여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제가 아까 주문한 거 주세요.”


곧 종업원이 다양한 생선으로 만든 회 초밥을 가져와 지은의 앞에 놓았다.


“너 초밥 귀신이잖아. 어서 먹어.”


지은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희건의 배려에 감동한 것 같았다.


“괜찮아요. 저 별로 배 안 고파요.”

“그래도 먹어. 동주 표정을 보아하니 오늘도 넌 야근이야.”


지은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초밥을 한참 쳐다보더니, 하나 들어 입에 넣었다.


‘뭐야, 엄청나게 맛있잖아.’


입에서 살살 녹는 회를 느끼며 지은은 양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최대한 막고 있었다.


“맛이 괜찮네요.”

“아까 니가 나한테 어차피 나랑 동주랑 같은 편이라고 했지? 맞아. 같은 편이야.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난 우리 회사와 내 팀원 편이야. 그래서 좀 불편한 일이 있어도 쉽게 네 편을 들어줄 수가 없어. 이건 너와 나와의 관계 이전에 팀장으로서의 의무이고 책임이야.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마.”


지은은 초밥을 입에 하나 더 넣었다.


“섭섭하게 생각 안 해요. 아깐 제가 너무 화가 나서 무례하게 굴었어요. 죄송합니다.”

“우리 사이에 죄송할 것까지야.”


희건이 너스레를 떨든 말든, 그녀는 초밥을 간장에 콕 찍어서 야무지게 먹어댔다. 아까 입맛 없다던 지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희건은 그런 그녀를 보며 ‘큭’하며 웃음을 뱉었다.


“왜 그래요?”


지은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예전에 우리 도쿄 여행 갔을 때, 회전 초밥집 갔던 거 기억나?”



6년 전


도쿄의 여름은 그야말로 뜨거웠다. 우에노 공원의 까마귀조차 시원한 나무 그늘에 하루종일 숨어있을 정도니 말이다.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괴로운 듯 눈을 한껏 찌푸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 더위를 잊은 커플이 있었다. 바로 지은과 희건. 둘은 온종일 오다이바를 돌아다니며, 온천욕과 쇼핑몰 구경, 그리고 수족관 관람으로 알찬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오후 6시가 넘어서야 게스트 하우스로 향하는 지하철에 올라탔다. 둘은 뒤늦게 몰려온 피곤과 배고픔에 눈이 반쯤 풀려있었다.


“지은아, 우리 저녁으로 뭐 먹을래?”


희건이 지은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물었다.


“글쎄. 지금 상태론 철근도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굉장히 배고파.”

“그러니까 뭐 먹고 싶냐고. 여행 마지막 날인데, 특별히 땡기는 거 없어?”


지은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 첫날에 갔던 회전초밥집 말이야. 주인아저씨가 굉장히 친절했던. 거기 또 가면 안 될까? 좀 비싸긴 해도 지금 우리 여행 비용 많이 아꼈잖아. 나 비상금 가져온 것도 아직 안 썼어.”


희건은 그녀를 보며 빙긋 웃었다.


“당연히 되지. 나도 비상금 하나도 안 썼어. 안 그래도 나도 그 초밥집 생각이 계속 나더라고. 오늘 거기서 배 터지게 먹자!”


둘은 한껏 신이 나서 우에노를 향하는 지하철을 타러 갔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간. 주말이라 그런지 우에노의 초밥 거리는 관광객과 현지인들로 북적였다. 희건과 지은은 전자상가 사이에 위치한 작은 회전초밥집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그곳은 다른 곳에 비해 사람이 없었다.

희건과 지은은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하얀 밥 위에 도톰한 생선살이 올라간 초밥들이 회전 벨트 위에서 어서 빨리 입에 넣어달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곧 키가 작고 머리가 반쯤 벗겨진 사장님이 다가와, 생강과 고추냉이가 든 접시를 그들 앞에 내려다 놓았다. 그는 지은과 희건을 기억하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맛있게 먹으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곧 둘은 빙빙 돌아다니는 초밥들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 시장이 반찬이라 했던가? 연어 뱃살, 성게 알, 조갯살, 장어, 도미 초밥 등 희건과 지은은 싹싹 비운 초밥 접시로 탑을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탑이 어깨를 넘었을 때쯤, 잠시 젓가락을 놓은 지은이 물을 마시기 위해 컵에 손을 뻗었다.


“으악!”


우연히 밖을 본 지은은 깜짝 놀랐다.


“왜 그래?”


희건의 시선도 밖을 향했다.


“오빠, 왜 저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창문을 통해 희건과 지은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중 여학생들은 희건을 보며 속닥거렸고, 가족 단위의 사람들과 남자들은 희건과 지은의 옆에 산더미처럼 쌓인 접시를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둘을 구경하는 사람들 중 몇몇은 둘을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식당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몰래 희건의 사진을 찍는 여학생도 있었다.


“지은아, 우리가 너무 많이 먹었나 봐. 사람들이 우리 옆에 쌓인 접시를 보고 신기해서 그런 것 같은데? 물론 잘생긴 날 구경하는 여학생들도 있고.”

“오빠, 우리 나갈까?”


민망한 듯 지은이 희건에게 속삭이며 말했지만 그는 오히려 당당했다.


“이런 상황 한두 번 겪어? 그냥 먹어. 어차피 우리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 사람들 볼 일도 없잖아. 우리가 길거리에서 불법으로 회 떠서 먹고 있는 것도 아닌데, 뭘.”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서. 돈 엄청 나올 것 같은데.”


눈대중으로 접시를 센 지은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신경 쓰지마. 돈 모자라면 사장님한테 잘 말씀드려서 아르바이트라도 하지 뭐.”


희건은 연어 뱃살로 만든 초밥을 지은 앞에 놓으며 말했다. 지은은 ‘에라이,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초밥 점령에 집중했고, 가게 안은 본격적으로 둘을 보러 온 손님들로 북적였다.

둘의 식사는 초밥 접시가 머리 높이까지 올라와서야 끝이 났다. 초밥이 목구멍까지 찰 정도로 실컷 먹은 지은과 희건은 계산을 하기 위해 카운터 앞에 섰다. 지은은 초밥값이 상당히 많이 나올 것 같다는 불길한 확신이 들었다. 한쪽에서 주문을 받던 주인아저씨가 웃으면서 허겁지겁 계산대로 달려왔다. 순간, 그녀의 등으로 땀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6년 후


“초밥 60만 원 어치 먹었던 거요? 그걸 어떻게 잊어요?”


지은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진짜 대단했지? 그때 사장님이 우리 때문에 가게에 손님이 몰렸다면서, 고맙다고 초밥값을 안 받아서 망정이지. 정말 아르바이트할 뻔 했잖아.”

“팀장님, 그때 정말 돈 모자랐으면 진짜 일할 작정이었어요?”


희건이 지은을 잠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바보야, 당연히 아니지. ATM기에 갔다 오려고 했지.”

“어쩐지. 그것도 모르고 저 그때 진짜 많이 걱정했어요. 뭐, 다 지난 옛날 이야기지만.”


지은의 말에 희건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말 참 섭섭하게 하네. 다 지난 옛날 이야기라니.”

“이제 와서 그런 추억거리 꺼내봤자, 소용없잖아요. 지금 우리 관계도 썩 화기애애하지도 않고요. 괜히 불편해질 수 있으니까 그런 이야긴 이젠 하지 말죠.”

“정말 너무 하네. 알았어. 정 그렇다면 이제 아무 말도 안 할게. 밥이나 먹어.”



식사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온 지은을 기다리고 있는 건 동주 대리가 손수 마련한 일 폭탄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지라 지은은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일을 처리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은 퇴근 시간이 훌쩍 넘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아까 지은과 저녁 약속을 한 수혁은 어서 퇴근하자고 말했지만, 지은은 미안한 표정으로 먼저 가라는 손짓을 했다. ‘오늘도 틀렸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수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주도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더니 퇴근할 채비를 했다.


“어디가세요?”


지은은 산더미 같은 일을 남기고 짐을 싸서 일어서는 동주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퇴근이요.”

“지금 퇴근하면 남은 일은 어떻게….”


지은은 자신도 모르게 애절한 눈빛으로 희건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낮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 그는 지은의 눈빛을 모른 척하며 퇴근 준비에 한창이었다. 동주는 그런 지은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어차피 잡무잖아요. 그 정돈 김 대리님이 혼자서도 할 수 있는 부분 아니에요?”

“그래도…”

“저 오늘 약속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저희가 귀찮은 일 안 하려고 그쪽 회사에 하청준 거잖아요. 그 귀찮을 일을 같이하면 안 되죠. 하청준 의미가 없잖아요.”

“뭐라고요? 하청이요?”


지은이 발끈하자, 희건이 두 사람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


“퇴근할 사람을 빨리 퇴근하고, 남아서 일할 사람은 빨리 일하고 퇴근해. 괜한 말다툼하지 말고.”


희건의 말에 동주는 지은에게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이곤,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아까 좀 섭섭하게 굴었다고 아주 대놓고 동주 편을 드네? 팀장 없는 난 서러워서 살겠나.’


지은은 울컥했지만 하는 수 없었다. 동주 말대로 지은은 을이었고, 그녀는 갑이었다. 을은 갑을 위해 존재하니까, 지금 상황이 좀 억울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설령 지나간 연인이 갑이라도 말이다.



3시간 후, 사무실에 남아 있는 사람은 지은 뿐이었다. 다른 팀에 늦게까지 일하는 사람이 보였지만, 지은이 있는 공간은 텅 비어있었다. 그녀는 뭔가 슬프고 억울한 느낌이 스물스물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고 일에 몰두했다. 그래, 딱 3일이다. 딱 3일만 더 견디면 된다.


“뭐야, 아직 있었어?”


느닷없이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지은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희건이었다.


“팀장님, 퇴근하신 거 아니었어요?”

“퇴근은 무슨. 근처에 미팅이 있어서 거기 갔다가 자료 챙겨갈 게 있어서 다시 왔어. 근데 넌 왜 아직 사무실이야. 일이 그렇게 많아?”


아까와는 다르게 다정하게 들리는 희건의 목소리. 지은은 왠지 울컥하는 마음에 어리광부리듯 대답했다.


“좀 많아요. 혼자 하기엔 벅찬 것 같아요.”

“그래?”


희건은 지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 서류 봉투를 들어 올렸다. 지은은 희건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일은 내일 동주 대리랑 같이하고 인제 그만 들어가봐’라는 말 정도는 그의 입에서 나오지 않을까하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녀의 바람이 통한 걸까? 희건을 지은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내 잘생긴 얼굴 감상 중이야?”

“아니거든요!”


김빠지는 희건의 말에 지은은 퉁명스럽게 대답을 하곤, 몸을 컴퓨터 쪽으로 획 돌렸다.


“일 열심히 해.”


희건은 지은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희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섭고 서러우니 잠깐이라도 사무실에 같이 있어달라는 말이 입가에 맴돌았다. 하지만 이 말을 내뱉으면 예전의 감정에 휩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입을 꾹 닫았다. 저 남자에게 또다시 의지하면 안 된다.

지은은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컴퓨터 자판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때, 희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은아!”


지은은 자신도 모르게 기대에 찬 표정으로 희건을 바라봤다. 희건은 손을 들어 천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갈 때 불 끄고 가.”

‘저 인간이 진짜!’


지은은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 주먹을 꽉 쥐었다.



어느덧 11시 30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일이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반면, 다른 사무실엔 아직도 한참 일에 열중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들 눈이 퀭해져선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몇몇은 의자를 젖혀 잠시 쪽잠을 청하기도 했다.


‘이제 조금만 더하면 돼!’


지은은 얼른 마치고 갈 요량으로 속으로 ‘파이팅’을 힘차게 외친 후, 다시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탁~!”


웬 낯선 남자의 손이 지은의 책상에 에너지 음료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임 대리님?”


수혁이였다. 그는 늘 그렇듯 지은을 향해 방긋 웃고 있었다.


“김 대리님한테 바람맞고 친구들이랑 이 근처에서 맥주 한잔했거든요. 집에 돌아가려는데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어서, 왠지 대리님이 있을 것 같아서요. 응원차 들렀어요.”

“아, 고맙습니다.”


감동 받은 걸까? 지은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일하는 내내 서러웠던 기분도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일이 아직 많나 봐요. 뭐 좀 도와드려요?”


친절한 수혁 말에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니에요. 다 끝났어요. 30분 정도 있다가 집에 갈 거예요.”


수혁은 기지개를 쭉 켜더니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택시 타고 집에 가려고 했는데, 술 좀 깨고 운전해서 가야겠어요. 맥주 딱 한잔 마셨으니까 물도 좀 마시고 30분정도 있다가면 되겠네요. 가는 길에 집에 데려다 줄게요. 집이 어디예요?”

“흑석동이긴 한데…”


지은의 입에선 정중한 거절 대신 집 주소가 흘러나왔다. 아마 몹시 피곤한 탓이겠지.


“가는 길이네요. 같이 가요.”


천사처럼 다정한 그의 말에, 지은의 입가에 미소가 넘쳐흘렀다.



일을 마친 지은과 수혁은 지하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수혁은 조금은 머뭇거리는 얼굴로 지은에게 말을 걸었다.


“대리님, 남자친구 있어요?”


지은은 그런 질문 많이 받아본 듯, 건조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니요.”


수혁의 얼굴이 살짝 밝아진 것 같았다.


“아, 그렇구나. 내일, 아니 12시 넘었으니까 오늘이죠? 오늘 밤 우리 팀 회식 있는데 같이 가요.”


지은은 조금은 싫은 내색으로 되물었다.


“저도요? 전 이 회사 사람이 아닌데.”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같이 일하는데 가야죠. 갈거죠?”

“네, 뭐…”

‘하청업체 직원도 그런 델 끼워주나?’


탐탁지 않은 지은의 얼굴을 살피며, 수혁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진짜 남자친구 없어요? 얼굴도 예쁘고, 버젓한 직장도 있고. 남자친구 없을 수가 없는데.”

“진짜 없어요. 일하면서 바쁘게 살다 보니까 남자까지 챙길 겨를이 없다고나 할까.”

“남들은 일하면서 남자 잘만 사귀던데.”

“전 두 가지에 집중을 못 하는 성격이거든요.”


지은이 장난스레 말하자, 수혁은 크게 웃었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는지, ‘땡’ 소리가 났고 문이 열렸다.


“팀장님?”


엘리베이터 안엔 희건이 있었다. 그는 한 손엔 화이트 초콜릿을, 다른 손엔 커피를 들고 있었다. 그는 수혁과 지은이 함께 있는 걸 보고는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수혁 대리는 친구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

“잠깐 사무실에 들렀는데 대리님이 일하고 계시더라고요. 마침 집도 같은 방향이고, 대리님 일도 거의 다 끝났다고 해서 집에 같이 들어가려던 참이었어요. 그런데 팀장님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손에 든 건 뭐고요?”


희건은 애써 표정을 정리하며 대답했다.


“내가 먹고 싶어서 주전부리 좀 샀어. 아무튼 집에 조심히 들어가. 김 대리도 잘 가고요.”


무뚝뚝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가는 희건. 지은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생각에 잠겼다.


‘저 화이트 초콜릿 혹시…’



6년 전,


“여기까지만 데려다 줘. 우리 집 여기서 3분도 안 걸려.”


지은은 웃으며 희건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왜~에? 집 앞까지 가. 이렇게 캄캄한데.”


희건은 아쉬운 듯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벌써 10시가 넘었어. 오빠도 집에 얼른 가야지. 금방 차 끊겨”


똑 부러지는 지은의 말에 희건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팔에서 손을 뗐다. 그리곤 백팩에서 화이트 초콜릿을 꺼냈다.


“웬 초콜릿이야?”

“너 저번에 초콜릿 카페 갔을 때 화이트 초콜릿 잘 먹었잖아. 그때 생각나서 샀어.”


지은은 초콜릿을 받아들며 신이 난 듯 방긋 웃었다.


“우와~ 안 그래도 완전 먹고 싶었는데. 고마워, 오빠.”

“고마우면 입술에 뽀뽀하기.”


입술을 쭉 내미는 희건. 얼굴이 빨개진 지은은 당황하며 그를 밀쳤다.


“미쳤나봐. 여기 동네가 작아서 나 모르는 사람 없거든?! 빨리 집에나 가!”

“에이~ 너무한다. 선물도 줬는데. 뭐, 할 수 없지.”


희건은 순식간에 지은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싸곤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대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희건의 입술에 지은은 놀란 듯했다. 얼마 후, 조심스레 입술을 뗀 희건은 그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지은은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매만졌고, 희건은 민망한 듯 이내 손을 흔들며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잘 들어가! 내일 봐~”


지은은 더이상 희건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의 돌아가는 길을 바라봤다.

첫 키스. 누가 첫 키스가 달콤하다고 했던가. 이건 달콤한 정도가 아니다. 그 이상이다. 달달함, 부드러움, 행복함. 그 어떤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지은은 좁은 골목을 돌아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주인집이 있는 작은 지하 단칸방. 사실 그녀는 자신이 이런 곳에서 산다는 걸 희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그에 비해 자기 자신이 너무나 초라한데, 집까지 보여주면 더 초라해질 것 같았다. 희건이 자신에게 과분한 존재라는 걸, 지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욕심나서, 억지로 억지로 쥐고 있었다. 놓치기 싫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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