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쏭달쏭한 관계
어제 늦게까지 근무했음에도 지은은 남들과 같은 시간에 출근했다.
얄미운 동주에게 당한 게 분해, 자면서 발차기를 어찌나 많이 했는지 지은의 온몸이 뻐근했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희건과 동주의 모습이 보였다. 지은은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책상 구석구석을 살폈다. 혹시 어제 희건이 들고 있던 화이트 초콜릿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였다.
‘그 초콜릿, 나 주려던 게 아니었나?’
지은은 잠시 멍하게 책상을 바라보았다. 순간, 책상 위로 커피가 놓여졌다. 희건인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봤다.
“어제 잘 들어갔어요?”
순간, 모든 팀원의 시선이 지은과 수혁에게로 쏠렸다.
“밤에 둘이 같이 있었어?”
동주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날카롭게 말했다. 그녀의 손엔 어제 희건이 들고 있었던 화이트 초콜릿이 있었다. 순간 지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둘이 있긴 했죠.”
지은은 왠지 모를 짜증에 애매모호한 답을 했다. 수혁은 그녀의 말에 맞장구쳤다.
“집에 같이 갔지.”
수혁은 지은에게 다가와 앉아있는 그녀의 어깨를 양손으로 감쌌다. 예상치 못한 스킨십에 지은은 깜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어머, 김 대리님,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둘이 진짜 무슨 일 있었어요? 어? 얼굴도 빨개졌잖아!”
동주가 놀라며 말하자, 수혁은 ‘큭큭’ 대며 웃었다. 지은은 빨개진 얼굴을 매만지며 도망치듯 화장실로 달려갔다. 상황을 더 의심스럽게 만들고선 말이다.
물에 적신 핸드타월로 얼굴을 식히던 지은은 두 손으로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꼴이야. 바보같이.’
지은은 다시 빠르게 화장을 고친 뒤, 화장실을 나왔다. 아마 오늘도 할 일이 산더미일 거다. 조금이라도 빨리 일을 해야 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의 손이 지은의 손목을 낚아챘다. 희건이었다! 그는 지은을 비상계단으로 끌고 갔다.
“뭐하는 짓이야?”
희건이 물었다.
“제가 할 말이거든요?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왜 갑자기 사람 손목을 잡고 끌고 와요! 무슨 2000년대 초 드라마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으면 상부에 보고했어요. 아프니까 손 좀 놔요.”
그는 흠칫하며, 지은의 손목에서 손을 떼었다.
“너 도대체 행동거지를 어떻게 하고 다니는 거야. 아침부터 왜 이상한 말이 오고 가? 사람들이 쑥덕이는 거 안 보여?”
희건은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순간, 지은은 속에서 욱하는 무언가를 느꼈다.
“제가 행동거지를 뭘 어떻게 했는데요? 사실 다른 사람들이 다 오해해도 팀장님은 오해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어제 봤잖아요. 늦게까지 야근한 저를 임 대리님이 집에 데려다 준거요. 그게 끝이었잖아요.”
“그게 정말 다야?”
지은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뭐가 더 있는데요? 제가 임 대리님이랑 진짜 밤이라도 같이 보냈을까 봐요? 그런 말을 기대해요?”
생각보다 강하게 나오는 지은의 말을 들은 희건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어제 동주 대리가 저한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을 던져주고 퇴근했어요. 일을 미루고 싶어도, 전 여기에 하청업체 직원으로 왔으니까, 갑이 시키면 해야 하니까 미치도록 열심히 새벽까지 일했어요. 근데 팀장님은 어땠어요? 관심이라도 있었어요? 서류 봉투 쪼가리 가지러 왔다가 그냥 가버리고. 빨리 마칠 수 없는데 빨리 마치고 퇴근하라는 말이나 하고. 솔직히 어젯밤에 임 대리님이 집에 데려다준다고 해서 좋았어요. 안 그랬으면 꼼짝없이 택시 타야 하는데 저 택시 타는 거 정말 싫거든요!”
지은은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다 뱉어냈다. 그녀의 눈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그동안 속상했던 게 다 쏟아져 나온 듯했다. 희건은 놀란 얼굴로 지은을 바라봤다. 그는 생각했다.
‘어떻게 내가 그걸 잊고 있었을까…’
6년 전,
희건과 지은의 200일. 희건은 학생치곤 제법 비싼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둘은 식사도 하고, 레스토랑에서 진행하는 라이브 콘서트도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밤 11시가 훌쩍 지나서야 희건과 지은은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지하철 막차 시간이 간당간당한지라 희건은 지은을 택시에 태워 보냈다. 그로부터 1시간 뒤, 희건은 집에서 지은에게 온 문자 한 통을 뒤늦게 확인한다.
‘오빠, 택시 기사 아저씨 이상해. 내려줄 생각을 안 해.’
지은이 문자를 보낸 시간은 무려 20분 전이었다. 그는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그녀의 핸드폰은 꺼져있었다. 배터리가 나간 것 같았다.
‘택시 번호판에 적힌 숫자가 뭐였더라?’
평소 희건은 지은이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가면 늘 번호를 적어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은 적지 않았다. 아니, 적지 못했다. 지은을 택시에 태웠을 때, 친구에게 전화가 왔었다.
‘젠장!’
희건을 일단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곤 지은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지은의 어머니는 그녀가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경찰서로 달려갔다.
3시간 뒤, 희건은 병원에서 지은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 손, 다리 등 여러 곳이 크고 작은 타박상으로 덮여있었다. 그는 지은을 보자마자 곁으로 다가갔지만, 그녀는 희건을 잠시 쳐다본 후 멍하게 허공을 쳐다보았다. 심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희건은 경찰에게 지은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택시 기사는 2시간 동안 서울 곳곳을 누비며 지은을 끌고 다녔다. 그는 음란한 이야기와 손짓을 하며 지은은 자극하기 시작했고, 겁에 질린 지은은 택시 기사에게 제발 내려달라고 울고불고 애원했지만 그럴수록 그는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좋아했다. 겁에 질린 그녀는 마지막 방법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 뛰어내렸고 다행히 근처를 지나가던 한 여성에 의해 구조됐다. 하지만 택시 기사는 잡히지 않았다.
그때 이후로 지은은 택시 타는 걸 무서워했다. 한동안은 동행이 있어도 택시를 타려고 하지 않았다.
6년 후,
지은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 순간에 눈물이 나다니 꼴불견이었다. 자신에게 윽박지르던 희건의 얼굴도 잊히지 않았다.
지은은 숨을 깊게 들이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도 더는 수혁과 지은의 일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2일 남았어. 그냥 2일만 눈 꾹 감고 참으면 되는 거야. 고객소통캠프 스케줄도 다 짰고, 이젠 이벤트 회사 예약과 캠프 섭외 장소 확인만 하면 돼. 다 끝나면 이딴 거지 같은 곳, 미련 없이 떠날 거야!’
많은 사람이 사무실을 오가며 부산하게 굴었지만, 지은과 희건의 자리만큼은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지은은 최대한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아 점심도 자리에서 샌드위치로 때웠고, 희건은 팀원들을 연신 무표정한 얼굴로 대했다.
“김 대리님, 내부 회의에서 실질적인 업무를 진행할 이벤트 회사로 줌인컴퍼니로 정했어요. 프로그램은 A안으로 가기로 했고요. 급한 건이기 때문에 관련해서 직접 예약 진행이랑 참가자 확인 좀 해주세요. 특히 참가자 150명한텐 메일로 보내드린 내용처럼 전화 좀 돌려주고요.”
동주는 지은에게 업무 폭격을 퍼붓고 있었다. 이제 퇴근 시간이 2시간도 안 남았는데, 동주는 또다시 지은에게 자신이 맡은 업무 전부를 떠넘기고 있었다. 지은은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참았다. 그녀는 ‘을’이니까.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내일 캠프 장소 답사 가셔야 해요. 운전할 줄 알죠? 동행자로는 김은혜 사원이…”
“아니야. 내가 갈 거야!”
수혁이 손을 번쩍 들며 동주의 말을 가로챘다. 동주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임 대리님은 고객소통캠프 쪽 일이랑 상관없잖아요.”
“왜 없어? 우리 팀 일인데.”
“나도 갈 거야!”
멀찍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희건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나도 가요!”
동주 대리도 간다고 하자, 희건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
“동주 대리는 안 가려고 했던 거 아니야? 은혜 씨 보낸다며?”
“제가 언제요? 안 그랬는데요? 내일 제가 갈 거예요!”
‘뭐 하는 거냐, 니들…’
지은은 이 웃기지도 않은 상황에 기가 막혔다.
“그럼 김 대리, 임 대리, 동주 대리,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서 가는 걸로 해. 그리고 오늘 다들 회식 있는 거 알지? 김 대리도 갈 거니까 동주는 좀 잘 챙겨주고.”
지은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회식은 힘들 것 같아요. 이번 주 중으로 끝내야 할 일이 많거든요. 그리고 전 여기 회사 직원도 아니고요.”
희건은 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협력 업체 직원이 파견 근무 와서 고생한다고 부장님이 꼭 데리고 가라고 하셨어. 특별히 회식비까지 올려주셨고. 그리고 동주 대리는 김 대리랑 퇴근 시간 내로 일 마치고, 둘이 손 꼭 붙잡고 회식 참석해. 김 대리 안 데려오면 어제처럼 책임감 없이 협력 업체 직원한테 일 다 떠넘기고 퇴근한 걸로 생각할 거야.”
“저 일 떠넘긴 적 없어요.”
동주는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어젯밤 12시까지 김 대리는 왜 회사에 있었던 거야?”
동주는 희건의 말에 앙칼진 눈으로 지은을 바라보았다. 지은은 또다시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6년 전,
희건과 지은은 자주 싸우는 편이 아니었다. 그냥 가끔 의견 차이가 있었고, 그런 것들이 쌓이면 살짝 언성을 높이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희건과 지은은 카페에 앉아있었다. 주변엔 커플로 가득했고, 달달했다. 하지만 둘 사이에선 칼바람이 불었다.
“아니라고 했잖아. 내가 너 말고 누굴 만나.”
희건은 최대한 화를 참으며 말했다.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수요일이랑 일요일엔 왜 연락이 안 됐어?”
“말했잖아. 수요일엔 정훈이 형이랑 스터디했고, 일요일엔 가족 모임이 있었다고.”
지은은 한쪽 입술을 한참 깨물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정훈 오빤 그때 창원 집에 내려가 있었다던데? 일요일엔 오빠랑 어떤 여자랑 명동에 있는 거 채원이가 봤댔어. 왜 거짓말을 해?”
“내 뒷조사했어? 내가 못 미더워서?”
“못 미더워서가 아니잖아. 다른 여자, 만날 수 있어. 친구들이랑, 놀 수 있어. 그런데 왜 거짓말을 하냐고!”
“그만하자.”
희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 사이에 오가는 큰 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둘을 주목하고 있었다. 몇몇은 희건과 지은을 아는지 쑥덕이기도 했다. 희건은 지은을 한참 바라보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지은의 눈엔 눈물이 가득 고였고,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건 말건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
6년 후,
‘지글지글.’
돌판에 한우 등심 두 덩어리가 맛있게 구워지고 있었다. 동주, 희건, 수혁, 지은은 모두 숨을 죽인 채 등심이 뒤집어질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이야!”
수혁이 집게를 들고 하나를 뒤집고 나머지를 뒤집으려 하자, 희건이 수혁의 손을 잡았다.
“아직 아냐. 30초만 더! 우리 아버지가 정육점 하셔서 잘 알아.”
수혁은 희건의 얼굴을 바라봤다.
“팀장님 아버님께서 정육점을 하셨던 거랑 팀장님이 고기 굽는 거랑 그다지 상관없다고 보는데요.”
그는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그만큼 고기를 잘 안다는 거지.”
희건은 수혁의 집게를 빼앗아 들고는 고기를 뒤집었다.
“임 대리님, 팀장님 말씀 들어요. 전 팀장님보다 고기를 잘 굽는 사람은 못 봤다니까요. 팀장님이 구워주는 고기가 제일 맛있어요!”
동주의 알랑방귀에 수혁은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동주 대리, 너무 사심 가득한 거 아니야? 그러지 말고, 김 대리님이 저랑 팀장님 중 누가 고기를 더 잘 굽는지 판단해주세요.”
수혁은 자신이 구운 고기와 희건이 구운 고기를 지은의 앞 접시에 놓았다. 지은은 고기를 차례대로 입에 넣었다. 희건은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며 지은의 얼굴을 살폈고, 수혁은 조금 긴장한 눈치였다. 고기를 다 먹은 지은이 입을 열었다.
“똑같은데요.”
간단명료한 지은의 대답에 두 남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똑같다고요? 육즙이 다르잖아요? 육즙이!”
수혁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지은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만 저었다.
“김 대리, 은근 고기 맛을 잘 모르네.”
희건도 섭섭했는지, 한마디 보탰다.
“에이~ 이러지 말고 다들 건배나 해요!”
과열된 고기 전쟁으로 분위기가 냉랭해지자, 동주는 잔을 들어 올렸다.
1차로 고깃집에서 배를 두둑이 채우고, 2차로 노래방에서 음주가무로 신나게 놀아 재끼고, 3차로 미혼자들끼리 포장마차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희건, 동주, 수혁, 지은은 그동안 속 깊숙이 자리한 묵은 때라도 씻어내는 듯 알코올로 몸 구석구석을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모두 한껏 취한 상태였고, 소주 한 잔이라도 더 마시면 테이블에 쓰러질 분위기였다.
“팀장님, ‘아~’하세요~”
1시간째 희건의 입에 낙지볶음을 쑤셔 넣고 있는 동주.
“동주 대리, 이제 그만하지?”
희건이 그녀의 젓가락을 빼앗았다.
“팀장님은 내 마음도 몰라주고!”
동주는 희건을 째려보며 소주 한 잔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어… 어… 그거 마시면 안 되는데…”
수혁은 동주가 잔을 내려놓자마자, 뒤로 꼬꾸라지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튀… 튐… 장님… 정말… 넘흐… 해요….”
동주는 울먹이더니 정신을 잃었다.
“수혁아, 형님은 언제 오신대?”
희건은 자주 있는 일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수혁에게 물었다.
“곧 오신다고 했어요. 아, 전화 왔다. 저 형님 모시고 올게요. 잠시만요.”
수혁은 전화를 받으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진짜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보다. 별꼴을 다 보네.”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지은은 반쯤 풀린 눈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남아있는 소맥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어쭈, 너 주량이 많이 늘었다. 대학 땐 소주 세 잔만 마셔도 취하더니 지금은 제법인데?”
희건이 지은을 보며 말했다.
“당연하죠, 팀장님. 사회생활이 지금 몇 년 째인데요. 클라이언트 접대하려면 이 정도 주량은 필수입니다!”
“아직도 술로 접대를 해? 진짜 어이가 없고만. 그런 경위 없는 놈들과는 상종을 하지 마! 나중에 문제 생겨. 여자애가 겁대가리가 없어.”
지은은 한쪽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부잣집 도련님 마인드는 역시 달라도 뭔가 다르네요. 이봐요, 정희건 팀장님! 사람이 어떻게 일을 가려서 합니까? 더럽든 안 더럽든 먹고살려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거죠. 자존심이 좀 상해도, 좀 비겁해져도 내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에요. 알지도 못하면서.”
“너 진짜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어떻게 6년 전이랑 지금이랑 이리도 똑같아? 나한테 참 관심이 없다.”
술에 잔뜩 취한 지은에게 희건은 답답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이제 와서 왜 팀장님, 당신한테 관심을 가져요? 됐고! 저는 집에 갑니다!”
지은은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곧 넘어질 듯 비틀댔다.
“아이쿠~ 우리 김 대리님, 술을 아주 많이 드셨나 보네.”
다시 포장마차로 돌아온 수혁이 지은의 팔을 잡으며 부축했다.
“형님은 오셨어?”
희건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주차하고 곧 들어오실 거예요. 이동주! 너 아주 혼났다. 형이 벼르고 있어. 집에 가면 니네 엄마한테 다 일러준대!”
수혁은 동주를 향해 말했지만, 그녀는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테이블에 엎드려 미동조차 없었다.
“넌 형님 올 때까지 동주 좀 잘 부탁해. 내가 김 대리 데려다줄게.”
“아니요. 제가 택시로 모셔다 드릴게요. 팀장님은 동주 대리 보내고 얼른 집에 들어가세요. 내일 우리 답사도 가야 하는데, 팀장님이라도 멀쩡하셔야죠.”
단호한 수혁의 태도에 희건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그게….”
“네?”
“아니, 잘 데려다주라고. 김 대리, 술 많이 취했으니까 택시에 혼자 태워 보내지 말고 집까지 꼭 데려다줘! 불결한 짓은 생각도 말고!”
희건의 말에 수혁은 씨익 웃었다.
“팀장님, 저 짐승 아니고 사람입니다. 걱정 마시고, 동주 대리 잘 부탁해요.”
수혁은 지은을 부축하며 포장마차를 나섰다.
희건은 동주를 그녀의 오빠에게 무사히 데려다 주곤 택시에 탔다. 잠이 솔솔 왔지만, 그는 애써 뺨을 때리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신호에 걸렸는지, 택시가 멈췄다. 희건은 무의식적으로 창밖을 내다보았고, 택시를 잡고 있는 수혁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급히 택시에서 내려 그에게 달려갔다.
“너 왜 여기에 있어?”
“어? 팀장님!”
수혁은 한 손에 생수병을 들고 있었다. 조금 난처한 얼굴이었다.
“지은이는?”
“아… 대리님, 택시 타고 가셨어요. 제가 기사님한테 생수 좀 사 온다고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했는데 못 들었는지 그냥 출발하시더라고요.”
희건은 놀란 얼굴로 수혁을 바라보았다.
“뭐? 택시 번호는?”
“택시 번호가 뭐요?”
“지은이가 탄 택시 번호판 번호가 뭐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희건에 모습에 수혁은 놀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가끔 적기는 하는데… 너무 경황이 없어서…”
“그럼 무슨 택시였어? 콜택시? 개인택시?”
수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개인택시는 아닌 것 같았고, 그냥 자주 보는 주황색 택시였던 것 같은데….”
“였던 것 같다고? 똑바로 말 못 해? 주황색 맞아? 확실해?”
“아마도…요…. 팀장님, 왜 이렇게 정색을 하세요? 잘 갔겠죠. 제가 버스에 태워 보낸 것도 아니고.”
‘퍽!’
수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희건은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나 두 번 말 안 해. 지금 당장 그 입 다물고 꼼짝 말고 있어.”
희건의 갑작스러운 태도에 수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로선 이해가 안 됐다. 도대체 자기가 무슨 큰 잘못을 했기에 이러는 걸까. 무엇보다 희건이 수혁에게 이렇게 화낸 적은 없었다. 정색에 손찌검이라니.
“팀장님…”
“내가 두 번 말 안 한다고 했지!”
희건은 수혁에게 싸늘하게 말한 후, 급하게 스마트폰을 꺼내 지은에게 전화했다. 수혁은 그런 희건의 태도가 아무래도 이상했다.
‘왜 저렇게 오버하는 거야?’
희건은 몇 번이고 통화 버튼은 눌렀지만, 수화기 너머로 지은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얼굴이 벌겋게 부어오른 수혁에게 물었다.
“언제 택시 탔어? 지은이.”
“30분 정도 됐는데요.”
“이 시간에 여기서 흑석동까지 얼마나 걸려?”
“15분이면 갈 거예요. 지은 대리가 전화를 안 받아요?”
“젠장!”
수혁은 허공에 거칠게 발길질을 했다.
그 시간, 지은은 생전 처음 가는 길을 걷고 있었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고, 거리는 아직 어둠으로 가득했다. 사람은 없었지만, 택시 타는 것보다 이게 더 나았다. 그 일 이후 제법 시간이 흘렀어도 혼자 택시 타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수혁이 택시를 태웠을 때도 얼마 못가 급히 내렸다. 그냥 걸어가는 게 나았다. 오늘 유난히 6년 전 그날 일이 또렷이 떠올랐다.
‘20분 정도만 더 걸으면 되겠지?’
지은은 자주 타는 버스 노선을 떠올리며 길을 걸었다.
10분쯤 지났을까. 지은은 버스 정류장을 지나고 있었다. 정류장 의자엔 노숙자로 보이는 남자가 누워있었다. 그는 멍한 눈으로 지은의 다리를 쳐다봤다. 기분 나쁜 시선. 그녀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순간, 남자가 정류장에서 일어서더니 지은에게 달려와 그녀의 손목을 ‘턱’하고 잡았다.
“흐흐… 아가씨, 위험하게 이런 밤에 혼자 다니면 어떡해? 누가 따라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흐흐… 흐흐…”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말을 하는 남자. 기겁한 지은은 그의 손을 뿌리치곤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계속 계속 뛰었고 건물 뒤편에 몸을 숨겼다. 손이 덜덜 떨렸다.
‘엄마… 엄마한테 전화하자…’
지은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하려는데 ‘탁’하고 손에서 핸드폰이 미끄러져 내렸다. 손이 너무 떨려 핸드폰을 주우려 해도 자꾸만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아아.. 진짜 왜 이래…”
지은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택시도 못 타서 이런 못난 상황을 만든 자신이 너무나 싫었다. 지은은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양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했다.
“찾았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희건이었다. 뛰었는지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고 지은을 바라보며 안도하고 있었다. 그는 허리를 굽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그의 목을 와락 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누가… 쫓아왔어… 그 사람이 내 손목을 잡았는데…”
희건은 지은의 등을 토닥였다.
“이번엔 내가 너 찾았잖아. 괜찮아. 아무도 안 쫓아와.”
지은은 한참을 울고 나서야 겨우 진정됐다.
“일어나. 집에 가자.”
희건이 지은을 일으키자, 그녀는 되려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찌나 뛰었던지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듯했다. 희건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업혀.”
“아니에요. 여기서 조금만 쉬면 걸을 수 있어요.”
“니 다리가 언제쯤 움직일 줄 알고. 업혀, 어서.”
머뭇거리던 지은은 희건의 등에 몸을 실었다. 넓은 등. 참 따뜻했다.
6년 전,
학교 근처에 있는 허름하고 작은 술집엔 학생들로 가득했다. 한쪽 벽에 붙은 저렴한 가격의 메뉴판은 왜 그곳이 북적이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지은은 테이블에 엎어져 있었다. 그녀 앞엔 먹다 남은 골뱅이 소면과 소주잔이 놓여있었다. 건너편에 앉은 지은의 친구, 채원이는 난감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희건이 술집으로 뛰어들어왔다. 채원이는 희건을 보자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빠, 여기요~!”
희건은 테이블에 엎드린 지은을 보고는 한숨을 지었다.
“얼마나 마신 거야?”
“별로 마시지도 않았어요. 소주 세 잔? 얘 원래 술 못 하잖아요. 오빠, 진짜 미안한데요. 저 기숙사 통금시간 때문에 빨리 일어날게요. 지은이 좀 잘 부탁해요.”
채원이는 서둘러 술집을 나섰다. 희건은 정신을 못 차리는 지은을 업었다. 헤어지자며 크게 싸운 후로 벌써 3번째 있는 일이었다.
누구와 사랑을 한다는 게 뭐 이렇게 복잡한 일인지… 그냥 간단하게 사랑하면 되지, 왜 자꾸 의심하고, 오해하는지 희건은 알 수 없었다. 희건은 지은이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믿어줬으면 했다.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 따위에 귀 기울이지 말고 오직 자신만 봐줬으면 했다.
따뜻하고 넓은 등. 지은은 ‘내가 또 이 남자 등에 업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헤어지자고 매몰차게 이야기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난 또 이러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도 했다. 지은은 이런 식으로 질척대는 자신이 정말 싫었다.
“내려줘.”
정신을 차린 지은이 말했다.
“너 많이 취했어. 데려다줄게.”
“아니, 내려줘.”
“그냥 있어.”
“아니, 내릴래.”
단호한 목소리에 희건은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내려놓았다.
“다음부턴 누가 불러도 오지 마. 내가 술 마시고 어떻게 되어도 상관 말고.”
지은은 차갑게 그를 대하고 있었다. 너무나 차갑게 말이다.
6년 후,
지은은 화분에 담긴 파릇파릇한 바질을 바라보고 있었다. 탱글탱글한 바질 잎은 보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질이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놀란 지은은 주변을 돌아보며 물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말라가는 화분 옆에서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 지은에게 물 한 컵을 내밀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 익숙한 손이었다. 지은은 고개를 들어 손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이 계집애가 미쳐가지고!”
날카로운 엄마의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이 지은의 엉덩이를 강타했다.
“짝!”
“아…!!!”
지은은 외마디 비명을 지으며 부스스 눈을 떴다. 꿈이다.
“너 어제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아주 떡이 되어가지고. 팀장님한테 내가 얼마나 미안했는지 알아?”
지은은 머릿속이 멍한 듯 눈만 끔뻑끔뻑하며 엄마를 바라보았다. 어제 일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팀장님…이라고? 팀장님이라… 박 팀장님인가… 곽 팀장인가… 음… 어제 분명 희건…’
“팀장님이!!!!!!”
지은의 눈이 커졌다.
“그래. 아주 반듯하고 잘생긴 그 팀장님. 너 업고 들어오는데, 실신 직전이더라. 니가 보통 무거워?”
지은의 엄마는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지은은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쳐다봤다. 10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엄마, 나 이제 깨우면 어떡해! 나 회사 가는 거 뻔히 알잖아!”
지은이 호들갑을 떨며 침대에서 내려오자, 그녀의 엄마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기억 안 나? 팀장님이 너한테 점심 든든히 먹고 1시까지 출근하라고 했잖아. 너 감사하다고 꾸벅 인사까지 해놓고선!”
“엄마… 나 이제 진짜 술 마시면 안 되나 봐. 기억이 안 나….”
지은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엄마는 딱 한 마디 던졌다.
“미친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