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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주 Nov 18. 2022

다정한 경상도 사나이.

설거지를 하다 보니, 석영




내가 중학생이 되던 무렵 무뚝뚝하고 집안일은 커녕 집에서는 가만히 앉아 있을 줄만  경상도 사나이갑자기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밥을 차려주면 식탁에 앉아 숟가락 하나 챙길 줄도 모르고 먹기만 하던 50대 남성이  갑자기 집안일을 시작하게 된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그때부터 아빠 가정적인 남편으로 새로이 태어났다.


매일 저녁 설거지는 아빠 몫이 되었고, 밥솥 사용법 알지도 못던 사람이 밥 담당이 되기도 했으며, 이전과 다르게 집안일을 성실히 하는, 가정적인 남편으로 다시 태어난 아빠는 고등학생이 된 딸의 모닝커피를 3년간 타 주고 출근하며 다정한 아빠라는 포지션까지 얻었다. 서른이 된 지금도 나에게 아빠는 늘 다정한 사람이다. 참 다정한 사람.



"그릇이 얼마 남지 않은 싱크대를 뚱한 표정으로 보다가 안방으로 들어간 엄마를 뒤로하고 한동안 생각했다.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걸 알면서 나는 왜 모르는 척했을까? 왜 당연하다고만 생각했을까."




결혼 허락을 받으러 결혼상대와 집에 갔던 날, 가기 며칠 전부터 엄마 아빠에게 남자 친구가 결혼 락을 받으러 올 거라 귀띔을 했다. 그 며칠 동안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었던 건지 남자 친구가 '결혼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말 생각도 못했던 대답을 했다.


'다른 건 부탁할 게 없다. 그냥 성실하게 살아가면 된다. 너네가 아직 어리니깐, 돈은 성실하게 차곡차곡 모으면 된다. 다른 거보다 설거지만큼은 남자가 했으면 한다.'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간다고 한 날부터 현관문을 열기 전까지 머릿속으로 수백 개의 시뮬레이션 돌렸었다. 엄마 아빠는 뭐라고 대답할까? 정말 많은 예상답안이 있었지만 아빠의 이런 당부사항은 답안지에 비슷한 으로도 없었던 말이었다. '아무래도 남자가 힘이 더 세니깐, 힘이 더 센 사람이 집안일을 잘하잖아.'라는 말을 덧붙이며 남자가 설거지를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 아빠.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말이다. 힘과 집안일 사이의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빠는 예비사위에게 집안일을 잘해주길 바랬고 특히 설거지는 남자가 해야 한다는 말을 강조했다. 아빠의 부탁에 남편은 '영주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겠다.'라고 대답했다. 아빠는 그럴 필요까진 없다며, 지킬 약속만 하라는 말 마무리하며 우리의 결혼을 허락했다.


결혼한 지 4년 차, 지금 그래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있냐고? 그건 아니다. 남편이 자기가 다하겠다며 애를 쓰 하지만, 둘 다 일을 하는 맞벌이 부부라 너무도 당연히 같이 집안일을 하고 있다. 결혼 허락받으러 온 예비사위에게 강조해서 이야기할 만큼 집안일과 설거지가 중요한 이야기였는지 아직도 물어보지 못했다. 아빠에게 '설거지'는 어떤 의미였을까?



"설거지는 어쩌면 사랑의 표현 중 하나가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짐을 지우지 않고, 내가 직접 손에 물을 묻히고 수고를 자처하는 마음. 그건 아마도 사랑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어마어마한 사랑을 받았다."



<설거지를 하다 보니>를 읽다 보니 물어보지 못했던 그날의 아빠의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됐다. 내가 중학생이 됐을 때쯤 일을 다시 시작한 엄마에게 아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애정표현을 했던 거다.


가정주부로 지내던 아내가 다시 일을 하러 나가자 설거지만큼은 자기가 해야겠다고 다짐한 남편, 그래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고, 밥을 짓기 시작했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또, 고등학생 딸이 집에 늦게 오기 시작아침에만 볼 수 있 되자, 아빠는 당신이 할 수 었던 최선의 애정표현으로 모닝커피를 타 주기 시작했다.


귀한 외동딸이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아빠가 예비사위에게 말하고 싶었던 건 정말 설거지를 해달라고 한 게 아니라, 당신이 딸을 사랑했던 것만큼 사랑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였다. 

아빠가 생각했던 최고의 사랑 표현 '설거지'였으니깐.



"퇴근하고 온 아들에게 일을 시키고 싶지 않다는 엄마의 마음은 고맙지만, 나에게도 사랑할 기회를 달라고 말하고 싶다. 만약에, 내가 집에서도 자주 설거지를 하게 된다면, 그러다 가끔 정말 내키지 않는 날이 있다면 이 글을 떠올려볼 것이다. 머리 위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뭉게뭉게 띄워두고 설거지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설거지를 시작했던 50대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는 60대 중반이 된 지금도 여전히 설거지를 한다. 이제는 습관이 된 건지 처음의 어색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누구보다 빠르고 깨끗하게 설거지를 마무리하는 아빠. '직접 손에 물을 묻히고 수고를 자처하는 마음.' 책이 이야기하결혼하기 전까지도 한 번을 설거지 해본 적 없던 나는 아빠에게 어마어마한 사랑을 받았던 딸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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