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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주 Dec 14. 2022

제주도의 밤하늘.

<별빛 너머의 기억들>_ 이새담




누군가 나에게 다시 가고 싶은 여행지가 있냐고 물어보면 나는 단칼에 "제주 천백고지"라고 대답할거다. 제주도와 서귀포를 잇는 1100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해발 1100m지점에서 "천백고지 휴게소"를 만날 수 있다. 천백고지는 2년 전 가을, 2박 3일의 짧은 제주여행 중 별을 보러 가기 위해 들렸던 곳이다. 기분이 안 좋은 날, 밤하늘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풀리고 밤공기 마시는 것만으로도 쓰린 속이 풀리는 나에게 꿈만 같았던 시간. 유명한 곳이라 사람들이 복작복작해 마냥 조용하진 않았지만, 도시의 소음과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의 한적함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곳이다.



난 밤하늘을 좋아한다. 밤하늘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새까만 하늘에 뜨문뜨문 빛을 내고 있는 별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두운 밤, 각자만의 위치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는 별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지나간 추억들이 떠오른다. 저 멀리 과거의 별에서 출발한 빛이 내 눈에 찬다는 사실 때문일까? 별을 보면 과거가 떠오르고 과거의 안 좋았던 기억이든, 행복했었던 추억이든 수많은 기억들이 머리에 가득 채우고 난 과거에 잠시 머물게 된다.



 "언젠가 다시 만났다면 "그때는 왜 그랬어?"라고 묻고 싶은 인연들이 있다. 과거의 일을 구태여 헤집어 봤자 뭐 좋을 게 있겠냐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질문으로 시작되는 대화를 넘어야 조금 더 성숙해질 수 있는 사이. 이런저런 수식어를 덧붙였지만 결론적으로는 '찝찝한 상실'을 겪은 관계 말이다."_<별빛 너머의 기록들>, 이새담




<별빛 너머의 기록들>이라는 책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소우주인 태양계속 여러 천체들이 가진 특징과 일상을 엮은 에세이다.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며 옛 추억에 잠기는 나처럼 책은 태양계 행성들을 떠올리며 작가님의 일상들을 이야기 한다. 별은 그런 존재다. 언제든 가만히 바라보게 되고, 보고 있자면 옛 기억을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존재.



내 인생은 '결혼'이라는 이벤트가 과거에 대한 기록에 아주 큰 역할을 한다. 결혼 이전의 기억에는 힘들었고 외로웠던 시간들이 가득하고, 결혼한 이후의 기억에는 행복한 기억들이 가득하다. 분명 10대 때를 떠올리면 공부한다고 좀 힘들긴 했지만, 학창 시절의 즐거움이 있었다. 스무 살이 된 이후의 삶도 나름의 하루하루 재미를 찾으며 살았다. 취업을 위해 도서관만 한참 다닐 때가 있었지만, 때로는 정신머리를 놓고 친구들과 술만 진탕 마시러 다니기도 했고, 어떤 날은 엄마 아빠와 여행을 떠나 즐겁기도 했으며, 젊은 청춘의 연애에 뜨겁게 눈물을 흘려본 적도 있었다. 그 순간들이 외로웠던 적은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결혼을 하고 난 이후부터 그 순간들 속에 내가 너무 안쓰러워 보이고 외로워 보였다.



지금의 남편은 그런 사람이다. 남들과 다를 거 없이 특별할 거 없는 내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 오늘의 내 이야기를 들으면 오늘도 고생했다 말해주고, 대단하다는 칭찬을 매일같이 해주는 사람. 과거의 나에게도 기특하다는 칭찬을 해주는 그런 사람이다. '천백고지'에 갔을 때도 그랬다. 그 당시 나는 유산을 경험하고 아주 큰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던 시기였다. 한없이 우울해지는 마음에 나름의 힐링을 하자는 생각으로 제주도 여행을 떠났었다. 


별보러 가고싶다는 마음으로 쌀쌀한 11월 밤, '천백고지'를 향해 달린 남편과 나. '천백고지'에 도착해 대충 보이는 계단에 걸터앉아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별이 가득 찬 하늘이 눈에 들어섰다. 이렇게 별빛으로 가득 찬 하늘을 본 적이 있었나? 둘이 손을 잡고 한참을 하늘을 바라보는데, 주변의 소음들은 들리지도 않았고 우리 둘만 있는 듯 온 세상이 고요했다.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은 기분. 


우울함과 상실감으로 가득 차 있던 내 마음은 빛나는 별들이 한 자리씩 차지했고, 이내 아픈 기억들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태양의 빛에 따라 붉은색으로도, 담홍색으로도, 흰색으로도 빛나는 대적점. 이처럼 우리가 세상을 마주하는 눈 또한 각자의 색채로 산란할 수 있다. 타인의 기준과 나의 기준이 전혀 다른 채도와 명도를 지니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자니 그동안 타인과 비슷한 선택을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조금은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결혼을 한 이후, 과거의 내가 안쓰러워 보이기 시작했던 건 나를 특별하게 바라보는 남편의 '눈'덕분이었다. 그냥 늘 괜찮다고 넘겼던 내 감정들에 힘들었을 거라는 위로와 대단하다고 응원해주는 그 사람 덕분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던 과거의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지나간 과거의 나를 위로해주고 토닥여주자 비로소 난 나를 받아들였다. '천백고지'에서도 가만히 손을 잡아주는 그 사람 덕분에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유산의 기억들을 받아들이고 슬픔을 게워냈다. 게워진 자리에는 마주 잡았던 따뜻한 손과 시선에 가득 찼던 반짝이는 별들이 자리 잡았다.



"아예 잊힐 만큼 멀리 있지도, 항상 되뇔 만큼 가까이 있지도 않은 이런 자그마한 추억들. 그것들은 딱 그때만 반짝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유기체처럼 나의 시간대를 흐르며 어떤 순간에는 활발하게 살아났다가 또 사그라들고는 했다. 그렇게 찰나의 기억이 영원한 추억이 되고, 조그마한 과거가 현재를 지탱해 주는 순간이 되면서 추억의 덩어리들은 내 모습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내 과거는 마냥 우울하지도 않았고, 안쓰럽기만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우울한 적도 있었고, 안쓰러웠던 적도 있었던 건 분명하다. 모든 찰나를 행복했다고 기억하려 애쓰던 나는 이제 그러지 않는다. 모든 찰나가 행복하진 않았더라도 나라는 방에 모든 순간을 담고, 모든 나날의 감정을 넣어 놓기로 했다. 모든 별들이 다르게 생겼을 테지만 내 눈엔 별빛들의 아름다움만 가득 차 듯, 결국 내 과거들은 미래에 빛나는 모습으로 도착할 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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