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절은 손을 끊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방법을 모르겠어요.
손절, 원래는 ‘손절매’의 줄임말의 주식용어지만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손=인간관계로 인식하며 관계를 끊는다는 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인간관계론이 출판과 SNS를 넘어 방송가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을 때, 나는 사람은 버리는 쪽으로 방법을 취했다. 그리고 주식도 코인도 사람도 손절한 지금의 내 모습은 한없이 초라할 뿐이다.
나는 사람 한 마디 한 마디에 의미를 둘 정도로 마음이 좁고 예민하다. 그러다 보니 대인관계에서 미움 받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고 에너지를 쓰는 쪽으로 발달했다. 그렇게까지 애써서 인간관계를 유지해야하느냐 물어볼 수 있겠지만 우울한 가정환경 탓인지 외로움에 치명적이라 어쩔 수 없는 생존방식이었다.
나는 참다 참다 말없이 잠수를 탄다. 상대방이 황당해 할 수도 있는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나는 손절 당시의 기억을 평생 앉고 간다. 10년 전, 2학기 복학하고 외톨이로 학교를 다닐 때 한 학번 아래 여자 후배가 같이 연합MT를 가자고 했다. 나는 친구가 없어서 가기 싫다고 그랬고 그 후배는 자기도 친구 없다며 우리 둘이서 놀자고 말했다. 하지만 그 후배는 연합MT 마지막까지 나와 함께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시 조교와 썸을 타고 있었고 두 사람은 연합MT에서 사귀게 되었다. 친구 없는 복학생은 눈치 없이 후배들 주변을 기웃거렸다. 이후 그 여자 후배는 내가 안중에도 없었겠지만 나 홀로 걔를 손절했다.
8년 전, 동기 형에게 대학원에 간다고 그랬다. 죽어라 일만 하다 만화카페를 차린 형의 개업을 축하는 자리였고 나는 나름 15만 원 상당의 피규어를 선물했다. 그러나 형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야, 돈 없는 애들은 공부하는 거 아냐.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취직이나 해.”
끝까지 고맙다는 말도 없이 내게 인생을 훈계해준 그 형을 손절했다.
5년 전에는 나를 너무 좋아한다고 따라 다녔던 동생이 있었는데 스스로 화를 제어를 못하는 성격이라 화가 나면 쌍욕을 하고 분위기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후 사과하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어리고 서툴러서 그런 거라 받아주었지만 나중엔 그 분노에 전염되어 나도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래서 잠수를 탔다.
그밖에 늘 내가 불쌍하다고 밥과 술을 사주었지만 교회를 안 나와서 내가 힘든 거라고 성경말씀만 주구장창 하는 분이 있었다. 또 어떤 이는 자기 생일 때 나 혼자 유일하게 생일 케이크와 파티, 선물을 준비했음에도 내 생일날 6000원 짜리 핸드크림 사준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두고두고 후회하는 손절 사건이 하나 있다. 초중고를 함께한 친구 3명과의 단톡방이 있었다. 당시 나는 박사학위를 받고 강의 1개와 편의점 알바로 생활을 이어가던 시기였다. 박사를 따면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을 거라 기대했기에 학위를 받았던 지라 초라한 현실에 정신과 상담까지 받고 있었다. 원래도 멘탈이 약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 단톡방에 자주 칭얼거렸다. 참으로 고맙게도 친구들은 내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고 심지어 먼저 취업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술과 밥값을 더 많이 지출했다. 그런데 그것에 감사하고 멈출 줄 알았는데 나의 칭얼거림은 끝이 없었고 한 친구가 그만하라고 화를 냈다.
“미안해. 내가 적당히를 몰랐다. 그리고 나 이 방에서 나갈게. 아무래도 계속 너희와 함께하면 너희들한테 기대려고 할 것 같아. 나중에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성공하면 연락할게. 이해 바란다.”
금방 돌아올 줄 알았지만 3년이 된 지금까지 자리를 잡지 못했고 이젠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서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할 지 용기가 나지 않는다. 이 후회를 통해 앞으로 절대 손절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사람을 손절하는 짓 때문에 스스로 외로움을 자초하는 것이라는 배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왜 이렇게 손절하고 싶은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다. 한 지인은 2주 전 약속을 취소하고 다른 날을 잡아 연락 주겠다더니 연락이 없다. 이보다 더 한 사람은 보름 전부터 약속을 잡은 상황에서 전날 식사 메뉴를 고르는데 계속 미적지근하게 말을 흐렸다. 낌새를 챈 나는 “제가 눈치 없었죠?”라고 보냈더니 “네, 괜찮아요.” 라고 답이 왔다. 그 사람은 인사치레 만나자고 한 얘긴데 내가 눈치 없이 계속 만나자고 보챈 꼴이었다. 무려 보름동안 말이다. 또 어떤 사람은 형이라서 돈을 많이 벌어서 술을 사주지만 말의 접속사가 “씨발”일 정도로 욕이 심하고 늘 나를 무시하는 스탠스였다. 만나기 싫어서 요즘 바쁘다고 둘러대곤 있는데 “네가 바빠 봤자 얼마나 바쁘다고?”라고 답장오더라.
마지막으로 나의 가장 큰 손절 상대, 우리 부서 신입이자 나의 부사수다. 그는 아주 미인은 아니지만 밝은 웃음과 성격 때문에 모든 사람들한테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났다. 말도 싹싹하고 놀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으며 삶의 태도에서 강한 자존감 느껴졌다. 하지만 그만큼 매력적이니 1년 넘게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다. 심지어 남자친구는 매주 목요일이면 우리 회사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나도 마음은 있었으나 애인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적당한 선을 유지했다.
하지만 둘이 점심을 먹고, 첫 회식을 하고, 단둘이 회사 밖에서 술을 마시고, 카톡으로 연락하고, 그 사람의 부모님을 뵙고 하면서 내 마음이 점점 커졌다. 심지어 소개팅 자리에서 갑자기 든 생각이 내가 이 사람과 사귄다고 해도 내 부사수에 대한 미련이 아직 남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어떤 날은 그 사람이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나를 만나는 상상도 하다, 또 어떤 날은 혼자 좋아하는 마음만 간직하다 포기한다며 굳이 그 사람에게 속마음을 이야기하진 않고 끌려 다녔다.
그리고 반지하 우리 집 하수구가 역류하던 날, 누구를 짝사랑 하는 것조차 사치라는 걸 인정하게 되면서 이 마음을 과감하게 접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비록 여전히 좋아하고 있지만 그 사람은 아주 나쁜 행동을 한 나쁜 사람으로 자기암시를 걸었다. ‘저런 여자는 나랑 만나도 똑같을 거야.’라고 말이다. 그리고 업무 외 이야기는 전부 읽씹을 했고, 식사나 카페 요청도 거절했으며 반말을 존댓말로 고쳤다.
“쌤, 무섭게 왜 갑자기 존대말 쓰세요.”
“그냥 몸이 안 좋아서요."
부사수는 내게 갑자기 왜 이렇게 변했냐며 무섭다고 말했다. 한 며칠은 눈치 없이 평소처럼 장난을 치다가 다행히 이제는 내가 말을 걸지 않게 되었다. 이정도면 손절은 아닌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