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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왈 Jun 21. 2020

당신의 엿

   

    영화 속 주인공은 이렇게 물었다. “죽기 전에 당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뭐예요? 상대와 그의 답은 같았다.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는 것.”


음식의 맛과 향, 형태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은 먹기 전에 우리의 침샘을 자극하고 긍정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호르몬을 분출한다. 맛있는 음식은 먹는 과정 안에서 우리를 행복감에 젖게 한다. 유쾌함을 선사한 음식에 대한 기억은 긍정의 감정에 둘러싸여 더욱더 오래 잔상을 남긴다. 나는 지금 할머니 엿 생각에 군침이 돈다. 아, 그것을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다시 먹을 수만 있다면. 



    다섯 살 때였을 것이다. 할머니의 집은 내가 사는 집 앞에 있었다. 우리는 상추를 심은 우영팟*을 사이에 두고 한 마당을 공유했다. 드르륵. 나는 할머니 집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솥에는 엿이 가득했다. 그것이 할머니에 대한 나의 최초의 기억이다. 그때 당신의 집과 얼굴의 형체는 송구스럽게도 사라지고 없다. 다만 엿의 맛과 향, 이미지는 내 주위를 맴돌고 있다. 내가 당신에게로 오면 당신은 솥의 엿을 한 숟가락 크게 덜어 내 입속에 잠기게 해 주었다. 그것은 노랑을 띠며 가볍게 흘러버리는 꿀과는 달랐다. 그것에는 진한 고동빛깔과 반짝이는 기름기의 묵직함이 있었다. 입안에서는 고소함과 담백함이 진득하게 머물렀다. 그것은 딱딱하게 굳어있는 날도 있었다. 그럼 당신은 찧어 부서지게 했다. 나는 거울같이 반질반질한 엿의 표면 위로 하얀 눈꽃이 피어나는 모양을 바라보았다. "혼저 옴막 허라 (어서 꿀꺽 먹어라).”  당신의 손에서 나의 입으로 엿 한 조각이 왔다. 그것은 서서히 녹아들어 갔다. 묵직한 단내가 입안에 퍼지고 코끝까지 다가왔다. 아이는 그것에 이끌려 매일 할머니 집을 서성였다.


    엿은 당신에게 간식거리를 넘어서는 소중한 음식이었다. 그것은 당신의 삶 속에서 터득한 영양식, 천연의 약이었다. 옛 제주 사람들은 엿을 만들 때 꿩고기나 돼지고기를 같이 넣어 만들었다. 먹을 것이 귀했던 당시, 단백질, 지방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엿은 일종의 보양식이었다. 할머니는 엿을 삼킬 뿐만 아니라 몸에 바르기도 했다. 다친 곳, 가려운 곳, 욱신거리는 곳 모두 엿을 바르고 그 위에 화장지나 천을 붙였다. 어릴 적 아토피로 가려움에 고생하던 내 팔다리에도 당신은 만병통치약을 종종 발라주었다. 


    엄마와 아빠는 용담 집을 나와 신제주에 새로운 터를 마련했다. 당시 떠오르는 제주의 신도심으로, 꿈을 품고 이주했다. 나는 초등학생이 되었다. 4학년 때 즈음 할머니도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새로 지은 빌라의 1층으로 이사했다. 나는 더는 할머니의 엿에 군침이 돌아 집 앞을 맴도는 그때의 다섯 살배기 아이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당신의 집에 찾아갈 때면 당신은 나를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내가 닮은 당신의 처진 눈의 눈망울이 촉촉해지고 틀니를 뺀 이 없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모양이 이를 알려주었다. 당신의 집은 어둠 속에 있었다. 내가 찾아갈 때에야 마치 빛이 가까스로 입구를 찾아온 듯했다. 햇살이 드리운 할머니의 온몸엔 여전히 엿을 바른 휴짓조각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엿은 갑자기 사라졌다. 당신에게 치매가 느닷없이 찾아왔다. 당신은 엄마 아빠가 지은 집으로 와서  한켠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상 집은 당신만을 남겨두고 텅 비어 있는 때가 대부분이었다. 엄마, 아빠, 나, 동생, 모두 각자의 일로 바빴던 것이다. 당시 나는 아침 일찍부터 학교에 지각할까 부랴부랴 집을 나서서, 방과 후 학원에 들렀다 저녁 늦게 귀가하는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당신은 방 안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었다. 당신은 가까스로 굽은 종아리를 움직여 자신의 방 옆 화장실만을 들릴 수 있는 상태였다. 어느 날이었다. 하교 후 마치고 집에 잠시 들렀는데 당신은 화장실에 엎어져 있었다. 머리에는 붉은 피가 흘렀다. 이후 당신은 집을 떠났다. 당신의 엿은 나의 기억에서 지워졌다. 



    불현듯 당신과 엿 생각이 났다. 망각의 벽이 허물어진다. 엿의 묵직한 단맛과 단내가 나의 감각 속에 나도 모르게, 고스란히 새겨졌었나 보다. 기억의 힘은 애석하게도 당신과 공유한 음식에 대한 기억 중 이것만을 선명하게 재생한다. 당신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해 후회스럽다. 아쉬움에 필사적으로 헤엄쳐 떠돌아다니는 파편들이라도 잡아보려 애를 쓴다. 이것이라도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지금이라도 당신을 기억한다면. 내가 당신을 잊지 않는다면 당신이 저세상 어딘가에서 이곳으로 오고 싶을 때 잠시라도 올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당신이 지금쯤 행복해하고 있지 않을까. 







우영팟* 제주어로 집 주위에 있는 작은 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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