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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Jul 03. 2019

버티기만 하는 게  능사는 아니겠지만,

    어떤 일을 버티기만 하는 게 능사는 아니겠지만, 버티지 못해 회한이 남았던 날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학업을 마치고 갓 시작한 첫 직장생활의 짧은 포기가 가장 큰 미련이었다. 신입은 나 혼자여서 사무실의 온갖 대화와 움직임에 날을 세워 긴장했고, 아직 익숙지 않은 일에 같은 질문을 여러 번 했으며, 회식자리의 유연한 처신은 필수기술이었다. 회의할 때는 유능한 사원의 가면을 쓰느라 말 한마디 쉽게 던지지 못했고, 뻣뻣하게 살다 못해 몸에 어디라도 쥐가 날 지경이었다. 사표를 내버렸다. 딱 6개월이었다. 살다가 문득 삶이 팍팍해질 때 한 번씩 그 시절을 되새긴다. 그 때 내가 좀 더 독했더라면, 좀 더 버텨서 1년을 채웠더라면 지금의 난 여전히 그저 엄마이기만 할 지 궁금했다.


  1주일에 하루 2시간 하는 연필인물화반에 등록했다. 내가 상상한 걸 내가 직접 그려보고 싶은 맘이 근래 가득해졌기 때문이다. 정말 오랜만에 5절 스케치 북에 4B연필을 잡고 선부터 그렸다. 인물화반이지만 인물은 훨씬 나중에 그린다고 했다. 소나기 빗줄기 그려내듯 선을 죽 죽 도화지에 채워냈다. 왠지 시원했다. 선생님도 선에 힘이 있다며 좋다고 하셨다. 다음은 톤 만들기였다. 연필만 써서 완전 검정 톤부터 거의 흰색에 가까운 톤까지 그라데이션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었다. 가장 진한 검정사각형을 보고 선생님은 "이렇게 진하게 그리시는 분은 드문데요, 정말."하며 추어주셨다. 칭찬으로 "내게 지금껏 모르던 소질이 있었나..."싶은 맘에 마음이 가벼웠다. 정육면체, 원기둥, 구를 그리는 동안 그렇게 콧노래를 부르며 화실에 다녔다.


  어느 날 드디어 넘어야 할 장벽이 나타났다. 벽돌이었다. 그 녀석은 모양도 정확한 직육면체가 아니었고, 심지어 모서리 부분이 깨져있기도 했다. 질감도 매끈한 게 아니라 잔잔하게 거친 것이 정녕 돌이었다. 열심히 집중했지만 선생님 말씀은 점점 이해하기 힘든 외계어가 되어갔다. "가장자리든 안쪽이든 라인이 아니라 톤으로 그리는 거에요. 원본을 자세히 보고 1번과 2번을 그리면서 조금씩 주변으로 확장시켜 가는 거지요.", "묘사는 나중에 톤을 먼저. 톤이 잘 깔리면 묘사가 덜 되어도 완성도있게 보이죠."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들었다. 무슨 말인지 그 순간엔 알 듯도 했다. 하지만 라인만 보이는데 톤으로 그리라니.... 나는 벽돌을 뽀갤 것처럼 노려보았지만 답답함이 커지는 만큼 자신감은 떨어져갔다. "여기 그리지 말라고 했었는데 또 그리셨네. 지난번에 분명히 말씀드렸었는데. 기억 안 나세요?" 하도 지웠다 그리기를 반복해서 지운 자국이 깨끗이 없어지지 않는 나의 벽돌 한 모서리를 고쳐주며 푸념하듯 선생님이 물었다. "회원님은 예전에 무슨 과셨어요? 혹시 이과?" 문과, 이과 중 어느 쪽이 덜 못나 보이는 대답인지 판단이 되지 않아 어설프게 우물거렸다. 그 순간엔 어쩐 일인지 주변의 다른 분들도 조용했다. 평상시엔 그리도 말이 많으시더니만.... 언제부터인가 그림수업에 갈 채비가 서서히 늦어지고 발걸음에도 힘이 들지 않았다.


  벽돌만 그린지 세 달은 되어가나 싶었다. 같이 그리시던 분들 중 한 분이 어느 날은 내 벽돌을 보고 "어머, 아직도 벽돌이시구나. 열심히 하시길래 다 그리신 줄 알았더니." 어이없는 예쁜 미소를 지으며 내게 한 방 날렸다. 나는 영혼없는 헛헛한 큰 웃음으로 순간을 넘겼다. 열심히 했다기 보다는 수업에 한 번도 빠지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수업에 빠질 좋은 핑계를 여러 개 만들 수도 있었고, 갑자기 그만둘까도 했지만 한 주, 한 주 꾸역꾸역 버텼다. 친구들 덕분이었다. 나는 그림수업을 끝내고, 친구들은 탁구운동을 마치고 항상 라운지에서 만나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고 그 날 그날의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보면 움츠러들었던 내 마음의 굵고 얇은 주름들이 서서히 펴지고 그랬다. 친구들은 내가 그린 그림에 관심과 흥미를 보이고 잘 그렸다고 듣기 좋은 말들을 해주었다. 진지하고 무게있는 말들이 아니더라도 기분이 좋아져 아는 척 설명도 했다. 그런 좋은 시간들이 나의 그림 수업 참여를 지속할 수 있도록 버티게 해 준 힘이었다.


  짧은 직장 포기의 경험에서 비롯된 마음가짐에서인지 부부관계의 어려운 때를 두어 고비 가까스로 버텨낸 것 같다. 공부가 오래 계속되는 남편에 대한 원망과 도움받을 데 없는 가사와 육아의 짐이 고비의 원인이었다. 육아의 최고난이도 구간도 그럭저럭 버티어내고 있는 것 같다. 청소년기인 아이들이 사교육 광풍에 휘말리지 않도록 내 자신을 챙기고 또 챙긴다. 아이의 성적과 나의 사랑을 셈법으로 머리굴려 거래하지 않고 온전히 품어주고자 매일매일 의지를 다진다. 내가 이렇게 버텨올 수 있었던 건 나의 상황을 들어주고 이해해주던 친구들 덕분이었다. 그들의 따뜻한 관심과 진심어린 경청이야말로 때마다 어려움을 헤쳐 나갈 용기를 솟게 한 근원이었지 싶다. 내가 그림수업에 꾸준히 다닐 수 있었던 것이 탁구 친구들 덕분이었듯이 말이다.


  세상일이 좀 우스운 게 그렇게 버티다 보면 저절로 상황이 변하기도 하나보다. 그림수업 선생님이 그만두셔서 폐강이 되는 바람에 더 이상은 애써 버티지 않아도 되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벽돌을 넘기고 나니 이제 좀 그림의 맛을 알 것 같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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