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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May 19. 2021

사람이 고플 때 훌쩍 나섭니다, 동네 시장으로

엉덩이대고 책을 두어 시간만 읽어도 종종 눈이 뻑뻑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피가 쏠리는지 종아리는 땡땡해지고 허리도 굳어 좌우로 잘 돌아가지 않는다. 그럴 때는 훌쩍 일어나 산길을 걸으며 몸에 쌓인 정적을 훌훌 털어내는 게 좋다. 초록으로 우거진 숲의 맑은 새소리, 흙냄새, 형형 색색 앞다투어 피는 꽃들과 눈 맞추어 걷다 보면 땀이 나면서 몸이 금방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오래 앉았던 것도 아닌데, 정신이 멍해지고 기분이 자꾸 무기력하게 가라앉을 때도 있다. 사람들과 정답게 주고받는 눈길과 말소리가 고픈 날이다. 당장 약속을 잡을까 싶다가도 거리두기로 여전히 머뭇거려진다. 이런 날은 그저 장바구니 하나 챙겨 들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게 좋다. 우리 동네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인 시장으로 말이다. 도착하기도 전, 시장 어귀부터 벌써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으로 활기가 넘실댄다.


삼거리 길을 따라 수산물, 건어물, 제철 채소, 육고기, 과일과 떡, 꽈배기, 떡볶이 등 온갖 주전부리까지 없는 게 없는 우리 동네 시장은 인근 지역에까지 인기가 많다. 그래서 늘 손님들로 북적대고, 싼 물건 값을 외쳐대는 상인들의 장사 소리가 그득하다. 시장을 한 바퀴만 돌아도 무겁고 멍하던 기분은 어느새 흩어져 버리고, 물건 사며 사장님들과 주고받는 한 두 마디 말에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무릇 사람살이는 타인과 주고받는 친밀감을 통해 기쁨과 에너지를 얻어 돌아간다고 한다. 시장에서 만나는 분들은 가족도, 친구도 아닌 그저 물건을 사고파는 '' 만날 뿐이지만, 요즘처럼 사람의 정이 그리운 때는 그마저도 적절한 위안이 된다. 게다가 20년이 넘도록 오랫동안 드나든 시장인지라, 웬만한 분들은 이제 낯이 익고, 자주 들르는 단골 가게는  친근하다. , 가끔은 뜻하지 않은 도움받은 적도 있어 시장 여기저기 훈훈한 추억들이 배어있다.


작년 여름, 주민들을 대상으로 메리골드 청 만들기 행사를 진행했을 때였다. 시장통에 있는 상인연합회 건물 2층을 빌렸는데, 전기 핫플레이트 예닐 곱 개를 동시에 쓰다 보니 자꾸 전력이 다운되었다. 시간은 계속 지체되고,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무작정 밖으로 나가 건물 인근 상인들께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요청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맙게도 쓰시던 것까지 쓱쓱 닦아 3개를 모아 주셨다.


가스를 채워 돌려드리며 정말 고맙다 말씀드리는데 상인들은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러냐며 손사래를 치셨다. 그분들의 신속한 도움이 아니었다면 행사 내내 초조해하다 낭패를 겪었을 것이다. 평상시에 나와 아무 상관없다 여기며 지나치던 붕어빵 아주머니와 채소 좌판 아주머니의 소탈한 친절이 마음에 오래도록 남은 일이었다.


필요한 문구류가 있으면 언제나 든든한 마음으로 들르는 가게도 있다. 촘촘히 붙은 시장 상점들 가운데에 있는 '대도 문구'라는 작은 문방구이다. 작은 애가 초등 시절 전교 임원에 얼떨결에 출마하게 되었을 때, 손재주도 시간도 없던 나는 유세에 필요한 용품들을 만들 걱정에 동동거렸던 적이 있다.


불현듯 시장에 이 문방구가 생각났고, 급한 마음에 아이손을 잡고 한걸음에 달려갔다. 옆 학교 학부모이기도 하셨던 문방구 사장님은 '주먹 쥐고 검지만 핀 손 모양의 기호 1번 피켓'과 전단지 코팅 등 필요한 것들을 꼼꼼히 챙겨주셨다. 덤으로 유세에 대한 조언에 파이팅까지 해주시니 조바심쳤던 마음이 금세 누그러졌다. 별 기대 없이 들렀다가 좋은 기운 듬뿍 받았던 날이었다.


고맙기로는 '딱 좋아 반찬가게'도 빼놓을 수 없다. 끼니 걱정에서 헤어날 길 없는 요즘, 믿고 사 먹을 수 있는 반찬가게가 얼마나 요긴한지 모른다. 나물류나 밑반찬들도 맛있지만, 나는 주로 더덕무침이나 양념 가오리찜, 오징어순대 같은 별식을 산다. 신문에서 보던 대로 '용기내 캠페인'을 흉내내어 담아갈 용기를 드리니 사장님이 대환영하신다. 늘 넉넉하게 더 담아주시는 이 사장님은 사실 작은 아이 동창의 고모님이시다. 아이들 크는 얘기며, 맛있었던 반찬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돌아서면 주신 반찬만큼 마음도 풍성해지곤 한다.


시장이라고 장만 보는 건 아니다. 우리 동네 시장은 때때로 경품잔치나 타로카드 봐주기 같은 행사도 열어 방문한 손님들에게 깜짝 즐거움을 선사한다. 상인회 회장님의 금은방 앞 길 가에 천막이 세워지고 손님들은 경품 회전판을 돌려 맞춘 상품을 타간다. 번호표를 받은 손님들은 섭외된 타로카드 대가들에게 차례로 상담을 받는다. 큰 애가 고3이던 작년에 나도 한 번 들렀다가 근심을 덜기도 했다.

 

시장으로 오가며 아는 지인들과 우연히 만나 나누는 길 가 한담도 시장이 있어 누리는 즐거움이다. 약속하고 만나는 게 아니라, 우연히 그저 발 길 닿는 대로, 시간이 맞춰지는 대로 각자 볼 일 보러 오가다 아는 이를 만나면 이상하게 더 반갑다. 이야기는 대개 인사와 안부이지만, 때로는 꽤 진지한 이야기들도 오간다. 한담이 길어지면 아예 처음부터 어디 야외 커피집이라도 갈 걸 그랬나 싶기도 하지만, 서서 이야기 나누는 그 시간이 정겨울 뿐이다.


그렇게 시장을 한 바퀴 돌아 집에 갈 때가 되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씩씩해진다. 물씬 풍기는 고소한 깨 볶는 냄새에 없던 허기가 동해 그런지도, 과일가게 아저씨들의 힘찬 외침의 기운을 받아 그런지도 모른다. 깊이 가라앉았던 생의 욕구랄까, 의지랄까 그런 것들이 다시 손에 잡히는 것 같다.


아마도 사람 사는 냄새와 소리가 그득한 그곳에서 격 없는 위안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선뜻 소탈한 호의를 베풀어 주시는 분들과 어울려 살고 있음에 감사하게 되었음이리라. 붕어빵 아주머니도, 문방구 사장님도, 반찬가게 고모님도, 시장 이웃님들 모두 시장에서 오래오래 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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