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어디에나
큰아이가 고1, 작은아이가 중1일 때 막 1학기를 마치고 온 가족이 미국 캘리포니아 알바니로 1년을 지내다 왔다. 입시가 코 앞인 고등학생이 있는데 너무 무모한 건 아니냐는 걱정들을 주변에서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긴 인생에서 외국의 학창생활 경험이 더 큰 자산이라고 믿었고, 더욱이 큰 아이도 가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가기 싫어한 건 작은 애였다. 친구들과 멀쩡히 잘 살고 있는데 굳이 왜 가야 하냐고, 자기는 끌려가는 거라고 못내 억울해했다. 가서 겪을 새로운 경험이 너를 성장시킬 거라고 반은 달래고 반은 우겼다. 남편은 계속되던 격무와 한국의 끈적한 인간관계에 지칠 대로 지쳐 멀리 떠나고 싶어 했고, 나는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었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가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의 캘리포니아행은 실행되었다. 사실 큰아이가 7살 때 살던 동네로 다시 가는 거라 동네 분위기며 지리며 낯설지 않았기 때문에 전적인 모험은 아니었다. 비행기에 오를 때만 해도 온 가족이 여유롭고 한가로운 생활로 화목하게 충전돼서 돌아오겠거니 막연한 기대와 함께였다.
늘 그렇듯이 맞닥뜨린 현실은 참 많이 달랐다, 살 집을 보러 다니고 결정하고, 은행 계좌를 열고, 중고차를 사는 초반 과정에서 남편과 나는 둘 다 긴장 백배해서 서로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여차하면 바로 다툼으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앞으로 남은 생을 끝까지 함께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자라며 예기치 않게 부부관계의 어떤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 상황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미국에 오는 걸 바랐던 아들 녀석은 친구 사귀기가 어려웠는지 네 달쯤 지난 후부터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엉엉 울지를 않나.... 나도 날이 갈수록 괴로워졌다. 곁다리 이야기인데, 미국인들은 참 먹거리에 신경을 안 쓰는 것 같다. 아침은 당연히 대충, 점심식사 시간도 따로 정해져 있지도 않고, 저녁이나 좀 챙겨 먹는 듯. 식재료와 식사를 매우 중요시하는 나는 참 이해가 안 되는 문화이다. 결국 내 손으로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밥 준비는 물론 애들 도시락 두 개씩에 오후 간식, 어쩔 땐 저녁식사까지 거의 매일 준비를 했다. 외식해 봤자 웬만하면 맛이 없어 내가 만들어 먹는 게 나은 적이 많았다. 여하튼 '내가 밥하려고 여기 왔나..' 하는 자괴감이 점점 커지고, 끝도 없이 계속되는 불만에 찬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그래도 맘을 잡아보려고 했던 아주 작은 시도들을 잊지 않았던 점이다. 불쾌한 일상에 좋은 점은 뭐가 있나 찾아보려 했다. 처음엔 찾기 어려웠지만 하나, 둘 씩 찾아지고 그 좋은 면들에 맘을 의지하게 되니 편안한 마음이 점점 커지며 조금씩 따뜻해진다고 느껴졌다. 우선 저녁 운동을 할 수 있었다. 아파트 단지 안에 작은 체육관이 있어 언제든 편안히 오갈 수 있어 가능했던 일이다. 덕분에 체중도 좀 줄고 건강도 챙기게 되어 참 감사했다. 또, 영어가 약해 가장 걱정이 되었던 딸이 첫 3주 정도만 힘들어하고 이후엔 친구들과 방과 후에 과제도 같이 하고, 생일 초대도 받으며 곧잘 어울리고 적응해서 놀랍고 대견했다. 삶이 지루하고 외롭다고 느낄 때 가끔씩 나처럼 영어가 어설픈 외국 친구들이랑 밥도 먹고 수다도 떨며 잠시나마 위로가 되는 시간들을 가질 수 있음도 참 고마운 일이었다. 배우자에 대한 험담은 인종과 국적에 상관없이 공감하는 글로벌 이슈였다. 또 한 가지! 창 밖으로 보이는 소나무 가지에 솔방울을 물고 와 열심히 갉아먹는 통통한 다람쥐들은 너무 귀여웠고, 대 여섯 마리씩 떼 지어 한가로이 뒷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야생 칠면조들을 멍하니 보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찾으려고 보니 고맙고 감사한 일이 널렸었다.
이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는데, 어리석은 나는 나쁜 면에만 온 관심을 기울이고선 살기 힘들다고 투덜대고 헉헉댔다. 사실 생각해 보면 나쁜 면도 정말 나쁜 게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나쁘다고 단정하는 것일 뿐. 세상일이 내 맘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맘먹기에 따라 난 여전히 행복할 수 있구나 하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행복할지 안 할지는 내가 정할 수 있다는 것. 법륜 스님이 말씀하시길 '마음에 시시비비를 분별하는 마음이 없으면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다' 하신다. 불평, 불만이 생기는 마음의 바닥에는 내 식대로 옳고 그르다고 고집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마음을 놓아버리면 화도 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실천하기는 너무 어렵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한다면 충분히 새길 말씀이다.
미국에 다녀온 지 수 년이 넘었다. 가족들이 모두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각자의 일상을 살고 있다. 미국으로 떠날 때 바랐던 대로 여유와 한가로움으로 충전되어 돌아온 건 아니지만, 복병처럼 나타난 실망감, 낯섬, 관계의 불편함, 지루함, 외로움을 겪고 난 후 제자리에 돌아와 느끼는 안도감, 소속감, 버텨내 준 서로에 대한 고마움이 있다. 결국 한 고비를 함께 넘겨 낸 가족 간의 끈끈함이 남았다면 나만의 오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