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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Nov 26. 2021

정자기증으로 태어난 아이, 나중에 어떻게 설명해 줄까?

생식 의료기술의 명과 암, <결혼은 안 해도 아이는 갖고 싶어> 서평

길에서 엄마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는 아기를 보면 나도 모르게 함박웃음이 지어진다. 옆 집에서 4, 5세쯤 된 어린아이의 말소리라도 건너 들려오면, 내 자녀들의 어릴 적 앙증맞던 모습이 돌연 그리워진다. 완경이 되어가는 마당에 늦둥이를 볼 무모함은 없으니 자식들에게 어서 결혼해서 손주를 낳아 달라고 억지를 부려본다. 아무리 적어도 둘은 낳는 게 좋겠다고 기회만 되면 노래를 부른다.


고작해야 고등학생이고 갓 대학생인 아이들은 기겁을 하며 손주는커녕 결혼마저 전혀 생각이 없다고 꿈 깨란다. 혼자 살기도 벅찬 세상에 평생 책임감에 눌려 살고 싶지 않다며 말이다. 주변에 20대 자녀를 둔 지인들에게 물어봐도 비슷한 반응이다. 때가 되면 결혼하고 아이 낳는 걸 당연하게 여기던 나의 세대와 많이 다르다는 게 실감 난다.


이런 생각 중에 작년 이맘때쯤, 눈이 번쩍 떠지도록 놀라운 일이 있었다. 바로 기증받은 정자로 비혼 출산을 결행해 화제가 되었던 방송인 사유리 씨의 일화다. '결혼 후 출산'이라는 굳건한 사회적 통념을 깨고 홀로 출산을 감행한 그의 용기에 감탄하던 기억이 난다. 결혼 생각이 없다는 우리 집 애들도 아이는 낳아 기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하고 허황된 기대감마저 잠시 들었다.  


그렇게 응원하는 마음으로 육아 프로그램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사유리 씨 아들을 보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중에 저 아들이 아빠에 대해 궁금해하면 어떻게 설명을 해주려나 말이다. 또, 성장한 아들은 자신의 출생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궁금하고 말이다. 마침 최근에 출판된 고바야시 야쓰코의 <결혼은 안 해도 아이는 갖고 싶어>에서 일본과 미국 등 다른 나라들의 사례를 통해 그 궁금증을 다소 풀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일본은 비혼 출산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생물학적 아빠의 존재를 아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한다. 엄마들이 정자 기증 사실을 자녀에게 비밀로 하기 때문이다. 익명 원칙으로 정자 기증을 받는 병원 측도 쉽사리 기증자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니, 아이들은 사실을 알기도 어렵고, 혹여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에는 극심한 정체성 혼란을 필연적으로 겪는다고 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의 유전정보를 이어받았는지, 기증자는 어떤 사람인지 등 자신의 유전적 뿌리를 알고 싶은 것은 당연한데, 알 수 없는 정체성의 공백과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고통스럽기 때문이다.(p.92)


싱글 여성의 출산 선택의 권리가 그로 인해 태어난 아이들의 행복추구와 부딪치는 지점이 아닌가 싶다. 한편, 생식 의료의 역사가 더 오래되고, 이미 정자, 난자의 거래가 상업적으로 활성화된 미국에서는 생물학적 아빠를 찾는 일들이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아이들이 태생을 알 권리를 존중하고, 발생 가능한 유전적 질환을 파악하고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나 보다. 생물학적 아빠를 찾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때도 있지만, 더러는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정자가 아닌 엉뚱한 사람의 기준 미달 정자로 출생한 사실을 알게 된 경우도 있다고 한다. 또는 근친혼을 피하기 위해 동일 기증자로부터 출생할 수 있는 아기의 수를 제한하는 규정을 어기고 더 많은 아기를 태어나게 한 일도 있다고 한다.


생명 잉태와 출산의 과정에 생식의료 기술이 접목되며 수반하는 피할  없는 상황들인  같다. 게다가  기술의 상업화는 수요자로 하여금 취향과 선호에 맞는 정자와 난자를 선택하게 할 수 있다. 실제로 현재 20곳이 넘는 미국의 정자은행 중에는, 원하는 성별은 물론, 생김새, 체형  신체적 특징과 기증자의 아이큐, 학업능력, 성품의  내향성 경향까지 고를  있는 곳이 있다고 한다. 이는 자식에게 최고의 유전자를 물려주고 싶은 인간의 잠재된 욕망을 일깨우는 일이 되어 버린  같다.


그렇다면, 최고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아이는 과연 부모의 의도와 바람대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내는지 궁금해진다. <결혼은 안 해도 아이는 갖고 싶어>에서 다룬 드론 브레이크 씨의 사례는 이런 점에서 참고가 된다. 노벨상 수상자와 아이큐 180 이상의 남성에게만 정자 기증을 받는 정자은행 출신의 드론 브레이크 씨. 그는 어려서부터 천재성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고, 훌륭한 과학자가 되리라 기대받았다.


하지만, 또래집단과 다른 데서 오는 소외감과 기증 정자 출신이라는 사실을 조롱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며 불우한 사춘기를 보냈다. 어머니와도 갈등이 깊어져 결국 어머니 곁을 떠나 성인이 된 지금은 평범한 초등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고 한다.(p.132~)  유전자의 우월성만을 믿고 자녀의 빛나는 미래를 꿈꾸는 생식 의료 기술 이용자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주는 일화가 아닌가 싶다.


그 밖에도 생식의료 기술의 발달과 상업화는 감당키 어려운 윤리적 문제들도 지속적으로 초래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남편 사후에 그가 남긴 냉동정자로 태어난 아이는 죽은 남편의 법적 친자로 간주될 수 있는가? 또는 법적으로 엄마의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 논란인 경우도 있다. 난자를 기증한 생물학적 엄마, 대리모를 해서 낳아준 엄마, 그리고 이 모든 걸 의뢰하고 태어난 아이를 양육하는 엄마 중 어느 쪽이 진짜 엄마일까?(p.103, p.151)


우리는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다. 숭고한 생명 탄생의 과정이 속임수와 인간의 욕망이 끼어드는 비즈니스의 장이 되어버리는 것 같고, 당연하게 통용되던 부모의 개념이 흔들린다. 생식의료 기술의 발달로 인한 자유선택의 혜택은 누리고 싶으면서도 그로 인해 펼쳐지는 윤리적 혼란은 점점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양날의 검 같은 이 생식의료 기술의 상업적 이용은 한계 없이 계속되어도 괜찮은 걸까? 혹시 그 대가로 우리는 인간과 가족, 부모-자녀 관계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영원히 잃게 되는 건 아닐까? 이 마법 같은 기술을 어떤 방식으로 윤리적 왜곡 없이 사용할 수 있을지 사회적으로 심층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우리나라는 현재 정자기증에 의한 비혼 출산이나 비배우자의 정자기증에 의한 출산은 법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자식들에게 결혼은 안 해도 자녀는 갖도록 권해보려던 가벼웠던 마음이 자못 진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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