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인문학자 고미숙 님은 책, <나이 듦 수업>에서 사람의 생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누었을 때, 50대는 봄, 여름이 지난 가을의 초입쯤 된다고 한다. 열정적으로 살아낸 봄과 여름을 뒤로하고, 생로병사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자신과 세상을 재탐색하고 지혜를 쌓아나가는 때라고 한다. 중년이란 이리도 멋진 때일진대, 일상 속의 나는 삶에 대한 통찰은커녕 어처구니없는 실수들을 저지르느라 정신이 없으니 어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오랜만에 타 지역에 있는 동창들을 만나기 위해 홀로 기차를 타러 가는 길이었다. 글자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긴장해서 전자티켓의 출발일과 시간을 거듭 반복해서 확인했다. 언젠가 출발시간을 헷갈려 기차역에 두 시간이나 미리 나가 가족들의 원성이 자자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엔 별 탈 없이 제시간에 맞춰 기차에 올라 배정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는 막 마음을 놓으려던 참이었다.
또래로 보이는 한 여자분이 손에 쥔 티켓과 좌석번호를 번갈아 보시며 내 옆에 다가섰다. "저기, 좌석이 10C 맞으세요? 제가 10C인데..." '헉, 이건 또 뭔 일이야?' "아, 여기 16호차 아닌가요?" 급하게 다시 전자티켓의 좌석 위치를 보고는 깨달았다. 내가 맘을 놓고 앉았던 좌석은 17호차 10C였던 것이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16호차 칸으로 이동하며 '도대체 내가 왜 이럴까' 싶었다.
또 한 번은 저녁 청소 중이라 방마다 돌아다니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세탁물을 전해주시는 세탁소 사장님이었다. 화면을 보고, "아, 네 네. 잠시만요..." 이쁘게 하이톤으로 답하고는 무심결에 전원 버튼을 눌러 통화를 끊어버렸다. 1층 공동 현관문 문열림 버튼은 누르지도 않은 채.
깜짝 놀라 문을 열어드리려고 다시 이 버튼, 저 버튼 급하게 눌러댔지만 통화가 끊긴 뒤라 열어드릴 수가 없었다. 사장님이 재호출 하시겠지 싶어 인터폰 앞에서 서성이는데 초인종이 안 울린다. 하필 소파에서 지켜보던 아들 녀석만 푸하하하 웃어젖히며 "엄마, 방금 뭐 하셨어요?"하고 놀린다. 같이 웃지만, 비밀을 들킨 것처럼 민망하다. 정말 자신을 못 믿을 지경이 되어가는 것 같다. '나, 정말 어떡하지..?'
기억력 저하로 인해 답답할 때도 많다. 여행 다녀온 장소를 기억 못 하고, 하고 싶은 말의 단어가 재까닥 안 떠오른다. 어느 날은 글을 쓰다가 사자성어 하나가 가물가물하니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떠오르지 않았다. 도대체 생각이 나질 않아 약이 오를 지경이었다. 물고 늘어진 끝에 단어를 떠올리고는 그게 뭐라고 기억해 내는 데에 이런 노력을 기울여야 하나 싶어 참 허망했다.
단어뿐 아니라 사람도 잘 기억하지 못하곤 한다. 동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아주 낯익은 여성 분이 눈에 띄었다. 이미 가까이 오셔서 반사적으로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고 지나쳤지만, 도대체 어디서 뵈었던 분인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머릿속으로 한참을 끙끙대고 나서야 예전에 인물화 그리러 다닐 때 화실에서 뵈었던 분임을 기억해냈다. 그래도 기어코 생각났으니 다행으로 여긴다.
줄기차게 저지르는 나의 실수들을 목격하는 가족들은 이런 나를 웃음거리로 삼기 바쁘다. 남편은 자기 얼굴은 잊지 않는 게 천만다행이라고 놀려대고, 아들 녀석은 줄거리를 기억 못 하니 엄마는 다시 보는 영화도 볼 때마다 재미있겠다나 뭐래나... 어처구니없는 내 실수들에 나도 기가 차서 가족들과 깔깔대고 웃어넘기지만, 마음 한 켠에는 정말 치매검사라도 받아봐야 하나 걱정스러운 마음이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실수들을 모아놓고 보니 또 우울해지려고 한다. 어렸을 때는 총명하단 소리도 곧잘 들었더랬는데...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닌 것 같은 이 낯설고 불편한 기분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중년 이후의 인지력, 기억력 저하는 통상적으로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며, 이를 막기 위해서는 취미활동이든, 운동이든, 악기든 새로운 걸 배우는 게 좋다고 제안하는 의사와 학자들의 기사나 책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심기일전하고 다시 그림이나 그려볼까 싶어 동네 평생학습관이나 교육프로그램을 찾다가도 코로나 핑계 대며 섣불리 시작을 못하고 있다. 명쾌해 보이는 전문가들의 제안을 당장 실천하기는 멀어 보이지만, 자꾸 의도치 않은 실수를 하며 한 가지 느낀 점이 있다. 실수가 쌓일수록 자연스레 스스로가 못 미더워지면서 내 말이, 내 판단이 옳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예전의 오만방자함이 슬슬 꼬리를 내리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실수나 미숙함을 마주칠 때 '어머, 저이도 실수하는구나. 에고, 민망하겠다...' 헤아려지며 동병상련의 마음이 드는 것이다. 실수하는 사람에 대해, 실수에 대해 한결 너그러워짐을 느낀다. 하루는 은행에서 볼 일을 보는데 담당 은행원이 입사한 지 정말 며칠 안 된 완전 신입사원이었다.
간단한 업무였는데도 뭐든지 하나하나 옆 직원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일이 진행되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다 보니 내 눈치 살피랴, 옆 직원 눈치 보랴 힘들어 보였다. 예전 같으면 지체되는 시간만큼 짜증이 올라올 법도 한데 어쩐 일인지 그 신입직원의 안절부절이 더 신경 쓰였다. 안쓰러운 마음에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 저 급하지 않아요." 하며 씩 웃어 주었다.
나이 들어 자꾸 엉뚱한 실수를 하는 것에는 어쩌면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가을 벼처럼 좀 더 너그럽고 겸손하게 살라고 일러주는 자연의 섭리 같은 것 말이다. 청춘 시절에는 가차 없는 면밀함으로 세상을 정확하게 앞으로 나아가는데 기여했다고 한다면, 나이 들어 자꾸 실수하는 것은 실수한 이들을 너그럽게 보듬어 그들이 여전히 힘내며 살 수 있는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라는 뜻은 아닐지...
고전 인문학자 고미숙 님이 말하는 50대의 통찰과 지혜란 혹시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닐까? 실수투성이로 자꾸 쪼그라드는 자존감을 애써 회복해 보고자 굳이 의미 부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