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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Jun 12. 2022

쓰레기 줍다 만난 근사한 어른

경사진 좁은 산길을 거침없이 뛰어 내려가시는 폼이 남다르다. 6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 힘든 속도와 가벼움이다. 관악산 둘레길 쓰레기 줍기를 하러 모인 날, 모임 장소를 잘 몰라 헤매고 있는 다른 멤버를 데리러 가겠다고 나선 여성분이셨다. 반백의 짧은 단발머리를 단정히 뒤로 묶고, 가벼운 배낭 하나 맨 채 잽싸게 내려가시는 걸 보며 감탄이 절로 나왔다.


돌아온 그분에게 어쩜 그리 산을 잘 타시냐고 감탄하며 팔을 잠시 잡았는데, 팔이 근육으로 딴딴하다. 와, 보통 분이 아니셨다. 체구는 자그마하시지만 그 날램과 단단함이라니! 있는 근육마저 유지를 못해 출렁살만 늘리고 있는 내가 어찌나 한심해 보이는지... 50도 채 안 되어, 나이 들면 누구나 약해지는 거라고 자꾸만 당연시하는 나의 나태함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쓰레기 줍기가 끝나고 여러 명이 주운 걸 모아보니 못해도 50리터 쓰레기봉투 두 봉지 양은 족히 되어 보였다. 그때, 그분이 나서서 집이 가까우니 본인이 가져가서 분리배출하겠다고 하셨다. 그 오물들 속에서 재활용품을 일일이 가려 따로 버리는 게 가장 번거로운 일인 것 같은데, 그 번잡하고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시겠다 하니, 또 깜짝 놀랐다.


나와 다른 분들이 각자 가져가서 나눠 버리자고 극구 말렸지만, 그분은 사양하시고 쓰레기를 챙겨 들고 집으로 향하셨다. 그 뒷모습에 눈길이 머물며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어떻게 이러실 수 있지? 솔선수범이란 말은 어린 시절 모범상 상장에나 박혀있던 문구에 불과한 게 아니었나? 나이 60대에 이걸 이렇게 실천하시는 분이 계시다고?!' 참 놀랍고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분이 모임에서 보여주신 행동들이 계속 떠올랐다. 탄탄한 자기 관리가 감탄스러웠고, 솔선수범으로 함께 한 우리들마저 선하게 물들여 주신 것 같아 고마웠다. 생각할수록 참 멋있는 분이고, 나도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나이 들면서, 닮고 싶은 분을 일상에서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 드문 일이었는데, 실로 오랜만에 근사한 인생 선배를 만난 것 같아 어찌나 반갑던지…


아마도 닮고 싶지 않은 행태를 주변에서 너무 자주 보기에 더 감격했던 것 같다. 걸핏하면 나이와 지위를 들먹이며 권위를 앞세우고, 자기 잇속 챙기느라 규정을 어기고도 부끄러운지 모르는 뻔뻔한 행태가 만연하다. 타인의 고통은 외면하면서 누군가의 치열한 노력으로 잘된 일에는 어떻게든 숟가락 얹어보려고 애를 쓴다. 남의 허물에는 눈을 부릅뜨고 달려들지만 정작 자신이 책임질 일에는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버린다.


나열하자면 끝도 없는 사례들을 너무 많이 보아왔다. 그런 상황을 목격할 때마다 ‘나는 절대 저러지 말아야지!’ 결심해 보지만, 나 또한 살아오면서 부끄러운 행태들을 답습했던 적이 적지 않다. 지나고서야 ‘아차, 잘못했구나!’ 반성을 해도 대개는 같은 행태를 반복하고야 만다. 나도 별수 없는 어른이란 자괴감에 씁쓸하기 일쑤이다.


그런데, 그분은 어떻게 그런 근사한 어른이 되셨을까? 뭔가 특별한 사연이 있는지 궁금했다. 나중에 살아오신 내력을 짧게 들어보니 가족에서 비롯된 역경이 만만치 않았다. 한 번도 용서하기 어려운 남편의 바람을 예닐곱 번이나 겪으셨고, 또 공부로 한껏 기대했던 자녀들이 고등학교를 모두 자퇴해 버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맑게만 보이는 그분의 표정 아래 그런 깊은 상처와 근심이 드리워져 있었다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절망과 참담함의 나락에서 그분이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부단한 마음공부의 결과라고 하신다. 타인에게 돌렸던 비난과 원망의 화살을 거두고 스스로를 겸허히 돌아보았다고. 스스로를 낮추려 노력하자 가족을 대하던 날 선 태도가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가족들의 긍정적 변화도 서서히 찾아왔다고 한다.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고 작은 역경이 닥쳐오면 보통 쉬운 길을 택하기 마련이다. 즉, 원망과 분노 등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에 파묻혀 남 탓하기 급급하다가 그저 시간이 흐르는 대로 살아갈 뿐이다. 굳이 스스로를 참회하고 성찰하여 변화하는 어렵고 힘든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분은 그 어려운 길을 택하는 용기를 내었던 것이다. 남 탓만 하지 않고 스스로를 먼저 돌아봄으로써 결국 모든 가족의 변화를 이끌어 내었다는 점이 참 대단하다고 여겨졌다. 그분이 산에서 보여준 솔선수범과 단단한 삶의 태도는 오랜 시간 수양한 그런 성찰의 결과였음이 자연스레 이해가 되었다. 또 삶에서 어렵게 체득한 바를 사회에서 만난 우리와 나눠주셔서 감사했다.


그러고 보면 근사하게 나이 든다는 건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그분처럼 사는 것도 좋은 예가 되는 것 같다. 삶의 온갖 풍파와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스스로 성찰하고 수양하여 자신만의 삶을 단정하게 다시 세우는 것. 이런 경험이 바로 어른의 연륜이고, 그 경험의 과정에서 비로소 어른으로서의 값진 지혜와 통찰이 깃드는 게 아닐지...


팔팔한 청춘과 가능성 많은 젊음이 늘 선망의 대상이고 환영받는 세상이다. 곡절 많은 삶의 파고를 이미 넘어본 어른으로서 갖출 수 있는 연륜과 지혜와 통찰을 연마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근사한 어른은 조용히 실재하고 계셨다. 닮고 싶은 어른다운 어른의 부재에 목마르던 중에 이런 멋진 분을 뵙게 되어 가슴 뭉클하게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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