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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Jul 03. 2022

주부가 분주해지는 장마철

"엄마, 머리 아프고 졸린데 에어컨 켜면 안 돼요?"

"에고... 선풍기 켜도 많이 덥니?"


무기력한 눈빛으로 딸이 묻는다. 하필 기말고사를 코 앞에 두고, 등록한 독서실의 에어컨이 고장 나는 바람에 주말 동안 집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습도가 높으니 불쾌지수도 덩달아 최고치이다. 딸의 답답한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선뜻 에어컨을 켜주지 못하고 주저한다. 20년이 넘은 우리 집 에어컨 성능은 여전히 강력한데, 전기세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어려서 보고 배운 절약이 몸에 배서 그런지 아직 한여름도 아닌데, 벌써부터 에어컨을 튼다는 게 영 낭비 같아 못내 걸린다. 점점 도끼눈이 되어가는 딸의 눈초리를 피해 하루 이틀 더 버티다 급기야 딸이 폭발하고 말았다. 왜 에어컨 켜는 권한은 엄마에게만 있느냐, 비까지 오니 도대체 이불이 꿉꿉해서 잠도 푹 잘 수가 없다고 따지고 든다.


딸을 달래고 부랴부랴 까슬까슬한 여름 이불을 내어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열대야에 가만히 있어도 온 몸이 끈적거려 짜증이 절로 나고 결국 내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다. 필터 청소를 하고 에어컨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에어컨을 켜자 얼마 안 돼 바로 뽀송해지는 찬 공기가 반가우면서도 한 편으론 너무 일찍 에어컨을 틀었나 싶은 마음도 살짝 들었다.


어느새 장마로 연일 비다. 가물던 중에 오는 비이니 반갑기도 하고 시원하게 쏟아지는 장대비가 속이 후련하기도 하지만, 장마는 살림하는 사람으로서는 신경 쓸 게 많아져 갑자기 분주해지는 때이다.


우선, 땀과 비에 홀딱 젖은 빨랫감이 매일같이 산더미처럼 쌓인다. 필요한 옷을 제 때 챙겨 입으려면 바로바로 세탁하고 말려야 한다. 흐리고 비가 자꾸 와 옷들이 잘 마르지도 않는다. 가끔은 세탁을 했는데도 땀 냄새가 나서 이런 옷들을 다시 빨다 보면 세탁기를 세 번까지 돌려야 하는 날도 있다. 돌리고 말리고, 돌리고 말리고, 장마철은 정말 빨래와의 전쟁이다.


게다가 곰팡이가 피지 않도록 집 안 구석구석 건조에도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특히, 욕실은 환풍기를 틀어 바람을 통하게 하지 않으면 쉽사리 실리콘 위에 까만곰팡이가 핀다. 악취가 나지 않도록 욕실 청소도 더 자주 해야 한다. 주방에 개수대 거름통도 뽀득뽀득 씻어놔야 개운하다. 늘 물기찬 곳이라 곰팡이에 쉽게 침범당하기 때문이다.


습한 공기를 잔뜩 머금어 붕 뜨는 벽지들은 선풍기를 틀어 달래보고, 가족들 침구도 까슬한 감촉의 여름용 이불로 바꿔야 한다. 먹거리도 상하지 않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웬만하면 바로 만들어 한 끼 먹고 남기지 않는 게 가장 좋다. 주방 쓰레기통과 음식물 쓰레기통도 조금이라도 게을리하면 초파리들이 꼬이고, 구더기 같은 벌레들을 마주하게 되니 좀 봉투가 찼다 싶으면 바로 버려야 한다.  


비가 좀 잦아든다 싶어 잽싸게 장을 보러 갔다. 시장에서 제철 맞은 자두며 옥수수며 콩국물 등을 사서 손에 바리바리 들고 돌아오는데 장대비가 불시에 인정사정없이 쏟아졌다. 손에 든 게 많아 미처 우산을 꺼내 들지도 못했는데 비가 쏟아져 옷과 장본 것들이 금세 젖었다. 이럴 때는 참 비가 야속하다.


에어컨을 틀어 놓은 집에 와서야 한숨 돌렸다. 끈적한 땀과 비가 대번에 말려지고 시원해진다. 열대야도 장마도 에어컨이 없으면 어찌 버틸까 싶다. 그러고 보면, 어린 시절엔 에어컨이 없어도 달랑 선풍기 한 대로 온 가족이 매년 여름을 보냈는데, 왜 힘든 기억은 별로 안 나는지 모르겠다.


알알이 굵어지는 포도 넝쿨 그늘 아래 놓인 마당의 평상에서 가족들과 둘러앉아 모기를 쫓아가며 달달한 수박을 베어 물던 기억이 난다. 무더운 여름밤 파란 모기장 안에 형제들이 나란히 누워 엄마가 부쳐주는 부채질 바람에 스르르 잠들던 때도 생각난다. 무더위와 장마는 분명 그 시절에도 겪었건만, 돌봐주시던 엄마의 부지런한 보살핌에 다 문제 되지 않았던가 보다.


시간이 한 참을 흐르고 흘러 보살핌 받던 꼬마가 이제 제 자식들과 가족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다. 언젠가는 요즘 한참 투덜거리는 딸아이도 제 가족을 이루고 보살피느라 바빠질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의 보살핌 덕에 한 사람으로 제대로 영글어 가는 것, 그것이 사람 사는 이치가 아닌가 싶다.


계절도 마찬가지일 게다. 장마와 무더위가 아무리 기승이라 해도 언젠가는 선선한 바람의 가을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마련이다. 일련의 시간 흐름 속에서 과일과 곡식이 잘 영글어지도록 물과 온도를 적정히 맞춰주는 제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그런 자연스러운 자연의 이치라 여기면 곧 지나갈 열대야와 장마가 그리 힘겹게 느껴지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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