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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Oct 13. 2019

TV 없이 사는 이유


  집에 TV 없이 산 지가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이사하면서, 없애자는 나의 강한 주장에 남편도 어렸던 아이들도 썩 내켜하지는 않았지만 따라주었다. 사실 컴퓨터로, 셀폰으로, 태블릿 등으로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보고 싶은 TV 프로그램과 영상을 볼 수 있는 세상이기에 TV 없이 사는 게 뭐 그리 유별난 일은 아닌 것 같다.


   TV 없이 산다 하면 아이들에게 책을 많이 읽히는 것에 정말로 효과를 보았는지 많이들 물어본다. 큰 애는 읽히고자 하는 나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초등까지는 확실히 책을 즐겨 읽었으나 고등학생인 지금은 거의 읽지 않고 있다. 작은 애는 읽히려는 나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려서는 책에 별반 흥미가 없더니 중학교 들어간 후로는 스스로 많이 읽겠다고 나름 애를 쓴다. 그래서 내 경험상으로는 TV의 부재와 아이들의 책 읽기는 별 상관관계가 없는 것 같고, 살다가 어느 때고 책을 좋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지 않나 하는 게 나의 결론이다.


  우리 집의 TV를 없앴던 동기는 TV 소리가 기상 때부터 잠들 때까지 틈만 나면 가족들의 눈과 귀를 잠식했기 때문이다. 내가 관심이 있건, 없건 줄곧 흘러나오는 세상의 각종 소리들, 광고들이 집안 구석, 구석 켜켜이 쌓이고 쌓였다. 정적이 주는 고요함이 절실히 그리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소리들이 집안을 채울수록 가족들이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경우는 적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특히나 마음에 뭔가 거리낌이 있을 때 서로 대화를 시도하기보다는 TV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의미한 소리들로 어색한 사이를 메꾸는 데에 점점 익숙해졌다랄까.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말이다. 자주 시간이 때워진다고 느꼈고 점점 마음이 텅 비어 가는 듯했다.


  TV를 없애고 나니 자주 심심해졌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낮잠도 잤다가 인터넷 서핑도 했다가 운동 핑계로 뒷산도 배회했다. 그러다가 읽는 게 즐거웠고, 사람들과 읽은 책 이야기하는 게 무척 재미있다는 걸 알았다. 학부모 일과 마을일에도 참여하고, 아는 이들과 소소하게 하는 봉사도 기분이 좋았다. 생활에 여러 가지 재미와 새로운 배움이 늘어나니 가족들과 나누는 이야깃거리가 자연스레 풍성해졌고, 아이들도 질세라 학교에서 겪은 이야기들을 시시콜콜히 들려주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그렇게 나누는 하루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 그 날 그 날 인상적이었던 일들, 자랑거리들, 웃겼던 일, 어처구니없거나 놀라고 신기했던 일들 등등 나눌 이야기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가족 간에 종종 속상하고 갈등을 겪을 때에도 예전처럼 TV 소리 뒤로 마냥 숨지도 않게 되었다. 조언이라고, 위로라고 하는 말이 앞 뒤가 안 맞기 일쑤고, 때로는 격해지는 감정을 수습하지 못해 체면을 잃기도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며칠 후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이야기하며 금세 헤헤거리기 때문이다. 가족에게만은 가면을 쓰지 않은 민낯으로 또 마음의 장벽 없이 각자의 이야기를 마음을 열고 맘껏 풀어놓게 된 것, TV를 없애고 얻은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TV를 없애고 달라진 점이 또 있다. 내가 수동적이 되는 때를 몹시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점이다. 주어진 심심한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 노상 고민하고 나를 즐겁게 해 줄 만한 일을 매번 선택하고 실행하다 보니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주체적인 성향이 단련된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 무턱대고 내 의지와 상관없는 어떤 일을 시키려고 하면 바로 기분이 불쾌해지고 강한 저항감이 솟는다. 사리판단을 하는 온전한 인격체가 아니라 어떤 일의 목적을 위해 동원된다거나 수단으로 취급된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서열과 위계를 중요시할수록 또는 사람보다는 일중심의 단체에서 이런 경향이 흔한 것 같았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사는 게 어려운 일이겠다만 가능하다면, 비록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용한 일일 지라도, 내 시간의 주인은 온전히 나이고 싶은 건 큰 욕심일까.

 

  올여름방학 때 지인이 홈쇼핑에서 특가로 나온 해외여행상품을 득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잠시 ‘혹’했다. 동생네 가족이 휴일 TV 앞에서 예능프로를 오순도순 정답게 보는 장면을 보니 뭔가 부럽기도 했다. 둘째가 학교에서 다른 애들은 다 아는 뉴스나 시사상식에 눈만 껌벅거렸다 할 때도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분간은 TV수신료 2,500원을 여전히 내지 않고 살련다. TV가 없음으로 해서 얻게 된 가족 간의 충만함이 당연히 더 귀하고, 언제든 내가 내 시간의 온전한 주인이고 싶기 때문일 거다. 혹시 ‘TV 없이 사는 여자’라는 그럴듯한 허영을 채워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젠 익숙해져서 어쩌면 별다른 이유를 딱히 찾지 않게 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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