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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Oct 21. 2019

과연 누가 죄인인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읽고

  2차 대전 패전 후 발표되어 당시 일본 젊은이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는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 <인간 실격>. 표지에 있는 작가 내력만 읽었는데도 그 생애의 별스러움에 놀람의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21세에 연인과 투신자살하려 했으나 홀로 살아남았다는 것, 자신의 응모한 소설이 차석에 그치자 심사위원에게 항의하는 글을 발표했다는 점, 진통제에 중독되어 정신병원에 입원했었다는 이력, 그리고 39세에 생애 다섯 번째 자살 기도 끝에 결국 연인과 투신자살하여 생을 마감했다는 점, 삶의 여정 하나하나가 상당히 예사롭지 않았고, 이런 삶을 산 작가는 소설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급격한 궁금중을 불러일으켰다.


  저자는 소설에서, 공포를 효과적으로 "묵살"하는 법을 알고, 먹고사는 문제에만 천착하며 서로 속고 속이면서 사는 걸 당연히 여기는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나도 순수하고 여린 영혼의 요조가 얼마나 공포스럽고 불안하게 몰락해 가는지, 그리고 결국 어떻게 인간실격이라 자처하게 되는 상황에 빠지게 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읽으면서 참 이해가 안 되었다. 못된 일을 겪어도 부모님께 말도 못 하고, 남에게 상처가 될까 봐 맘에 들지 않는 제안에 거절도 못하는 요조가 못마땅하고 공감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불행을 자초한 것에 대한 순수함을 가장한 나약한 자의 변명이 아닌가도 싶었다.


  그러는 중 근처 초등학교에 볼 일이 있어 방문했다가 울고 있는 한 아이를 보게 되었다. 초등학교 다닌지도 한참 되었는데 아직도 별 것 아닌 일로 매번 꺼이꺼이 운다는 그 아이. 자꾸 울어서 학교 선생님을 힘들게 한다던 그 아이. 혹시 그 아이도 요조처럼 둔감한 또는 뻔뻔한 사람들 속에서 쉽게 상처 받아 아프지만, 말로 잘 설명하기 어려워 속상하고, 설명이 잘 안되니 혼자만 힘들어서 매번 울었던 게 아닐까. 따뜻한 위로는커녕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우느냐고 위협의 말을 앞세운 윽박지름에 더욱 울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닌지... 아이는 그저 쉽게 상처 받는 여린 성품을 지녔을 뿐인데 말이다. 인내심 없고 남의 상처에 둔한 이기적 사람들이 아이에게 네가 잘못이라고 규정하는 폭력을 당연하게 행사했던 것은 아닌지... 그렇게 생각이 드니 소설 속의 요조에게 못마땅한 시선이 거둬지고 가엾게 여겨지는 마음이 가득해졌다.


  순진무구한 신뢰의 정표로서 믿었던 요시코가 불의의 강간을 당하자 마음에 치명상을 입은 요조는 신에게 묻는다. "무구한 신뢰는 죄입니까."라고. 과연 누가 죄인인가. 순수하고 여리고 무구한 신뢰를 지닌 요조와 요시코인가, 아니면 그런 요조와 요시코가 신뢰하고 사랑하며 살 수 없게 만든 강간범 같은 속된 사람들인가. 어려서는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 고등학교 시절에는 속물 호리키 같은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절망하며 삶에 진절머리가 났을 작가의 깊은 어두움에 공감이 갈 수 있을 것 같다. 너무나 속되고 염치없는 강한 자들로 꽉 들어찬 세상에 여리고 쉽게 상처 입는 요조 같은 성품의 사람들은 당연히 하루하루 살아내기가 버겁고 힘들었을 것이다.  2차 대전 패전 후 일본의 젊은이들은 아마도 이런 성품의 요조와 자신들을 동일시하며 세상이 이렇게 된 건 내 잘못이 아니라 속되고 강한 이기적인 사람들 때문이라고 치부하며 잠시나마 위로의 마음을 얻었음 직도 이해가 된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이기적인 폭력성을 행사하며 여린 심성들을 아프게 해왔는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이 들수록 알게 모르게 타인에 대해 살피지 않는 뻔뻔함이 늘어만 가는 이 시점에 적절한 메시지였던 것도 같다. 덧붙여, 사족 같지만 2차 대전 피해국의 후손으로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다. 인간적인 면모로서 순수하고 여린 내면의 소유자에 대해 한없는 가여움을 끌어낼 수도 있고, 그들이 덜 상처 받도록 섬세한 인내심을 발휘해 볼 의지도 가져 볼 수 있겠다. 다만, 그 여린 성품을 시대적 변명으로 치부하고, 가해의 역사를 바로 볼 용기와 역사를 바로잡을 성찰이 상실됨을 당연시하는 풍조가 현재 일본 대중의 대표되는 역사의식은 아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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