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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Nov 02. 2019

내가 아는 '나'는 정말 '나'일까

   스스로를 이성적이고 욕심이 없는 편이라고 생각해 왔다. 선택의 순간에 각각의 선택이 주는 장/단점을 나열해 놓고 비교, 분석하여 최대한 합리적 결정을 해 본 적이 있으니 이성적이라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어려서나, 어른이 되서나 옷이나 신발 등의 브랜드를 거의 신경 쓰지 않았고, 각종 물건을 살 때도 그저 본래의 필요 기능만 갖추었다면 굳이 최신품이나 신상품을 고집할 이유를 못 느꼈다. 물건이 주는 기쁨이 그리 크지 않았고, 소유욕도 그다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난,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간주했다. 그 자평이 왠지 그럴듯했고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했던 '나'는 정말 '나'였을까?


  없이 살던 시절, 부업으로 방송통신대 시험문제를 뽑는 부업을 잠깐 했었다. 정해준 책을 열심히 공부하고 시험에 나올만한 문제를 뽑아 문제 풀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환경과 생명공학 분야였는데 평소 관심도 있던 분야라 재미있게 일을 했다. 문제 풀을 다 완성하고 의뢰한 회사에 납품하며 가격 흥정을 했는데, 내가 제시한 값을 회사가 대뜸 받아주자 욕심이 생겼다. 내가 너무 약하게 불렀나 싶어 첫 번째 딜을 취소하고 값을 더 올려 두 번째 제안을 했다. 회사가 또 응해 주자, 욕심이 오를 대로 오른 나는 또 취소하고 세 번째 금액을 제시했다. 기억이 또렷하진 않은데, 회사가 그 세 번째 제안을 받았던가, 받지 않았던가 여하튼 딜은 결렬되었다. 처음 부른 값의 두 배 이상의 금액을 받을 수 있다는 부푼 꿈이 날아가고 결국 손에 쥔 건 제로였다. 과욕이 부른 참사라고나 할까. 있는지도 몰랐던 나의 욕심덩어리를 갑작스레 맞닥뜨렸다.


  2000년 대 초반 우리나라에 한창 펀드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다. 그때도 여유가 없었는데, 아이를 둘러업고서라도 펀드 공부에 매진했다. 종잣돈이라고 할 수도 없는 소액이었지만 펀드에 넣었고 수익이라는 단 맛에 아침 9시가 되면 주가지수를 확인하는 즐거움을 한동안 누렸다. 그러다 확신이 생겨 좀 큰 액수를 투자했는데 결과는 참담했다. 언젠가부터 슬슬 빠지기 시작하는데 "무릎에서 사고 어깨에서 팔라"고 했건만 '혹시나 내일은, 내일은 오르겠지..' 하는 마음에 좀처럼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결국 남편의 장학금을 다 날렸다. 그래도 크게 나무라거나 화를 내지 않았던 남편에 대한 고마움은 나이 들어 남편 때문에 울컥 부아가 치밀어 오를 때 나를 진정시켜주는 유용한 기억이다. 여하튼 나는 어깨는커녕 다시 무릎으로 내려가는 걸 보면서도 나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욕심을 못 버리고 약간은 무모한 게 진짜 '나'였다.


   스스로 이성적이라고 했지만, 사실 내가 감정적이고 충동적임을 드러내는 일상의 예는 차고 넘친다. 일단, 드는 생각을 입안에 가두기가 너무 힘든데, 궁금한 건 꼭 물어봐야 시원하고, 특히 권위나 서열의 이유로 부당함을 당한다거나 하면 참지 못하고 '욱'하는 마음에 지적을 하고야 만다. 너만 잘났냐, 나도 잘났다... 뭐 이런 심리인 것도 같다. 하긴, 잘난 척하는 걸 참 좋아한다. 밖에서 자꾸 하면 민폐이니 요즘은 주로 가족들에게만 한다. 사실 우리 가족들은 모두 자뻑이 심해 서로 질세라 자랑질을 즐기는데, 상호 인정도 해주지만 또 적나라하게 깎아내리기에도 바쁘다. 나름 인정 욕구도 충족되고, 스트레스도 풀리고 재미있다. 여하튼 요즘엔 지적질이 감정싸움이 되지 않도록 예의를 갖춰 웃으며 되도록 가볍게 하려고 노력 중이다.


  일어나는 충동 중에 좀 감당키 어려울 때는 누가 갑자기 마구마구 보고 싶어 질 때이다. 주로 기억 속에, 과거 속에 어느 상황에 몰입되어 관련된 인물들이 갑자기 격하게 궁금해져서 당장 만나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 마음을 추스리기가 쉽지 않다.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연락하면 그만인데,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된 사람이라면 저절로 그 간절한 충동이 사그라질 때까지 기다리기가 좀 마음이 아프다. 어쩌면 다시는 그 사람들을 못 볼 것 같기 때문이다. 버킷 리스트에 적어두고 마음 한 면을 접어둘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기필코' 갈피를 끼워서 말이다.


   오랫동안 나는 '나'를 잘 안다고 오해하며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계산 없이 나오는 '구체적인 행동이 보여주는 나'가 가지는 괴리와 간극을 이제는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설프고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세상살이에 겸손해야 할 텐데... 언제나 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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