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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Nov 10. 2019

삶에 대한 톨스토이의 제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고

  러시아 대작가 레프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이 책은 톨스토이가 추구했던 삶의 이상 즉, 사랑과 노동 그리고 도덕적 자기완성을 위해 사람은 신 안에서 사랑을,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이라는 그의 굳은 믿음, 그런 믿음을 러시아 민중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썼던 <바보 이반>, <사람에게는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 <유한 계층 사람들의 대화> 등과 같은 여러 단편들 중의 하나이다. 

  

  인간 세계에 벌거벗은 채 떨어진 천사가 구두장이 세몬의 집에서 함께 일하며 살아가는 동안 하느님이 알아오라고 한 사람에 관한 세 가지 교훈에 관해 깨닫게 되는 내용이다. 세 가지 교훈이란, 사람 안에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모른다는 것, 마지막으로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이다. 천사가 사람 안에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걸 깨달은 때는 세몬의 아내가 배고프고 춥던 천사에게 음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저녁을 나누어 주던 때이다. 신을 의지하고 신의 뜻에 따라 살려는 소박한 민중을 표현한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자신이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은 곧 죽음을 앞둔 귀족이 한 치 앞을 모르고 1년 신을 장화를 맞추는 걸 보며 깨닫는다. 이는 인간이 자신만을 위해 살지 말고 서로 힘을 합쳐 살아가야 함이 신의 뜻임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사실은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은 쌍둥이를 데려다 젖 먹여 키운 이웃집 여자의 이야기를 그 예로 든다. 인상적인 점은 이웃집 여자가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푼 것으로 일견 보이지만 사실은 쌍둥이들이야말로 이웃집 여자가 살아갈 힘을 준 존재들이었다는 점이다. 여자가 자식을 잃었을 때 비통과 절망 속에서도 살 수 있었던 데에는 쌍둥이들이 여자에게 주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몬이나 장화 제작을 맡겼던 귀족 그리고 이웃집 여자의 일화들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명료하다. 삶은 이런 모양새이니 신의 뜻에 따라 사는 게 옳지 않겠느냐는 톨스토이의 제안인 것이다. 선을 행하고 자아의 도덕적 완성을 추구하는 톨스토이의 이상이 반갑고 공감이 된다. 나 자신이 신 안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 그의 제안이 현실적으로 이 시대에 쉽게 구현되기 어렵다고 느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이상을 선언하거나 작품으로 녹여낸 걸로 끝낸 게 아니라, 삶 속에서 실천해 내보이고자 참으로 부단히 애썼던 것 같다. 세속 되게 살아왔던 자신을 통렬히 반성하는 <참회록>을 쓰고, 신의 사랑을 실현하는 삶에 가장 방해되는 것이 국가와 교회라고 주장하며, 병역거부와 조세 거부 등 아나키스트적 활동과 국가를 정당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러시아 교회를 과격하게 비판하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동하지 않고 얻게 되는 사유재산의 축적은 인간을 타락으로 이끌 뿐이라며 본인의 저작권과 재산들을 사회에 환원하고자 했던 행적들도 그 예이다. 귀족으로 태어나 재산 걱정이 없고 작가로서의 역량도 뛰어났던 한 사람이 삶의 본질을 처절하게 고민하고 자신의 신념을 실천으로 증명해 보이려 했던 큰 인간, 톨스토이를 만나게 되어 반갑기 그지없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은 '사람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과 약간 느낌이 다르다. '왜 사는가'는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묻는 것 같다는 느낌인데 비해 '무엇으로 사는가'는 일단 살아내야만 하는 주어진 삶에 대해 그 삶을 '버틸 수 있는 뭔가가 너에겐 무엇이니'라고 묻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마도 외면적으로는 행복해 보였으나 항상 삶의 의미를 모른다는 무지에 자살충동까지 느낄 정도로 처절히 괴로워했던 톨스토이가 그래도 살아보고자 애썼던 노력이 드러난 질문의 형태인 것 같다. 


  나는 무엇으로 살까를 생각해본다. 나는 물론 세속적이므로 당장에 먹는 낙이 떠오른다. 맘 맞는 사람들과 수다 떠는 재미도 매우 중요하다. 수다 중에도 주제가 있는 대화 그러니까 지인들과 함께 같은 책을 읽으며 이야기 나누는 재미가 크다. 그리고 많은 부분 아이들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사는 것 같다. 사실 자식들 크는 걸 보는 것만큼 뿌듯한 동시에 시간의 흐름을 분명하게 절감하게 하는 것은 내게 없다. 부끄럽지만 자식을 낳아 기른 일이 내가 지금껏 한 일 중에 그나마 사랑을 진심으로 실천하게 된 시작점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을 키우는 덕분에 누군가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하면 동병상련할 줄 알게 되었고, 교육체제나 사회에서 아이들이 겪는 부당함 등에 외면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세상으로 나아갈수록 그들이 만나는 세상이 상식적이고 공정한 곳이었다면 좋겠다는 마음이 동기가 되어 그러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종종 고민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 의미 있는 삶이란, 내 발자국 보고 뒤따라 오는 내 자식들과 그들 또래를 위해 내 길 위에 놓여 있는 세상의 불합리, 불공정이라는 작은 장애물 하나 치우는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혹시 주변에 그런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까지 한다면 감사하기 그지없는 일이고, 그 길에 같은 마음의 분들도 많이 많이 만나고 싶다. 하는 실천에 비해 포장이 거창한 듯 하지만, 그리 살려는 마음의 불씨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한 실천을 포장에 맞춰보고자 힘써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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