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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Jan 23. 2020

책상물림 도련님의 사랑이야기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먼 북소리>를 읽다 보면, 그가 크레타에 머무를 때 느꼈던 그리스인들에 대한 감상이 나온다. 이탈리아인들에 비해 삶을 대하는 태도가 좀 더 진지한 것 같다는 게 그의 의견인데, 그러면서 크레타가 고향인 그리스의 위대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도 수차례 언급된다. 무라카미는 개인적 의견이라고 했지만 나에게도 그의 의견이 일리가 있어 보인다. 아마도 그런 진지함 덕분에 고대 그리스 철학을 꽃피웠는지도 모르고, 카잔차키스 같은 고매한 작가를 키워냈는지도 모른다. 진지한 거라면 나도 누구 못지않게 좋아하는 편이니, '도대체 그리스인이, 카잔차키스가 얼마나 진지하길래?' 하며 자연스레 호기심이 일어났다. 언뜻 봐도 만만하게 보이지 않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책장을 그렇게 넘기게 되었다.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책상물림인 화자 오그레와 온갖 풍상을 겪은 조르바가 나온다. 오그레는 세상만사에는 알지 못하는 뭔가 숨겨진 의미가 있다고 믿고, 그 의미를 찾고자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색을 하는 전형적인 책방 도련님형의 인간상이다. 그리스 동포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길을 나서던 오그레의 친구, 스타브리다키는 함께 가지 않는 오그레를 향해 '책벌레'라 하며 '설교만 좋아하지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애정 어린 비판을 한다. 오그레는 내심 각성하여, 책과 언어로부터 벗어나, 노동과 단순한 삶으로 삶의 본질을 이해해 보고자 크레타로 향한다. 그 여정에서 기인이라 부를만한 조르바를 만나고, 그와 크레타 해안에서 갈탄을 채굴하는 수개월 간 함께 기거하며, 직접 세상을 겪고 새롭게 살아가는 법을 익혀간다. 뭐든 책에서 답 찾기를 좋아하는 나도 '설교만 좋아하고 행동하지 않는 자'라는 평에 마음 찔려하며 오그레의 변화하고자 하는 의도에 공감이 갔다. 그래서, 오그레는 조르바와 함께 단순한 삶에서 삶의 본질을 찾았을까?


  조르바와 오그레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일단 조르바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놀라운 유형의 인간상이다. 우리는 대개 성장하고, 짝을 찾아 정착하고, 거느린 가족들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짊어지고, 먹고사는 데에 온 신경을 기울이며 평생 살아가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또 그런 궤적을 벗어나는 삶을 고운 눈길로 보지 못하는 편이다. 하지만 조르바는 가족에 대한 책임쯤이야 산투르라는 악기에 대한 정열을 따르기 위해서 언제든 버릴 수 있는 거추장스러운 것이며, 행상을 하며 이 마을 저 마을 인연이 닿는 과부들과의 쾌락에 충실하고, 삶의 여정을 나아감에 있어 앞뒤를 재지 않는다.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고, 배고파서 훔치고, 사기치고 강간할 때 하느님이 계시다면 당연히 벌 받아 마땅하리라 생각했는데, 전쟁이 끝나면서 벌은커녕 그때까지 지은 죄들이 국가라는 허상을 위해 필요 불가결한 것으로 치부됨을 겪으며, 국가도, 하느님의 존재도 무상하다는 삶의 모순을 몸으로 깨친다. 자유와 정열, 예술, 삶의 의미도 경험으로 누구보다 직관적으로 깨달아 버린다. 그는 가족에게도, 국가에게도, 종교에게도,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은 채 몸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사는 진정한 자유인이다. 과연 자유인의 이런 삶의 방식이 옳은 것이냐에 대한 논란은 뒤로 하고, 쉽게 만날 수 없는 이런 인간상이 놀랍고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조르바는 오그레에게 순간과 현재에 깨어있는 법을 보여준다. 조르바는 꽃을 볼 때는 꽃에만 경이로와하고, 갈탄을 캘 땐 갈탄만 생각한다. 오르탕스 부인과 키스할 땐 키스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조르바는 일상이 지루하지 않고, 매사가 언제나 새롭다. 그는 걱정하지 않고, 상처를 오랫동안 움켜잡고 있지 않는다. 때로는 야성의 춤으로 승화시키고, 산투르를 켜며 그저 순리대로 흘려보낸다. 이런 조르바의 삶의 방식에 감탄하고 매료되던 오그레는 어느 날부터인가 그가 그렇게 즐겨 읽던 시집이 공허해지며 한낱 지적 놀음일 뿐이라고 느껴진다. 오랫동안 믿어왔던 금욕주의가 서서히 힘을 잃게 되어, 부활절 밤 용기를 내어 마을의 젊은 과부를 찾아가기도 한다. 목재를 해변으로 옮기려던 철탑이 실패로 돌아가며 참패했을 때, 외부적인 파멸에 굴하지 않은 해방감과 정복감을 누리기도 했다. 순수 영혼의 결정체로서 붓다를 경외하기까지 하던 형이상학적인 오그레가 조르바 덕분에 실제 삶을 살아가며 느끼는 기쁨을 찾는다.


  조르바만 오그레에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균형잡힌 오그레의 태도는, 세상은 거칠고 야만적이므로 믿을 건 자신밖에 없다고 믿는 조르바가 사람에 대한 순수한 믿음을 갖는 데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갈탄광이 망해가도 그리 연연하지 않고, 오히려 갈탄광 인부들과 믿음과 생활의 공동사회를 꿈꾸는 오그레의 이상향은 조르바가 정신적인 세계에 대해 호기심을 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오그레가 만들고자 하는 공동사회를 수도원이라고 여기고, 그런 수도원의 문지기라면 선뜻 해보겠다 하며, 실제로 아토스 산의 수도원 생활을 결심한 것이 그런 증거로 보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어떤 인연에도 연연하지 않았던 자유인 조르바가 오그레와 이별 후, 엽서와 편지를 보내어 그토록 그를 그리워하고, 죽을 때까지 다시 만나기를 염원했던 걸 보면 오그레에 대한 깊은 사랑이야말로 오그레가 조르바에게 끼친 가장 중요한 영향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그레의 삶의 본질 찾기는 절반의 성공이었던 것 같다. 조르바처럼 순간에 충실하며 살아있는 가슴과 야성의 영혼을 배워가던 오그레는, 사랑하던 친구가 죽었다는 기별에 돌연 그때까지의 변화를 멈추고 조르바와 이별하며 다시 이성의 세계로 회귀한다. 왜 그랬을까?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이 너무나 절망적이었을까? 옛 친구는 죽어가는데 자신은 조르바를 만나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서 죄책감이 들었을까? 아니면, 조르바처럼 사는 방식에서 삶의 본질 찾기는 한계가 있었던 걸까? 그도 아니면, 사람마다 타고난 성품은 아무리 바꾸려고 노력해도 결국엔 회귀해 버리고 마는 까닭일까? 조르바같은 삶으로 본질을 찾아보고자 애쓰던 오그레의 이야기가 마지막에 이르러, 갑자기 이루지 못한 남자들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급 마무리되는 것 같아 참 묘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남성들끼리의 우정인지 애정인지 모를 이 감정과 영혼의 깊은 교류에 대한 영감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카잔차키스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영향을 준 몇몇 중요 인물들 중에서도 고대 그리스의 국민적 서사시인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쓴 호메로스를 제일로 꼽는다 하니, 아마도 남성끼리의 동성애만을 이상적인 사랑으로 간주했던 고대 그리스의 세계관을 <그리스인 조르바>에 녹여냈다고 봐도 억지는 아닌 것 같다. 실제로 읽는 내내 여성은 남성의 은혜나 받는 존재로, 도덕이나 규범을 준수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한 존재로 묘사될 때마다 불편했던 게 사실이다. 카잔차키스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노벨문학상을 두번이나 받을 뻔 했다가 놓쳤다는 게 슬그머니 고소하다. 여하튼 내가 경험해보지도, 주변에서 잘 찾아볼 수도 없기에 이런 사랑의 가능성이 더욱 궁금해지는 것 같다. 남성이 아닌 인간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면 우정을 넘어선 플라토닉한 이 충만하고 진지한 사랑이 여자든 남자든 불가능하리란 법도 없겠다 싶다.

 

  카잔차키스는 결국 이 이야기로 무얼 말하고 싶었을까? 이야기 말미에 설명된 것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언어 속에서 우왕좌왕하던 작가가 잠시 의지해 기쁘게 쉴 수 있었던 조르바라는 인간상에 대한 기록이었던 것 같다. 나에게도 조르바의 삶의 방식은 충분히 놀랍고 인상적이고 유혹적이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 내가 속한 곳을 매우 중시하는 나는 야성의 영혼을 가진 조르바가 될 수는 없을 것 같고, 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각자의 내면을 채우기 위해 끌리는 분야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니, 찾은 방법이 설령 멀리 돌아가는 책이라는 방법이라 해도 나에게 맞게 내면을 채우면 될 테니까.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나니 그리스인들의 진지함에 대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의견에 순순히 동의할 수 있겠다. 하루키의 자취를 찾아, 카잔차키스의 박물관을 찾아 그리스 크레타로 가볼까 하는 마음도 동한다. 잘 이해되지 않는 내용들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읽는 동안 좋았던 점은, 마음속으로 오그레, 조르바에게 기탄 없이 묻고 답하며 맘껏 진지할 수 있었던 점이다. 이유 없이 진지함에 끌리는 나는, 복잡한 세상사 뭐 그리 진지하게 따지냐고, 너무 진지한 것도 주변에 폐라는 말들을 외면할 수 없어서, 언제든 수위조절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애로사항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은 자유롭게 온전히 진지한 '나'일 수 있어서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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