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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Feb 04. 2020

외국 살다 보면 애국자 된다던 그 말

  전세기를 띄워 중국 우한에 있는 우리나라 교민 700여 명을 신속히 수송해 오는 장면과 뉴스를 접하며 '나라 있는 국민이란 이런 거구나.' 하며 홀로 감개무량했다. 감염의 위험으로부터 불안에 떨며, 자신의 안위에 대해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던 처지의 교민이 봉쇄된 길을 뚫고 오랜 기다림 끝에 끝내 전세기의 트랩에 올라 고국을 향해 이륙하던 찰나에 가졌던 감회가 어땠을까. 평상시에는 실감하지 못했던 나라 있음에 대한 자부심과 안도감등이 절절히 와 닿지 않았을까? 뉴스로 읽는 나조차도 울컥해지며, 우리 조상들이 일제로부터 목숨 바쳐 희생하여 얻어낸 주권 독립국가의 존엄성과 그 혜택을 우리가 이렇게 받고 있구나 싶어 가슴 뭉클해진 게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타국 살이에서 주변부 국가의 이방인으로 현지인들의 눈치를 보며 매사 긴장하고 살던 때가 더불어 떠올라 그랬던 것도 같다.


  지금이야 BTS를 위시한 K-pop이 북미, 남미, 유럽 등에 널리 유행이고, 잘 만든 한국 드라마들과 각 부문별  뛰어난 스포츠 선수들의 활약으로 우리나라의 위상이 전례 없이 높아진 줄 체감하지만, 2000년대 초중반만 해도 분위기는 이제와는 사뭇 달랐던 것 같다. 잠깐씩 미국에 거주했던 경험을 떠올려 보면, 2003년에 교민이 그나마 가장 많다는 LA에 체류할 때조차 Korea에서 왔다 하면, 너네 나라 잘 모르겠다거나 경제발전의 확연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구분이 잘 안된다는 듯 Which Korea냐고 대놓고 반농담을 건네곤 했기 때문이다.


  미국살이에서 한국인이란 이유로 드러나게 차별받은 적은 없지만 프랑스, 중국, 인도, 미국 등 각국인이 섞여 있던 아이들 프리스쿨 모임이나 생일잔치 모임에 부모들과 어울리다 보면 왠지 모르게 어느 정도 이상은 나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벽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던 적이 있다. 물론 능숙하지 못한 언어가 원인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과연 언어의 문제로만 그랬을지 여전히 의심스러운 부분이다. 그나마 터놓고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사람들은 동양계였던 일본인, 몽골인, 성품 좋은 멕시코인 등이었다. 그 사회의 주류가 아닌 나와 비슷한 처지라고 여겨져서 그랬을까. 항상 제 나라에서 제 잘난 줄 알고 살던 나에게 미국살이에서 그런 주변부인의 체험은 괴로웠지만 분명 의미 깊은 경험이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겪은 단편적인 일화들로 일반화할 순 없지만, 이렇게 저렇게 보고 듣고 겪은 일들로 짐작하건대, Main stream인 그들 사이에서 우리나라 사람 그리고 우리나라는 그저 아시아에 있는 주변부 국가 중 하나로 간주되곤 했던 것 같다. 2007년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지내던 때이다.


  이랬던 분위기가 2017년, 2018년 캘리포니아 알바니에 체류했을 때는 뭔가 달랐다. 딸이 다니던 공립 중학교에서는 한국계가 아닌데도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K-pop을 틀고 안무 연습에 열을 올리는 광경이 심심찮게 목격되었다. 8학년 학생들은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한 심화 작문을 하는 I-Search 프로젝트라는 걸 하는데, 어떤 학생은 <K-pop의 세계적 인기 이유>를 주제로 선택했다. K-pop에 대한 기여도나 연관성은 1도 없는 나지만, 한국에서 온 학부모로서 학생과 함께 영문자료를 찾고, 한국 유명 기획사에 서면 인터뷰 이메일을 보내는 등 도와주며 나름 뿌듯했다. 칠레였던가, 아르헨티나였던가 남미에서 온 한 젊은 여성은 첫 만남에서부터 자기가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언젠가 한국에 꼭 가고 싶다며 너무나 반가워했다. 그녀 역시 K-pop의 팬이었고, 한국 드라마 시청도 즐겨한다고 했다. 한국 드라마가 어떤 부분이 재미있느냐고 물었더니 여자 둘이 카페에서 싸울 때 컵에 든 물을 뿌리는 것 같은 격한 감정 표현 같은 게 신기하고 재미있단다. 참 별 게 다 먹히는구나 싶었다. 한국 드라마의 인기는 남미뿐 아니라, 이란이나 인도 같은 중동지역에서도 높았고, 중국에서 온 사람들은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너무 좋다며, 당시의 골목 문화가 자기네 나라 현재 상황과 많이 비슷하다고 한국인을 만나면 대놓고 친근함을 표했다. 비슷한 시기인 2016년 캐나다 공영방송 CBC에서는 <Kim's Convenience>라는  TV 시리즈가 방영되었는데, 편의점을 운영하는 이민 한국인 가족의 이야기이다. 주인공들의 구수한 한국식 발음의 영어가 너무 재미있어 유튜브로 빠짐없이 챙겨보게 되었던 시트콤이다. 이 드라마는 인기리에 시즌3까지 방영되었고, 올해 2020년 1월 시즌 4가 막 시작되었다. 한국인의 정서가 녹아있는 스토리와 한국식 영어 발음까지도 이젠 인기가 있어지는구나 싶어 정말 격세지감이었다.


  그야말로 한류 붐이 전 세계적으로 연이어 지속되고 있는 게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라고 하셨던 김 구 선생님의 말씀이 실현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혼자만의 공상을 하기도 한다. 언젠가 비정상회담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한국의 맛을 세계화하겠다던 당시 정부를 비판하면서 문화의 전파는 정부가 나서서 알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해당 국가의 국력과 그 세를 같이 하며 자연스레 퍼져나간다던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님의 말씀이 일리가 있게 들린다. 그리고 그 말씀에 비추어 보자면 2017년, 2018년에 내가 느꼈던 우리나라의 급격한 인지도 상승의 의미는 우리나라의 국력이 그만큼 상승했다는 뜻 이리라.


  그렇잖아도 '한강의 기적'이라며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뤄낸 성공사례로 우리나라가 인용된다는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들어오긴 했지만, 요즘처럼 그 발전의 성과를 세계인들 속에서 체감하며 사는 때는 처음인 것 같다. 한스 로슬링의 <팩트 풀니스>의 책장을 넘기다 보면 앞부분에 전 세계 국가들이 흩뿌려진 도표 하나가 나온다. X축은 1인당 개인 평균소득이고, Y축은 평균 기대수명인데, 1인당 개인 평균소득 3만 불이 넘고, 평균 기대수명 80세를 넘는 우리나라의 위치는 도표 오른쪽 미국보다 높은 상층부 끝부분에 영국, 독일, 뉴질랜드 등의 국가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세계 속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지 자명하게 보여주는 도표였고, 뿌듯하기 이를 데 없는 도표였다.


  여전히 강대국들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고, 정치, 사회, 경제 등 각 분야에서 풀어야 할 숙제들이 산더미지만, 어찌 되었든 오늘날까지 이만큼 문화적 융성함까지 갖추어 성장해왔고, 타국에서 위험에 처한 교민들까지 신속하게 구할 수 있는 능력 있는 나라에 살고 있는 게 참으로 감사하다.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아시아나 항공편의 한국 직원에게 한국말로 티켓팅을 하며 돌아간다는 기쁨에 마구마구 설레던 때가 떠오른다. '드디어, 내 나라로 간다!',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맘껏 내 나라말을 쓸 수 있으며 내가 주인인 내 나라.' 그때만큼 나에게 돌아갈 나라가 있다는 사실이 와 닿았던 적이 없었다. 우한에서 오는 교민들의 심정은 아마 나의 그때 심정보다 백배는 더 절절하게 느끼셨을 것 같다. 모두 안전하게 격리생활을 마치시고 건강하게 귀가하셨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외국 살다 보면 다 애국자 된다는 말은 정말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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