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nby Four Streets / CLT, Assemble
직관적으로는 당연히 '주민의 것'이라고 답하고 싶지만, 실제로 도시의 하드웨어(토지와 주택, 공간의 사용 방식)에 대한 소유권과 최종 결정권은 대부분 행정에 있다.
정권이 바뀌고, 정책 방향이 달라지고, 담당자가 교체되는 동안 한 지역에 축적된 시간은 쉽게 지워진다. 주민들이 비용을 들이고 품을 들여 쌓아온 관계, 기억, 공유된 이해 역시 예외가 아니다.
‘주민 주도’, ‘커뮤니티 기반’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업이 반복되지만, 그 상당수는 주민에게 주체성을 부여하는 듯한 형식에 머문 채 지속되지 못한다.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참여만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 근본적인 구조를 다르게 설계하려 했던 한 사례에서 출발한다.
영국 리버풀의 <Granby Four Streets CLT(Community Land Trust)>다.
Granby Four Streets 사례를 설명할 때 흔히 어셈블의 프로젝트와 함께 '주민 주체성', '지역 공동체'같은 표현이 사용된다. 하지만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은 참여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 앞단에 설계된 소유의 구조에 대한 것이다.
이 동네에서 주택과 토지는 더 이상 개별 자산도, 전통적인 의미의 공공 자산도 아니다. 주민들은 토지를 신탁 구조 안에 묶고, 그 위에서 주거와 생활을 함께 관리한다. 누구도 단독으로 처분할 수 없고, 누구도 임의로 배제할 수 없다. 대신 모두가 일정한 권리와 책임을 나눈다.
이 구조는 흔히 말하는 ‘공공’과도, ‘사유재산’과도 다르다.
오히려 오래된 개념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커먼즈(commons)'
Granby Four Streets의 흥미로운 지점은, 이 동네가 단순히 ‘함께 쓰는 공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마을을 커먼즈로 유지하기 위한 구조적 장치와 일상의 실천을 동시에 설계했다는 점에 있다.
이 글에서는 그들이 커먼즈가 흔히 마주하는 부작용(사유화, 내부 고착, 배제)을 어떻게 인식했고, 이를 완화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제도적 구조부터, 자생적으로 공간을 유지해온 노력들까지 함께 말해보겠다.
Granby Four Streets가 위치한 리버풀의 Toxteth 지역은 한때 안정적인 노동자 주거지였다. 항구와 산업을 중심으로 성장한 도시였으나, 변화는 1980년대 이후 시작된다. 산업 구조가 급격히 재편되면서 일자리가 사라졌다. 대규모 재개발 계획은 번번이 좌초되었고, 인구 감소와 주택 수요 하락을 동시에 겪었다. 시는 쇠퇴한 주거지를 회복하기 위해 대규모 철거와 신축을 전제로 한 재개발을 여러 차례 추진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중앙정부 차원의 주택 재생 정책이 도입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 침체 속에서 민간 개발사는 충분한 수익성을 확보하지 못했고, 공공 역시 장기적인 재정 부담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많은 계획은 승인 단계에서 멈췄다. 착공을 전제로 비워둔 주택들은 그대로 방치되었고, 철거와 신축 사이에서 동네는 오랜 시간 공백 상태에 놓였다. 이 지역은 개발되기에는 수익성이 낮고, 유지하기에는 이미 너무 망가진 공간이 되었다. 행정과 시장 모두 쉽게 손대기 어려운 곳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주민이 떠난 것은 아니었다. 1990년대부터 Granby Four Streets 일대에는 주민들이 스스로 동네를 돌보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었다. 빈집 앞을 정리하고, 화단을 가꾸고, 철거에 반대하며 거리를 지키는 일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Granby Residents Association 같은 주민 조직도 형성되었고,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비공식적인 관리와 저항이 지속됐다.
주민들은 동네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식을 축적해왔고, 이후 이 필요를 인식한 행정과 중간지원조직, 전문 인력들이 결합하면서 비로소 <Granby Four Streets CLT>라는 제도적 형태가 만들어졌다.
CLT는 토지와 주택을 개인이나 시장에 맡기지 않고, 커뮤니티 명의의 신탁 자산으로 소유·관리하는 제도적 장치다. 핵심은 소유를 분산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유화 자체를 차단하는 구조에 있다.
토지를 신탁 구조 안에 묶고, 주택을 커뮤니티의 공동 자산으로 관리함으로써, 이 지역의 미래를 외부 개발 논리로부터 일정 부분 분리하고자 했다.
CLT 조직 과정은 빠르지 않았다. 법적 구조를 만들고, 거버넌스를 설계하고, 공공과 협상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느린 과정 자체가 중요했다. 누가 참여할 수 있는지, 누가 어떤 권한을 가지는지, 그리고 그 권한에 어떤 책임이 따르는지를 하나씩 합의해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Granby Four Streets CLT는 초기 단계부터 주택이라는 물리적 자산을 직접 확보하는 선택을 했다. 다만 이들이 더 중요하게 고민한 것은 자산의 규모보다, 그 자산을 어떤 방식으로 소유하고 운영할 것인가였다. 토지는 판매할 수 없도록 묶였고, 의사결정은 지분이 아니라 참여를 기준으로 설계하여 자본이 권력을 대체하지 않도록 하였다.
Granby Four Streets CLT가 초기 단계에서 주택을 확보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공공의 역할이 컸다. 장기간 방치된 빈집을 철거가 아닌 재생 대상으로 판단한 행정은 주택 재생 관련 보조금과 자산 이전을 통해 초기 자산 형성을 가능하게 했다. 이후 리노베이션의 완성도와 운영 안정성을 높이는 과정에서는 예술·사회혁신 분야의 재단 지원과 사회적 금융이 보조적으로 결합되었다. 이러한 자금은 단기 성과를 요구하지 않았고, Granby Four Streets CLT가 속도보다 지속성을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공공은 소유와 운영의 주체로 남기보다, 자산을 확보한 이후의 선택은 커뮤니티 내부의 합의 구조에 맡기는 방식을 택했다.
이렇게 CLT는 단순한 재생 프로젝트가 아니라, 동네를 하나의 커먼즈로 유지하기 위한 조직적 실험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선택이 이후 Granby Four Streets의 모든 변화(주택 재생, 워크숍, 공공 공간 운영)의 출발점이 된다.
Granby Four Streets CLT가 설립되고 자산 확보의 방향이 정리된 이후, 다음 과제는 분명했다. 커뮤니티가 소유한 주택을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것인가, 그리고 그 과정이 일회성 정비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구조로 작동하게 하려면 어떤 방식이 필요한가 하는 문제였다.
이 지점에서 <Assemble>이 협력 파트너로 참여하게 된다. 어셈블은 2010년 런던에서 결성된 다학제적 실천 그룹으로, 건축·디자인·예술·공예 등 서로 다른 배경의 구성원들이 도시 문제를 현장에서의 실험을 통해 다뤄왔다.
중요한 점은, 어셈블이 Granby Four Streets의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거나 마스터플랜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CLT는 이미 토지와 주택을 커뮤니티 자산으로 묶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고, 어셈블은 그 틀 안에서 실행과 구현을 담당하는 역할로 들어왔다. 즉, 무엇을 할 것인지는 커뮤니티가 결정했고, 어셈블은 그것을 공간과 물성의 언어로 번역하는 파트너에 가까웠다.
어셈블의 주요 역할은 '주택 리노베이션'과 '공공 공간 실험'이었다. 방치된 주택을 최소한의 개입으로 다시 거주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고, 기존 자재와 버려진 요소들을 재사용하는 방식을 통해 비용을 낮추는 동시에 지역의 맥락을 남겼다.
이 과정에서 어셈블은 조정자였다. 주민의 요구, CLT의 원칙, 공공 자금의 조건을 동시에 고려하며, 재생이 특정 집단의 미적 성취나 단기 성과로 귀결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역할을 수행했다. 아래는 어셈블의 참여를 통해 진행된 대표적인 프로젝트에 대한 소개이다.
1. 10 Houses on Cairns Street : 빈집 재생 및 거주 공간 복원
Granby Four Streets CLT는 주택을 소유하여 재생하고 지역 주민에게 저렴하게 제공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개별 주택들이 주민이 다시 살 수 있도록 복원·재활용되었고, 그 과정은 버려진 가구·자재를 수리하거나 재사용해 집을 고쳤고, 벽난로·창틀·타일 등을 직접 만들며 주민과 함께 작은 변화를 반복하는 방식이었다.
2. Winter Garden
방치되던 두 채의 주택을 주민들과 함께 공동체 공간으로 변화시켰다.
오래된 외형은 유지하되 내부를 투명 지붕과 식물이 자라는 구조로 바꾸어 실내 정원이자 주민들의 모임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이곳은 식물원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모이고 모임, 워크숍, 소규모 행사 등 비정형적인 활동들을 이어지는 공동체의 핵심 공간이 되었다.
3. Granby Workshop
어셈블과 주민들은 집을 고치는 과정에서 버려진 자재, 깨진 타일, 오래된 목재를 만났다.
이들은 폐기물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으로 생각하고 타일, 도자기 손잡이, 조명, 벽 장식 등 인테리어 오브제를 제작하는 제작소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 주민들의 손기술이 다시 빛을 발했다. 취미로 하던 작업, 집을 고쳐본 경험, 목공이나 타일 제작 경험으로 제품이 만들어졌고 실제 판매되며 경제 활동으로도 확장되었다.
위의 사례들에서 어셈블은 이미 주민들이 이어오던 활동을 확장하고 구조화하며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함께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주민의 주체성을 제도적으로 보완하고, 주민의 활동이 단순한 향유를 넘어 경제활동·기술역량강화·공동체회복·지역정체성 형성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고민했던 흔적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맥락에서 조금 벗어나지만, 어셈블은 Granby Four Streets에서의 사례를 통해 2015년 Turner Prize를 수상하기도 하였다.
Turner Prize는 현대미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상 중 하나로, 매년 영국 미술계에 중요한 기여를 한 작가나 그룹에게 수여된다. 전통적인 예술 장르뿐 아니라 실험적 시도까지 폭넓게 포괄하는데, 그 가운데 어셈블의 수상은 특히 이례적이었다.
Granby Four Streets 프로젝트는 물리적 결과물보다 공동체 회복과 관계 재구성의 과정이 중심인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이 프로젝트가 수상했다는 사실은, 예술이 더 이상 개별 작품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실천과 커뮤니티 기반의 변화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확인해 준 사건이었다.
Granby Four Streets CLT의 멤버십 비용은 £1이다. 이 금액은 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자본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춘 거버넌스 장치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조직은 도대체 어떤 비용 구조를 거쳐 안정화되었고, 이후 무엇으로 살아남았을까.
초기 : 운영보다 먼저, 자산을 만든 시간
앞서 설명한대로 CLT의 초기 자금은 주로 공공 기금과 재단 지원, 사회적 투자 성격의 자금에서 나왔다.
초기 비용의 대부분은 빈집과 방치된 주택을 매입하고 거주 가능한 상태로 리노베이션 하는 데 투입되었다.
이 시기에 눈에 띄는 성과를 확인하기 어렵다. 주민 프로그램이 늘어나지도 않고, 방문객이 급증하지도 않는다. 대신 커뮤니티가 소유한 자산이 조금씩 늘어난다.
동시에 프로젝트 매니저, 기술자, 설계자 같은 전문 인력이 투입되어 재생 과정의 품질을 관리했다.
CLT라는 법적·조직적 구조를 정비하는 데도 비용이 들어갔다.
중기 : 프로젝트 조직에서 자산 운용 조직으로
리노베이션이 완료되고 주택이 실제로 사용 가능한 상태가 되면서 CLT는 전환점을 맞는다.
이때부터 조직의 성격은 ‘프로젝트 수행 조직’에서 ‘자산 관리·운영 조직’으로 바뀐다.
임대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반복적인 수입이 발생한다.
금액은 크지 않지만, 예측 가능한 현금 흐름이 생긴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시점부터 일부 운영비와 인건비는 외부 지원금이 아니라 자체 수익으로 충당되기 시작한다.
이후 : 느리지만 확장되는 수익의 층위
폭발적이지 않지만 임대 수익이 안정적으로, 반복적으로 발생된 이후에는, 커뮤니티 상점이나 워크숍, 공공 공간 등에서 발생하는 소규모 임대료와 사용료가 보조적으로 더해진다.
임대료는 시장가보다 낮은 경우가 많다. 수익 극대화보다는 지역 활동과의 공존을 우선한 선택이다.
Granby Workshop 같은 파생 조직들은 제품 판매나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별도의 수익을 만든다
우리나라에도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주민 모임에서 출발해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마을 탐방이나 특화 상품, 앵커 시설 운영 등을 통해 자립을 시도하는 사례들을 종종 만나면 그랜비 사례와 닮아 있다고 보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두 모델은 자산과 권한을 다루는 방식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가진다.
Granby Four Streets CLT는 공공 자금과 외부 지원을 활용하되, 그 결과로 만들어진 주택과 토지를 커뮤니티 명의의 자산으로 묶어두는 선택을 했다. 자산의 사용 방식, 임대 조건, 장기적 방향에 대한 결정권은 커뮤니티 내부의 합의 구조에 남는다. 공공의 돈이 투입되지만, 그 결과물은 다시 공공이나 민간으로 환원되지 않고 커뮤니티의 공동 자산으로 고정되는 것이다.
반면 국내 사례의 경우, 공공 자금은 주로 공공 자산의 조성과 개선, 그리고 운영을 위한 비용으로 사용된다. 주민 조직은 공간과 프로그램의 운영 주체로 중요한 역할을 맡지만, 자산의 소유권이나 장기적 처분, 구조 변경에 대한 최종 결정 권한은 여전히 공공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조합의 권한은 참여와 운영에 집중되어 있고, 자산 자체를 통제하는 수준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이 차이는 곧 한계로 이어진다. 협동조합은 공공과의 협력 속에서 의미 있는 운영을 수행할 수 있지만, 자산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주체로까지 확장되기는 어렵다. 공공의 정책 방향이나 행정 판단이 바뀌는 순간, 조합의 역할과 범위 역시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이처럼 자산이나 권한을 커뮤니티 안에 묶어두는 신탁이나 협동조합의 구조가, 언제나 공공성과 개방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권한이 특정 집단 안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된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로부터 닫힌 구조가 될 가능성도 함께 품고 있다는 뜻인데, 의사결정이 소위 '고인물'에게 고착될 경우, 커먼즈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가 오히려 지역 내부의 카르텔처럼 작동할 위험도 배제할 수 없지 않나.
Granby Four Streets CLT의 낮은 진입장벽(£1의 멤버십 비용)과 지분과 무관한 1인 1표제는 이러한 위험을 완화하기 위한 장치로 읽힌다. 국내의 마을관리 협동조합은 어떤 제도적·구조적 장치를 통해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 이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미지 출처
Granby Four Streests (https://www.granby4streetsclt.co.uk/)
Assemble Studio (https://assemblestudio.co.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