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ifesta
대부분의 도시 문제는 복합적이고 정치적이며, 여러 이해관계가 중첩된 구조 안에 있다. 그 안에서 예술은 종종 ‘문제 해결의 도구’로 인식되어져 왔고, 그 과정과 결과는 때로 과도한 기대 속에서 오해되기도 했다.
이 글은 유럽의 노마딕 비엔날레 '마니페스타(Manifesta)'의 사례를 통해 ‘예술이 도시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묻고자 한다. 도시의 이슈에 어떤 방식으로 다가가는지, 예술이 스스로 개입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1990년대 중반의 유럽은 냉전 이후 급격한 재편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국경은 열렸지만 정치·경제·문화적으로 각각의 도시는 너무나 달랐고, 특히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의 격차와 긴장은 여전히 도시 곳곳에 남아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니페스타는 출발했다.
마니페스타는 당시 유럽 예술계 내부에서 제기되던 문제의식이 집합된 결과물로 볼 수 있다. 국가 중심의 전시 구조, 자본 중심의 예술 시장, 서구 중심의 미술 담론에 대한 비판 속에서 마니페스타는 국가도, 도시도, 자본도 대표하지 않는 전시를 표방했다. 서로 다른 도시의 맥락을 드러내는 이동식 플랫폼을 선택했고, 고정된 개최지 없이, 페스타는 매 회차가 전혀 다른 도시에서 열렸다. 이 ‘노마딕(nomadic)’한 구조는 마니페스타가 도시를 대하는 태도 자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마니페스타는 2년에 한 번 비엔날레의 형식으로 열린다. 하지만 전시되는 결과물보다 더 중요하게 봐야하는 것은 그보다 앞선 과정과 도시를 대하는 태도이다. 개최 도시가 선정되면 장기간의 도시 리서치가 먼저 진행된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큐레토리얼 방향이 설정된다. 도시를 이해하고 개입 가능성을 판단하는 과정 전체가 프로젝트의 핵심인 것이다.
예상할 수 있듯, 마니페스타가 항상 긍정적으로 평가받진 못했다. 오히려 관객에게는 불친절한 전시로, 사회적으로는 민감한 주제를 다루는 전시로 평가받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도시 기반 전시의 중요한 실험 모델로도 자주 언급되기도 한다. 예술이 도시 문제에 개입할 때 발생하는 윤리적·정치적 질문을 잘 드러내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도시 리서치는 보통 정책이나 사업 실행을 전제로 한다. 때문에 리서치의 질문도 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설계되고, 결과물은 보고서나 지표, 마스터플랜처럼 결정과 실행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마니페스타의 리서치는 출발점부터 다르다. 정답보다는, 예술이 도시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를 가늠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예술의 개입의 조건을 설계하는 작업인 것이다.
1. 리서치 목적
마니페스타 리서치의 목적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도시를 '주제'가 아닌 ‘조건’으로 이해하기
마니페스타는 도시 이슈를 곧장 작품의 주제로 환원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그 이슈가 어떤 조건에서 말해지고, 말해지지 않는지, 어떤 갈등과 서사 위에 있는지, 혹시 쉽게 ‘콘텐츠화’될 위험이 있는지를 먼저 본다.
2) '무엇을 할 것인지'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먼저 정하기
실무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리서치 단계에서 설정되는 것은 보통 이런 것들이다.
- 접근해도 되는 주제/공간/커뮤니티
- 반드시 조심해야 할 표현과 방식
- 특정 개입이 남길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 리스크
- 전시가 끝난 뒤에도 남을 비가역적 피해 가능성
이건 곧 예술 개입의 한계선을 정하는 작업이 된다.
3) 개최 도시의 “도시 전략(urban vision)”과 연결 가능한 지점 찾기
최근 회차들에서 특히 강조되는 부분인데, 리서치 결과를 바탕으로 전시의 프로그램, 장소 선택뿐 아니라 도시의 장기적 관점(유휴 자산, 공공공간, 문화 인프라 등)과 맞닿는 '도시 비전'을 함께 구성하려는 경향이 있다.
2. 리서치 방식
일반적인 리서치가 설문과 통계 중심의 데이터 조사로 이루어진다면, 마니페스타의 리서치는 대화와 체류를 중심으로 설계된다. 누가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이 금기시되는지, 어떤 서사가 충돌하는지, 어떤 관계가 신뢰와 불신을 가지고 있는지 등의 관계적, 정치적 층위에서 도시 문제의 맥락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아래는 마니페스타의 리서치 방식이다.
1) 체류 기반 관찰
- 핵심 장소, 경계 지역에 반복적으로 드나들며 일상 관찰
- 도시의 드러난 서사(브랜딩, 홍보)와 비공식 현실(갈등, 배제) 비교
2) 비공식 대화와 인터뷰
- 이해관계자(행정, 기관, 활동가, 주민, 소상공인 등)와의 대화
- 대표성을 갖는 인터뷰보다 다양한 목소리를 모아 충돌 지점 파악
3) 중개자 협업
리서치를 내부 큐레이터만이 아니라, 도시·건축·리서치 역량을 가진 도시 사무소와 결합해 운영해 왔다. 그 예로 마니페스타 12에서 '크리에이티브 메디에이터(creative mediators)'라는 협업 리서치 모델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4) 주제가 아닌, 프레임을 잡는다
최근 인터뷰에서는 리서치 단계에서 도시를 몇 개의 큰 축(갈등의 균형, 돌봄/치유, 미래 상상 등)으로 묶어 프로그램 구조와 장소 전략을 구성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진행된 리서치는 다양한 방식으로 산출된다. 하나의 ‘지도’의 형태인데, 자주 언급되는 Palermo Atlas와 같은 연구물은, 도시의 사회적 구조와 문화적 맥락, 공간적 층위를 정리한 자료로, 이후 전시의 기반이 된다. 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장치에 가까운 이 결과물은, 예술이 개입하게 될 조건과 맥락을 이해하도록 돕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리서치의 축적은 큐레토리얼 방향과 프로그램 구조로도 이어진다. 어떤 장소를 전시의 중심으로 삼을 것인지, 전시·프로그램·교육·출판 중 어떤 형식이 이 도시에 더 적합한지, 어떤 이슈를 우회하거나 비워두어야 할지에 대한 판단들이 이 단계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과정은 출판물과 기록의 형태로 남는다. 마니페스타는 리서치와 논의, 현장에서 발생한 질문과 충돌을 함께 기록하는 것을 프로젝트의 일부로 간주한다. 때문에 출판물은 전시 카탈로그를 넘어, 도시를 다루는 과정과 그 안에서 발생한 논쟁을 축적하는 아카이브로 기능한다.
마니페스타에는 예술의 개입 범위를 규정하는 단일한 가이드라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매 회차마다 진행되는 도시에 대한 장기간의 리서치 과정에서 도시의 정치적·사회적 맥락, 제도적 환경, 기존 갈등의 양상 등이 주요 고려 요소로 작동한다.
리서치 단계에서 특정 이슈나 공간, 커뮤니티에 대해 ‘주의가 필요하다’, ‘직접적인 개입은 어렵다’, ‘전시 형식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고, 이러한 판단은 전시의 방식과 접근 수준을 조정하는데 반영된다.
또, 개입 범위 설정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기준 중 하나는 '전시 이후의 영향'이다. 마니페스타는 전시가 종료된 이후에도 남게 될 사회적·정치적 여파를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혀왔다. 그리고 실제로도 특정 개입이 지역 커뮤니티에 장기적인 부담이나 갈등을 남길 가능성이 있을 경우 전시 형식이나 프로그램을 조정하거나, 해당 이슈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기로 결정한 사례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큐레이터 팀, 리서치 팀, 마니페스타 재단 간의 논의를 통해 이루어진다.
민감한 이슈를 다뤄야 할 때에는, 이를 직접적으로 재현하거나 주장하기보다는 장소 선택, 동선, 접근성, 프로그램 구성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선택한다.
마니페스타는 매 회차 서로 다른 도시에서 일정 기간 동안만 운영되는 노마딕 비엔날레이다.
특정 도시에 상시적인 거점을 두지 않고, 전시와 프로그램 역시 모두 한시적인 프로젝트 형태로 진행된다. 각 회차의 전시는 미술관이나 문화시설뿐 아니라 유휴 공간과 공공시설 등 도시의 다양한 장소를 활용해 구성되며, 전시가 종료된 이후 동일한 형식의 개입이 지속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임시성은 마니페스타가 도시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규정하는 중요한 전제이기도 하다. 마니페스타는 도시의 공식 입장이나 정책 방향을 대변하는 전시를 표방하지 않으며, 노마딕 비엔날레라는 형식상 매 회차 외부 주체로서 개최 도시와 관계를 맺는다. 큐레이터와 리서처, 참여 예술가들 역시 대부분 개최 도시 외부에서 구성되며, 전시는 특정 지역의 정체성을 하나의 이미지나 서사로 표상하는 방식으로 기획되지 않는다.
리서치와 전시 과정에서 지역의 다양한 주체들과 접촉하긴 하지만, 이들 역시 도시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 특정 커뮤니티나 집단이 도시의 목소리를 대신 전달하도록 설계하지 않고, 하나의 관점이 도시를 대변하도록 하지도 않는다.
대신 마니페스타가 지향하는 것은 전시 이후에도 지속되는 관계의 변화, 공간에 대한 인식의 전환, 그리고 도시를 바라보는 질문의 축적과 같은 비가시적이고 구조적인 유산이다. 전시는 떠나지만, 그 과정에서 형성된 조건과 가능성은 도시 안에 유의미한 자본으로 남게 된다.
마니페스타에게 도시는 예술적 개입이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이다. 이 조건에는 정치적 맥락, 사회적 갈등, 제도적 한계, 그리고 말해지지 않거나 쉽게 소비될 위험이 있는 서사들까지 포함된다. 전시는 여기에 직접적인 해답을 얹기보다는, 서로 충돌하는 맥락과 시선을 병치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큐레이션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리서치를 통해 드러난 도시의 여러 층위를 전시의 공간, 동선, 프로그램, 출판물에 분산시켜 배치한다. 관객은 전시 안에서 명확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조건과 서사 사이를 오가며 판단을 유예하게 된다.
오늘날 사회적 이슈는 과거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확산된다. 정보와 발화의 경로가 늘어나면서, 문제의식은 다양한 방식으로 가시화되지만, 동시에 특정한 관점이나 입장으로 급속히 수렴되기도 한다. 알고리즘과 미디어 환경 속에서 이슈는 종종 찬반의 구도로 단순화되고, 복합적인 맥락보다는 확신에 찬 주장과 감정적인 언어가 우선적으로 소비된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아젠다는 쉽게 입장화되고, 서로 다른 집단 간의 이해 충돌과 피로감 역시 누적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예술이 사회적 이슈에 접근하는 방식 역시 다시 질문될 필요가 있다. 모든 아젠다에 대해 즉각적인 입장을 표명하거나, 명확한 메시지를 제시하는 방식만이 유효한 선택일까. 마니페스타가 보여주는 태도가 이에 대한 답으로 보인다. 속도를 늦추고 판단을 유예하는 전시의 형식을 택하였고,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되기보다는, 서로 충돌하는 조건과 시선을 함께 둠으로써 사회적 이슈가 지닌 복합성을 유지하였다. 나는 이러한 태도가, 지금의 사회 환경 속에서 예술이 사회적 아젠다를 다루는 하나의 유효한 방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