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짧은 우화 #08
"야, 너구리!
오후 물량도 쏟아져 들어온대. 준비해."
창고 안,
셰퍼드 선배의 목소리가 강하게 깔렸다.
코끝을 찌르는 쉰 땀냄새와 달궈진 공기 속에,
너구리는 깜짝 놀라 두 귀를 바짝 세웠다.
너구리의 예민한 후각과 청각은
이곳이 낯설고, 무섭게 느껴졌다.
땀범벅이 된 얼굴로 닫히지 않는 창고 문을 바라봤다.
숨이 턱 막히는 열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알바 첫날,
함께 교육받고 들어온 다람쥐는 벌써 이틀 전에 사라졌다.
"나, 진짜 이건 아닌 거 같아... 잘 살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다람쥐의 말이 맴돌았다.
너구리는 여름방학 동안,
등록금을 벌기 위해 택배 알바를 시작했다.
'조금만 참으면 돈 모을 수 있어.'
하지만, 현실은 상상 이상이었다.
첫날부터 시작된 지옥은 계속됐다.
뜨거운 햇볕에 데워진 아스팔트 열기,
숙이고 일어나는 반복동작으로 끊어질 듯한 허리,
무더위 속,
쉴 새 없는 이동과 무거운 박스로
너구리는 기진맥진했다.
점심도 씹는 둥, 마는 둥,
너구리는 뛰고 또 뛰었다.
"뛰지 마. 무릎 나간다."
올해로 5년 차인 셰퍼드 선배는 단호하게 말했다.
너구리도 다른 친구들처럼 에어컨이 시원한 곳에서
인턴십이나, 토익, 토플,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등록금이 없으면 그것들도 의미가 없었다.
해외로 배낭여행 간 친구들의
웃음 가득한 SNS를 들여다보는 것은 더 고역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한 지옥은
지금 바로 너구리 앞에 있었다.
바로,
'무더위'
너구리도 시간이 지날수록 다람쥐처럼 도망가고 싶어졌다.
'이 무더위에 단 3일도 버티기 힘든데,
저 셰퍼드 선배는 어떻게 견디는 거지?'
잠깐의 휴식 시간,
너구리는 등에 줄줄 흐르는 땀을
꼬리로 닦으며 선배에게 물었다.
"왜, 이런 일을 계속하세요? 힘드시잖아요."
셰퍼드 선배는 쉬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앉았다.
짙은 갈색 털 사이로 땀이 비 오듯 흘러도,
바깥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며 말했다.
"이 일도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그리고 여기선,
땀 흘리는 만큼 내가 나를 지키는 기분이 들어."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거든."
그날 퇴근길,
쉰내 가득한 무더위는 끝까지 쫓아왔다.
너구리는 버스 밖,
어둑한 새벽녘의 환경미화공무원을 멍하니 바라봤다.
너구리는 셰퍼드 선배의 말이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거든...'
'진짜, 나는 왜 이걸 하고 있는 걸까.'
'등록금 때문일까?'
너구리는 같은 방향으로 달려 나가는 친구들을 보며,
'왜 다들 똑같은 길만 가는 걸까' 생각하곤 했었다.
문득, 얼마 전 본 뉴스가 생각났다.
도배를 배우거나, 청소일을 시작한 또래들의 인터뷰가 인상 깊었다.
셰퍼드 선배의 말은 단순히 멋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가 정해 놓은 이상적인 모습에 나를 맞추지 않는다'는 뜻 같았다.
묵묵히 박스를 나르던 선배의 눈빛에는
어딘가, 반짝이는 힘이 있었다.
그날 이후,
너구리는 조금 달라졌다.
여전히 온몸은 땀으로 젖었고,
허리는 끊어질 듯했고,
팔에는 멍과 스크래치가 생겼지만,
처음처럼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너구리는 셔퍼드 선배의 말투 하나, 발놀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였다.
어느새,
얼린 포카리를 입에 문 너구리는
손놀림이 더 빨라졌다.
너구리의 앞발은 민첩하게 박스를 분류하기에 충분했다.
더위와 싸우느라 몸은 힘들었지만
어제보다 조금 더 견딜 수 있었다.
얼마 뒤, 너구리는 신입 알바에게 요령을 알려주며
포카리를 건넸다.
그 모습을 본 셰퍼드 선배는 웃으며 말했다.
"너구리, 벌써 적응 다 했네."
처음엔 버거웠던 너구리도,
그렇게 누군가의 선배가 되었다.
택배 상•하차의 기계음과 쉰 땀냄새도
이제는, 익숙한 신호처럼 받아들여졌다.
너구리는 냄새로 택배를 분류했고,
소리만으로 물량을 눈치채고 대처했다.
예민한 귀와 코는 무더위 속에서도
노하우를 더 빠르게 익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너구리의 여름은
한 방울, 한 방울,
흘러내리는 땀방울로 성장하고 있었다.
누구나 같은 길을 걸어가는 듯한 사회.
수능이라는 하나의 꼭짓점.
각종 자격증과 해외 어학연수.
그리고 좋은 회사.
이어지는 결혼과 출산.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벌써 많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택배 알바생 너구리의 여름 무더위는
같은 스펙이 아닌,
각자의 개성이 담긴 스펙은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도 괜찮다고 말해준다.
더 이상,
소위 '좋은' 직장이나 이력만이
사람의 가치를 증명해주지 않는다.
시원한 에어컨 아래의 사무직보다
현장에서 흘리는 땀이 더 낫다는 것도 아니다.
하루를 견대내는 자신만의 이유.
그것이 바로,
요즘을 살아가는 힘이자 자산이지 않을까.
무더위 속에서 택배를 나르며
자신만의 리듬으로 삶을 만들어가는 너구리처럼,
우리 각자의 어른들도,
누군가의 기준 속
'탈락'이 아니라 '다름'으로 나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