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짧은 우화 #20
연말이 점점 다가오고,
차가워진 공기가 뺨을 스칠 때마다
회사에도 어색한 공기가 늘어났다.
성과평가 시즌이었다.
동료들은 조용히 지나가길 바랐다.
자신들은 눈에 띄지 않으려,
여우를 자주 언급했다.
"이번에 여우님 차례 아닐까요?"
"여우님이 적응력 좋아서 잘하실 것 같아요."
여우는 센스 있고, 책임감 있고,
누가 봐도 '리더감'이었다.
팀 내 연차도 가장 많았다.
하지만 여우는 이런 분위기를
훨씬 전부터 눈치채고 달가워하지 않았다.
'난, 곰 팀장처럼 되고 싶진 않아.'
곰 팀장은,
여우의 첫 사수였다.
언제나 진중하게 책임감이 있었고,
느렸지만, 여유 있게 문제를 대처했다.
말수는 적었지만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만큼은 최고였다.
여우가 처음 입사했을 때,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문서 하나, 숫자 하나도 직접 확인하며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곰 선배이던 시절부터,
여우가 실수해도
괜찮다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팀을 효율적으로 구성하고,
회사 내 시스템을 정리하기도 했다.
그렇게 여우는,
곰 선배가 팀장이 되는 과정을 모두 지켜봤다.
그러던 어느 날,
곰 팀장은 여우를 따로 불렀다.
'퇴사'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곰 팀장은 겨울잠을 위해,
겨울에 주로 휴가를 썼지만
이번엔 달랐다.
팀장이 된 지,
겨울은 커녕
가을이 채 오지 않은 날이었다.
눈치가 빠른 여우는
마음 한편에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팀장이 된 후부터,
곰 팀장은 사자 대표와 다른 팀까지 챙기며
본인의 전문적인 업무는 손댈 시간도 없었다.
마치, '협상가'가 된 듯했다.
요청하고, 설득하고, 거절당하는 일이
주된 업무로 바뀌었다.
'회의'가 주요 직무가 되었다.
그래도 곰 팀장은 다른 팀장들보다,
든든하게 중간 관리자 역할을 잘해나갔다.
위로는 보고하고, 설득하고,
아래로도 전달하고, 설득하며,
어렵고 복잡한 무게를 감당했다.
그런 곰 팀장은 '전문가'가 아닌,
'상담사'이자 '중재자'처럼 변해가는
본인의 직무영역에 대한 고민을 거의 매일 했었다.
여우는 그런 곰 팀장을 이해하면서도
이제 함께 할 수 없다니 아쉬웠다.
곰 팀장을 존경하고 있던 여우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처졌다.
그 뒤로 몇 개월이나,
곰 팀장의 자리는 쭉 비어 있었다.
내부에서 바로 승진을 시키거나,
외부에서 채용하려 했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리더의 자리가 공석이었지만,
회사는 여전히 잘 굴러갔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문제가 자주 생겼고,
결론도 쉽사리 나지 않았다.
"그건 곰 팀장이 했던 방식인데요"
라는 말도 많이 언급되었다.
곰 팀장이 사라진 영역엔,
남은 이들에게 그 무게가 나눠졌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평가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여우님, 지난번에는 팀장제안 거절하셨는데,
이번에는 팀장으로 승진되실 것 같아요."
"외부 영입은 쉽지 않아서요."
인사팀 고양이가 웃으며 말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전문분야가 아니에요."
"감사합니다만, 저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여우는 부드럽게 거절의사를 밝혔다.
여우는 영리했다.
'회사의 공석을 메꾸는 것' 같은 권위를 얻기보다,
자신의 '전문성'을 키우는데 더 관심 있었다.
'관리자로의 역량 키우기'는
여우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여우는 이상하게 곰 팀장이 생각났다.
쌀쌀한 찬 바람이 부는 날이면,
항상 꿀차를 타 마시던 곰 팀장이었다.
"리더는 결국 나보다 팀을 더 우선해야 해."
"그 길을 혼자 감내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같아."
곰 팀장의 말이 떠올랐다.
여우가 바라봤던 곰 팀장은,
누구보다 팀을 위했고, 늘 침착했다.
언제나 팀원들의 완충지대가 되어주며,
힘든 일이 생겨도 앞장서서 칼바람을 막아주었다.
그랬던 곰 팀장도
결국은 떠났다.
어떤 이유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자유롭고, 독립심이 강한 여우는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나는 아직,
팀보다는 내 일을 사랑하고 싶어.'
여우는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오르는 길을 좋아하지만,
자신에게는
'내가 나일 수 있는 자리'가 더 중요하다는 걸.
지금의 시대는
평생직장에서 관리자가 되는 것이
더 이상 '성공'의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깊이 있게 이어가고,
자신만의 전문성을 발전시키며
'성장'하는 용기가 더 큰 박수를 받는 시대이다.
승진은 분명 성장의 징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필요로 하는 '리더십'이
누군가에겐 '나를 잃어가는 일'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결국 중요한 건,
리더가 되는 것 자체가 아니라,
'나답게 일하는 일'을 지켜내면서
지속해서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