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짧은 우화 #21
퇴근길, 바람이 차가웠다.
곰 아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그러다, 달달한 붕어빵 냄새에 멈춰 섰다.
'아이들이 좋아하겠지?'
몸은 힘들어도 아이들을 생각하며
붕어빵의 따뜻한 온기를 잃지 않으려 꼭 품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소리.
"내놔아, 내가 가지고 놀 거야."
"아빠! 리모컨 어디 있어요?"
"여보 왔어요? 수도꼭지에서 물이 또 새요."
잠시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붕어빵의 온기는 식어가며,
그렇게,
곰 아빠의 두 번째 하루가 다시 시작됐다.
.
.
예전엔 주말마다 등산도 가고,
혼자 라디오를 들으며 꿀차를 마시곤 했다.
하지만 요즘엔,
거실도, 방도,
심지어 대화 속에도,
온통 누군가의 자리로 채워져 있었다.
"아빠 아빠, 나 목마 태워줘."
"아빠, 나 물총 사줘요. 친구들 다 있단 말이야."
"밥 먹고, 아이 숙제 도와줘야 해요."
"여보, 오늘 분리수거하고, 마트도 가야 돼요."
"다음 주말엔 아버님 생신인 거 알죠?"
늘, 일정이 빽빽했지만,
곰 아빠는 아이들과 노는 시간이 즐거웠다.
언제나 남편 역할도 최선을 다했다.
회사에선 후배들에게 밀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요즘 트렌드라는 건,
너무 빨라 따라잡기도 벅찼다.
그래도 항상 가족들을 보며 힘을 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상했다.
집에 있어도 쉬는 느낌이 나지 않았다.
말은 하고 있었지만,
웃기도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자기자신이 없는 것 같았다.
가끔 외로웠다.
뭔가 허전했다.
회사에서, 집에서, 가족들 사이에서
분명, 내 역할과 물리적 자리는 있었지만,
정작 나를 위한 공간은 없었다.
'내 자리는 어디지?'
어느 날, 고장 난 전등을 고치기 위해
공구 상가를 들렀다가,
작은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집에 돌아온 곰 아빠는
발코니 구석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아내가 물었다.
"거기서 뭐 해요?"
"그냥, 앉아있을 의자 만들려고"
아내는 순간, 거실의 쇼파를 바라봤지만,
이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곰 아빠는 낡은 나무 상자를 세 개 가져왔다.
그리곤 두 개는 쌓아서 테이블로,
하나는 의자로 만들었다.
아이들이 담요로
자신들의 텐트를 만들었을 때,
내심 부러웠었다.
아이들이 잠든 시간,
곰 아빠는 의자에 앉아, 가만히 창밖을 내다봤다.
'내 자리를 찾은 것 같아.'
보름달이 곰 아빠를 반겨주듯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내가 다음날,
꿀차세트를 선물해 줬다.
그날 밤, 곰 아빠는
헤드셋을 끼고,
찻잔에는 따뜻한 꿀차를 탔다.
정신없던 하루를 돌아보며,
꿀차의 온기와 함께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헤드셋 너머로 들려오는 모닥불 소리는
도시에서의 삶에 위안을 주었다.
어느 날,
아이가 곰 아빠의 자리를 보고 물었다.
"아빠는 왜 여기에 앉아요?"
"음... 이건 아빠만의 의자이거든.
아빠가 다시 '곰'으로 돌아가는 곳이야."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우리 텐트 같은 거구나?
나도 내 의자 갖고 싶어요."
곰 아빠는 그날 이후,
나무를 가져와 다듬기 시작했다.
나뭇결을 따라 리듬을 탔다.
"슥슥—, 사각사각—"
온전히 나를 위해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어쩔 땐,
아이들의 고사리 같은 손과 함께
톱질도 했다.
어느새 올려둔 미니 라디오에선
옛 노래도 흘러나왔다.
"이 노래 아빠가 좋아하는 거야."
나무조각들이 모여
점차 의자로 탄생되었다.
큰 의자 2개와 함께
작은 의자 2개를 더 만들었다.
발코니 문에 문패도 만들어 붙였다.
'아빠곰의 아지트'
곰 아빠에게도 동화가 필요했다.
그날 밤은, 가족들을 초대했다.
포근한 나무 냄새와 은은한 꿀차 향이
아지트를 감쌌다.
때로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으로,
그곳에서 곰 아빠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곰 아빠는 이제,
가족을 지키는 동시에,
자신도 지키기로 했다.
곰 아빠가 홀로있는 아지트에는
아내의 사랑도,
아이들과의 추억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보통의 중년 아빠들은
치열한 사회 속에 살면서,
정작 '나를 위한 시간'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어쩌면,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기도 한다.
자신을 챙길 시간이 있긴 한 걸까.
회사에서,
가정에서,
누군가를 지탱한다는 건,
'나를 지탱하는 것'이 먼저여야 튼튼해진다.
가족을 위해,
매일같이 무너지지 않으려는 모든 아빠들이게,
'자신만의 아지트'가 필요하다.
누군가는 게임 캐릭터로,
누군가는 이어폰 속 음악으로,
누군가는 여유로운 산책으로,
누군가는 터질듯한 달리기로,
또 누군가는 단 한 잔의 커피로,
각자의 마음속에 자신만의 작은 발코니가 필요하다.
중요한 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잠시라도 '나로 돌아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다시 살아갈 힘을 만드는 곳.
그게 바로, 각자의 아지트이다.
그곳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잊었던 '사랑'을 발견한다.
그것은 '나를 위한 사랑'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