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의 탈모 걱정

어른을 위한 짧은 우화 #22

by 이루나

사자는 아침마다 물 웅덩이 앞에 섰다.


수면에 비친 축 처진 갈기를 빗으며

하나 둘 빠지는 털을 세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이번 주만 해도 예순세 개."

포효 대신,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한 때, 사자의 갈기는 초원에서 가장 풍성했다.

바람에 살짝 나부끼기만 해도

반짝일 만큼 멋스러웠다.


다른 동물들은 사자의 위엄 있는 갈기 앞에

고개를 자연스레 숙였다.

특히, 암사자들의 눈빛은 따스했다.


그런데 요즘, 갈기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얇아지고, 빠지고, 푸석푸석해졌다.


처음엔, 계절 탓이라 생각했다.

그다음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물 웅덩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루밍을 해도 갈기는 듬성듬성했다.


며칠 전부터, 하이에나들이 수군거렸다.

"사자 형님, 요즘 갈기스타일이..

좀 가벼워졌네요? 시원하시겠어요. (키득키득)"


사자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요새, 신경 쓸 일이 많아서 그래."


사자는 애써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그 웃음소리가 밤마다 귓가에 맴돌았다.


젊은 사자들은 풍성한 갈기를 날리며

#오늘도위엄있게 #멋쟁이사자 #갈기셀카

해시태그로 포효했다.


울창한 숲처럼 빽빽한 갈기와

탄탄한 근육질을 뽐내는 젊은 사자들을 보며

사자의 마음은 조금씩 헝클어졌다.


어느샌가 갈기보다 자존감이 더 많이 빠졌다.

위축된 사자는

혀로 핥아 탈모를 치료해 준다는 병원을 찾았다.


기린 의사는 긴 목으로

사자의 머리를 위에서 바라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많이 비었네요..."

"유전이에요. 아버님도 그러셨죠?"


사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는 할 수 있지만, 예방차원이에요."

기린 의사의 말에 사자는 허탈하게 웃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디선가 젊은 수사자의 포효가 들려왔다.

힘차고 거침없는 소리.

한 때 자신도 그랬다.


"이제 내 시간도 저물어가는 걸까."

사자는 더욱 풀이 죽은 얼굴로 초원을 걸었다.


조금 뒤, 사자는 얼룩말 무리를 마주쳤다.

얼룩말들은 평소처럼 길을 비켜줬지만,

사자는 그들의 행동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꼈다.


아니, 어쩌면 예전과 똑같은데

사자가 다르게 느끼는 걸 수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풀숲에서 어린 사자 한 마리가 다가왔다.

무리에서 떨어진 듯,

겁에 질린 눈으로 사자를 올려다봤다.


"길을 잃었구나?"

"사자 아저씨, 갈기가 별로 없네요?"


어린 사자의 솔직한 말에 사자는 피식 웃었다.

예전 같으면 화를 냈을 텐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마도 체념이 웃음으로 바뀐 탓이었을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 이렇게 된단다."

"그럼, 아저씨는 이제 약해요?"


순간, 사자의 시선이 멍해졌다.

바람도 따라 멈춘 듯, 정적이 이어졌다.

잠시 뒤, 사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갈기가 강한 사자를 만드는 게 아니란다."

"적은 갈기가 약한 것도 아니지."

"나이를 먹어도, 사자는 사자란다."


사자는 어린 사자를 입에 살포시 물어

무리 근처로 데려다준 후,

다시 물 웅덩이 앞을 찾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갈기를 그루밍하는 시간보다,

갈기를 걱정하는 시간이 더 길어진 게.'

'사자보다 갈기가 더 중요해지면 안 돼.'


그러자,

수면에 비친 갈기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사자는 더 이상 털을 세지 않기로 했다.


그날 밤,

사자는 초원 한가운데 바위 위에 올라섰다.


달빛이 비치는 갈기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었다.

텅 빈 갈기 사이까지 다정하게 닿았다.

사자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으르렁— 그르르르— 으어—!"

포효는 메아리가 되어 멀리 퍼져나갔다.


갈기는 적었지만,

울림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소리는 천둥번개 만큼 컸다.

어두운 초원은 숨을 죽였다.


동물들은 웅성거렸지만,

사자는 신경 쓰지 않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당당한 걸음 뒤로

바람이 포효처럼 따라왔다.




나이가 들수록,

흰머리가 나고,

탈모도 진행되지만,

빠지는 건 머리카락만이 아니다.


자신감도, 지위도, 체면도 조금씩 빠진다.


하지만, 세상이 나를 잊고,

화려함만 기억할지 모르지만,

나를 존중해야 하는 건 여전히 '나'이다.


그것이 어른의 품격이지 않을까.


어쩌면, 품격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힘에서 나온다.